한비야
세계지도를 펼쳐 보며 ''''걸어서 세계일주''''를 계획한 당찬 소녀, 친구들이 졸업하던 해인 25살에 대학에 입학한 늦깎이 대학생.
세계적인 홍보회사에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다 느닷없이 사표를 던지고 여행 가방을 싼 ''''노처녀 직장인'''' 7년간의 오지여행을 책으로 펴낸 ''''베스트셀러 작가'''' 도움이 필요한 곳이면 전쟁터든 재난 지역이든 어디든 달려가는 ''''긴급 구호 팀장''''
''''세상이 만들어놓은 한계와 틀 안에서 살지 않고 지도 밖으로 행군하겠다''''는 당찬 포부를 밝힌 그녀는극한 상황, 안타깝고 괴로운 현장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녀 특유의 따뜻함과 적극적인 삶의 태도로세상은 먹고 먹히는 정글의 법칙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가슴을 뛰게 하고, 피를 끓게 만드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얼마나 황홀한 삶인지 온몸으로 보여주는 한비야 씨를 23일에 이어 24일에도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났다.
나를 키운 것은 8할이 산, 해발 5천 미터까지 30일 동안 쉬지 않고 걸은 것이 제일 좋아▶ 우선 바쁜 중에도 이틀이나 시간을 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오지 여행 초입에서 이야기가 끝났는데 처음에 어떤 계획을 세우셨는지가 궁금해요.
- 처음 계획은 오대양 육대주 대륙을 일단 걸어서 가야 하니까 첫 번째는 일단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 물론 한 대륙에서 대륙은 비행기를 타지만 대륙 안에서는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 두 번째는 오지로 다닌다. 세 번째는 한 곳에 가면 적어도 한 달 이상 그 나라에서 제대로 본다 이거였어요. 또 세상에 높은 산, 제가 가보고 싶은 산은 초반부에 힘 있을 때 많이 가두자. 그래서 첫 번째로 간 곳이 네팔이에요. 저는 아장아장 걸음마 할 때부터 산에 다녔어요. 언니들 둘 공주는 산에 안 가거든요. 우리 아버지가 산을 굉장히 좋아하셨는데, 왕비와 공주 둘은 집에 계시고, 혹시 저도 산에 안 다닐까 봐 걸음마 할 때부터 저를 산에 데리고 다니셨어요. 아장아장 걷는 아이가 산에 왔으니 얼마나 사람들이 잘한다, 잘한다 했겠어요. 신이 나서 산 사람처럼 왔다 갔다 했죠. 제가 받은 칭찬의 80%는 산에서 다 받았고 저를 키운 8할이 산이에요. 지금도 목요일과 토요일에 산에 가고 일요일에는 사람들이 내려올 쯤에 또 가요.
▶ 그럼 네팔에서는 에베레스트를 가신 거예요?
- 에베레스트를 끝까지 올라가지는 않았지만 일단 길게 트래킹을 하고 싶었어요. 지리산 3박 4일이 성에 안 차는 거예요. 더 걷고 싶은 거예요. 노고단 갔다가 천왕봉을 내려오죠. 그럼 다시 돌아가고 싶어요. 정말 지치도록 걷고 싶은데 3박 4일 갖고는 모자라요. 그때는 네팔에서는 한 달 비자밖에 안 나와서 한 달 비자 받자마자 첫날 트래킹 회사에 가서 수속하고 다음 날 떠나서 27일 동안 산에 있었어요. 이 트래킹 코스하고 저 트래킹 코스하고 이어서 계속 했죠. 포터(porter)랑 같이 갔는데 네팔은 워낙 트래킹 코스가 좋아서 하루거리에 잘 수 있는 곳이 있어요. 그곳에서 밥도 먹고 자고 정보도 주고받고 하면서 이십 며칠 동안 계속 걷기만 했어요. 제일 좋았던 게 실컷 걸었다는 거예요. 해발 5천 미터까지 올라갔어요. 베이스캠프가 4천 내지 5천 미터 정도에 있으니까요.
▶ 고산 공포증은 없었어요?
- 한국에서는 2천 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까 고산증이 없었는데 네팔에서 뭣도 모르고 한국에서처럼 왔다 갔다 하니 고산증이 나죠. 무척 추운데도 안에서 열이 나서 옷을 벗고 다 토하고 어지럽고 그럴 때는 빨리 내려와야 해요. 포터가 저를 업고 몇 날 며칠을 다녔어요. 너무너무 고마웠죠.
▶ 여자 혼자서 오지를 걸어 다닌다는 게 쉽지 않은데 겁이 없으신 편인가요?
- 생각보다 안 위험해요. 예를 들면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국이 얼마나 위험하다고 그러는데요. 다른 나라 외국 상사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지켜야 하는 수칙 같은 거 보신 적 있으세요? 너무 기기 막혀요. 우리나라는 다 우범지역이고 물도 먹지 마라, 재래식 시장에 소매치기 조심해라, 음식 아무거나 먹지 마라, 길거리 음식은 절대로 사먹지 마라 등등 우리나라 지침이 그래요. 다른 나라를 볼 때도 마찬가지죠. 물론 상식적으로 조심해야 할 것은 있죠. 뉴욕의 밤거리를 해진 다음에 간다든지 이런 것은 아니겠지만 여기서 걱정하는 것처럼 대단히 위험하거나 어렵거나 못하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다른 나라 여자들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다니는데 우리나라 여자들이 왜 못 다니겠어요? 우리나라 여자들이 훨씬 더 영리하고 지혜롭고 사리분별이 밝아서 여행을 다니면 굉장히 사랑받아요.
▶ 음식은 다 현지 음식을 먹었나요?
- 식성이 좋아요. 저는요 혓바닥에서 조미료가 따로 나와요. (웃음) 그래서 뭐든지 먹으면 맛있어요. 그리고 현지 음식을 먹어야 제일 싸요. 왜냐하면 그 동네 사람들이 먹는 게 제일 싼 거죠.
혓바닥에서 나오는 천연조미료로 전 세계의 식단을 평정▶ 가서 현지인들과 제일 빨리 친해질 수 있는 방법이 뭔가요?
- 바로 그 나라 음식을 먹는 거죠.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누가 왔어요. 한식을 차려줬는데 김치를 보고 찡그린다거나 아니면 된장찌개를 보고 이게 무슨 냄새냐 하는 것은 맛이 없다고는 할 수 있어도 그걸 보고 찡그린다거나 하면 대접은 해 주겠지만 그 친구한테는 정이 안 가죠. 5천 년 동안 수천 만 명이 먹고 있는 우리 음식인데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하는 것은 싫잖아요. 그 나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죠. 그 대신 조금 비위가 상하는 것도 있어요. 향료나 음식의 재료도 그렇고, 부화하지 않은 달걀은 그 안에 병아리가 있는 것을 그대로 삶아서 먹잖아요. 여기 있는 사람들도 먹는데 뭘 하면서 그러려니 하죠.
▶ 처음에 몇 개국을 다니신 거예요?
- 지금까지 다 합해서 98개국이에요. 첫 여행 네팔부터 시작해서는 7년 동안 65개국이었고요. 아프리카 대륙 1년 반 정도 끝나면 집에 와서 옷 갈아입고 일주일 정도 쉬면서 산에 가요.
▶ 그렇게 7년을 다니시면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은 언제에요?
- 그때 딱 맞닥뜨려서 위험했다 이런 순간도 있었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니 등골이 오싹 한 적이 있었어요. 파키스탄의 빙하지역을 가는데 빙하가 무척 미끄럽거든요. 낭가파르바트 꼭대기까지는 갈 수 없지만 베이스캠프가 5천 5백 미터 정도에 있는 곳이었어요. 4천 미터 정도까지 빙하가 나타나는데 크레바스(눈에 묻힌 계곡이나 빙하의 갈라진 틈)가 있어요. 빙하가 갈라진 곳이라 굉장히 위험한 곳인데요, 아무리 살살 가다가도 밑을 내려다보면 무섭잖아요. 그런데 살살 가다가 어딘가에 발이 걸렸어요. 발이 앞으로 안 나가는데 누군가 뒤에서 목덜미를 확 잡아끌었어요. 숨이 콱 막히더라고요. 그래서 뒤로 넘어졌어요. 뒤에 누가 있나 봤지만 아무도 없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제 발이 걸린 곳이 굉장히 깊은 크레바스였어요. 발만 디뎌서 각도 0.1도만 앞으로 기울어져도, 내가 앞에 무거운 짐을 지고만 있었어도 앞으로 고꾸라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크레바스가 있었던 거예요. 뒤에서 누군가가 목덜미 뒤를 확 잡아당겼을 때 제 뒤에는 사람이고 뭐고 아무도 없었고 우리 일행은 저 뒤에 있었거든요. 그 손길은 하나님이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가 없어요.
▶ 사람 때문에 무서웠던 적은 없었어요?
- 사람 무섭죠. 그래서 가스총 같은 거 갖고 다녀요. 사실 가스총이 총이 아니라 농축된 후춧가루에요. 기침을 하거나 눈을 못 떠서 혼미해 있을 때 도망가는 건데 피해갈 만큼의 시간을 버는 거죠. 원숭이한테 가스총을 써 본 적도 있어요. 원숭이들이 얼마나 못됐는지 여자들을 깔봐요. 하등동물들이 원래 여자들을 깔봐요. 정글이나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같은 곳에 원숭이들이 많거든요. 여자들이 지나가면 치마를 들치거나 덤벼들어요. 조그만 아이거나 할아버지라도 남자를 뒤에 데리고 오면 슬슬 피해요.
원숭이들이 무서운 게 야생이니까 광견병이 있을 수도 있거든요. 포악하게 달려드는 원숭이가 있었는데 손에 있는 걸 다 뺏어가는 날강도 같아요. 그래서 바나나라도 원숭이한테 뺏기고 나면 분하더라고요. 그래서 한번 가스총을 쐈더니 깩깩거리면서 도망가더라고요.
''''너희들 전쟁 끝나기 전에 죽으면 죽을 줄 알아!'''' ▶ 잊지 못할 사람이나 추억이 있다면요?
- 가장 잊지 못할 사람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난 아이, 그 아이가 긴급구호 일을 하게 만든 거죠. 그때는 아프가니스탄의 난민촌에 여행으로 갔는데 아이들이 굉장히 반가워하는 거예요. 아이들은 ''''브루카''''라는 것을 뒤집어쓰고 다니는데 외국 사람들도 스카프를 쓰고다니지만 이렇게 얼굴이 동글납작한 사람을 본 적이 없는 거예요. TV도, 신문도 아무것도 없는데 직접 이렇게 보니까 아이들이 얼마나 호기심이 강하겠어요? 제가 들어가니까 아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요. 그런데 아이들의 얼굴이 얼마나 밝은지 몰라요. 중동의 아이들과 노는 게 참 쉬워요. 남자 아이들한테 이름이 ''''후세인'''' 손들어봐라 하면 반쯤 손들어요. ''''아라파트'''' 손들어 봐라 하면 나머지 반이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중동 지도자들의 이름을 대면 저 아줌마가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나 하면서 손들어요. 이름이 몇 개 안되는 것 같아요. 마하메트, 모하메트... 그런데도 손 안 드는 아이들한테는 ''''빈 라덴''''이냐 하면 깜짝 놀라요. 여자 아이들은 더 쉬워요. 제일 많은 아이가 ''''미리암''''이었어요. ''''미리암''''이 성경에서 ''''마리아''''에요. ''''미리암'''' 손들어보라고 했더니 삼분의 이는 드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사람들 열 명 모아놓고 ''''김'''' 씨 손들어봐라 하면 드는 것처럼요.
또, 아프가니스탄에서 태권도가 굉장히 인기였는데 그때도 그 오지 마을의 아이들이 태권도라는 말은 모르지만 동양에서 온 사람들이 무술을 한다는 걸 알아요. 아무거나 동작을 하나 보여주면 자기들끼리 그중에서 제일 못하는 애가 사범이 돼서 가르치곤 해요. 여자 아이들한테는 삼색 볼펜을 가지고 꽃반지를 그려주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별 무늬, 다이아몬드 무늬, 정말 예쁜 아이한테는 시계를 그려줘요, 9시 5분. (웃음) 어떤 아이는 제 손을 놓치면 다시는 못 잡으니까 끝까지 제 곤을 잡고 있다가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싼 아이도 있어요. 부모님들도 즐거워하지만 탈레반이 외국인과 놀다 가면 얼마나 괴롭힐까 이런 생각에 아줌마들은 제가 그만 갔으면 좋겠다는 눈빛을 보내요. 저도 눈치가 있죠. 제가 그때 아이들하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게 뭐냐면 이란에서 한 달 반 동안 여행을 했기 때문에 ''''파르시(페르시아 인들을 의미함)''''라는 페르시아어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었어요. 그곳은 국경이기 때문에 페르시아 말들을 해요. 그래서 알고 있는 단어들을 총동원해서 제스처를 해 가면서 떠나기 전에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너희들 전쟁 끝나기 전에 죽으면 죽을 줄 알아'''' 그랬더니 아이들이 알았대요. ''''너희들이 정말 천 원짜리 시시한 병에 걸려서 죽으면 줄을 줄 알아'''' 그랬더니 또 알았대요. 너희들이 그 약속만 지키면 이곳 전쟁이 끝나면 꼭 돌아온다고 했더니 알았대요. 아이들이 알았다는 말을 어떻게 하냐면 ''''발레오~''''하면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요. 한 번 상상을 해 보세요. 50명 정도 되는 아이들이 ''''너희들, 전쟁 끝나기 전에 죽으면 죽을 줄 알아'''' 하면 활짝 웃으면서 전부 다 갈대가 한꺼번에 살짝 꺾이듯이 ''''발레오~''''하는 그 모습에 마음이 정말 뭉클한 거예요. 그 아이들이 정말 나하고 안 죽겠다고 약속을 하는 것 같아요.
전쟁이 끝나면 꼭 돌아올게 하며 돌아서는데 어떤 꼬마 여자 아이가 저한테 ''''비야'''' 이러는 거예요. 제 이름이 아니라 페르시아 말로 ''''여보세요''''라는 뜻이에요. 이 아이가 지뢰를 밟아서 팔도 없고 다리도 없는데 수줍게 무언가를 전하는 거예요. 너무 예쁜 아이인데, 저한테 빵을 주는 거예요. 그 빵은 난민촌의 빵이에요. 난민촌의 빵이라는 건 언제 다시 생길지도 모르는 빵이에요. 이 아이가 먹어야 하는 빵인데, 저는 사실 망설였어요. 이 빵을 먹고 이 아이들을 기분 좋게 해주는 게 좋을까 아니면 이 아이들이 이 빵을 먹고 배가 부른 것이 좋을까 생각했어요. 그리고 나서 ''''고마워''''하고 베어 물었어요. 그랬더니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거예요. 그때 이 난민촌 아이들 돌보는 일을 하게만 해 주시면 저의 어떤 것도 아끼지 않겠다고 소원을 빌었어요.
그런데 제가 월드비전 긴급구호 팀장이 되어서 첫 번째로 파견된 곳이 바로 그곳에요. 아프가니스탄 헤라트 난민촌을 찾아갔는데 아이들을 한 명도 못 만났어요. 개인 난민촌이기 때문에 기록은 없었지만 아이들이 약속을 지키고 살아남아서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기를 바라요. 난 내 약속을 지켰으니까 그 아이들도 약속을 지켰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를 세 바퀴 반'''' 첫 권을 그 아이에게 바쳤어요.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는 책에도 아프가니스탄 그 아이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그 아이 이야기를 10년 전에 쓰지 않았으면 ''''한비야 씨는 이야기도 참 잘 엮는다, 소설도 참 잘 쓰시네.'''' 할 뻔했지요.
▶ 약속을 잘 지켜서 정말 그 아이들이 지구를 위해서 뭔가 일을 할 수 있을 거예요. 한비야 씨의 아름다운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여행 이야기를 하느라 사실 중요한 것을 못 물어봤어요. 로맨스는 없었어요?
- 로맨스가 왜 없었겠어요?(웃음) 요즘 이야기만 한다면 현장에 가면 멋진 사람들이 많아요. 그리고 현장에서 사랑에 빠질 뻔한 적도 있어요. 그러나 사랑에 빠진 줄 알았는데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뭐가 부족하고 뭐를 더 해야 하고 이렇게 디브리핑을 하기 위해 방콕이나 싱가포르에서 만나면 -현장에서 멋있던 사람이 정장을 하고 만난다거나 도시에서 만나면- 하나도 안 멋있어요. 현장에서 약간의 긴장감, 두려움, 불안감 그러면서도 해내겠다는 의지가, 그 사람이 매일 머리를 못 감는다거나 옷을 매일 똑같은 것을 입는다거나 그런 것은 전혀 상관없이 최전선의 긴장감이 멋있었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이 보기에 저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입은 한비야보다는 현장에서 쫓기고 무전기 들고 왔다 갔다 하는 한비야가 훨씬 멋있게 보였을 거예요. 그래서 방콕이나 싱가포르 등에서 국제회의가 많을 때는 만나기 전에는 굉장히 가슴이 뛰었는데 만나고 나서는 괜히 만났다 이런 생각을 두 번 했어요. 두 사람...
▶ 긴급구호 팀장 이전에 여행 다닐 때는 없었어요?
- 여행 다닐 때는 많았죠. 그런데 이 사람을 만나서 여행을 접고 결혼을 한다든지 어딘가에 정착해서 산다든지 하는 것은 생각도 안 해 봤어요. 길 위의 사랑은 길 위의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사람이 가는 길과 내가 가는 길이 다른데 어쨌든 만난 거잖아요. 만났을 때 충실하게 즐겁고 재미있고 풍요롭게 같이 여정을 보내고 길이 다르면 미련 없이 그 길을 가는 게 길 위에서의 여행자, 바람의 딸 식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요. 물론 내가 정말 저 사람이다 딱 꽂힌 사람이 없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6~7년 동안 다니면서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겠어요? 당연히 있었죠. 내가 좋다는 사람도 있었고 죽자 살자 쫓아다닌 사람도 있었고 결혼하자는 사람도 있었어요. 거의 외국 사람이었다는 게 저의 딜레마에요.(웃음)
▶ 결혼을 안 하실 생각은 아니잖아요?
- 지금도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고 55살까지는 꼭 찾고 싶어요.
길 위의 사랑은 길 위의 사랑일뿐... 바람의 딸 식 사랑▶ 어떤 사람을 원하세요?
- 일단은 저와 산에 같이 다녀야 해요. 제 꿈 중의 하나가 전 세계에 있는 대륙의 최고봉에 올라가는 거예요. 만약에 그 사람이 체력이 안 돼서 최고봉을 가지 못한다면 일단 베이스캠프까지 만이라도 함께 가는 거예요. 그리고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책을 가까이 하는 순간부터는 이 세상에 심심하다는 단어는 없어지는 거잖아요. 그리고 지금의 저로서는 긴급구호 일을 똑같이 하는 사람보다는 긴급구호의 일을 이해하는 사람이었으면 해요. 만약 어딘가 정착해서 살려면 적어도 반 이상은 외국에서 일을 해야 하니까 이해를 해 줄 수 있어야죠. 지금은 좀 바빠서 안 될 것도 같지만 일단 어떤 사람을 만나면 우선권이 달라지기 때문에 시간이 없어서 못 만나는 것은 아닌 거 같아요.
▶ 한비야 씨의 ''''가슴 뛰는 일을 하라''''는 말에 너무 공감을 해요. 사랑도 가슴이 뛰어야 하잖아요.
- 가슴이 뛰지 않으면 살아도 죽어있는 거죠. 어떤 일이 정말 내 가슴을 뛰게 하는지 매일 매일 곰곰이 생각해야 해요. 매일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있는가, 하고 있지 않다면 가슴 뛰게 하기 위한 과정으로 가고 있는가, 지금 여기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하면 되죠.
▶ 책 7권이 전부 베스트셀러에요. 지금 중고등학생들이 제일 많이 읽는 책이고 그 아이들이 한비야 씨의 책을 통해서 꿈을 키우고 나누는 일에 동참하는 아름다운 일을 하고 있잖아요.
- 그러니까 아이들이 얼마나 예쁜지 몰라요. 저랑 한나절만 아이들 많은 데로 다녀보면 반드시 저한테 돈 주는 아이들이 있어요. 사인해 달라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정말 조그마한 아이들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그 아이들한테는 엄마 또래인 저한테 ''''비야 언니'''', ''''비야 누나'''' 이러면서 5천 원도 주고 그래요. ''''너, 날 뭘 믿고 이 돈을 주냐'''' 그러면 ''''월드비전이잖아요'''' 쑥스럽게 이야기해요. ''''넌 한국에도 도울 사람 많은데 왜 외국 아이들 돕자고 돈을 내냐'''' 그러면 아이들이 ''''급한 사람 먼저 도와야죠.'''' 아이들이 알아요. 지금도 사인회를 하잖아요. 3시에 시작하면 11시부터 와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중고등학생들이에요. 이게 살 빼는 이야기에요, 예뻐지는 이야기예요, 아니면 남자의 마을을 사로잡는 이야기에요, 이건 외면하고 싶은 이야기, 우리가 다 같이 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이야기인데 아이들이 정말 시간을 내서 읽고 설득돼서 후원하고 이러는 모습이 너무 예뻐요.
▶ 어떤 학교에서는 단체로 읽고 한비야 씨를 초청했다면서요?
- 전교생 670명이 독후감을 써서 저에게 보내고 초청을 했어요. 광주에 있는 상일중학교인데 아이들이 글씨로만 되어있는데 이렇게 재미있는 책은 처음이래요. 그리고 월드비전에서 사랑의 빵을 나누어주면 그냥 10원짜리로 채웠는데 이제는 100원짜리로 채워야겠다는 거예요. 또 어떤 아이들은 한비야 선생님도 우리 학교에 모셨으니 다음엔 부시 대통령도 모시겠다는 거예요. 자신감이 생긴 거죠. 그런 것에 일조를 했다는 것이 너무 기뻐요. 제가 병가 중이고 해서 못 올 줄 알았다가 나타나니까 600여 명의 아이들이 정말 한순간에 천장이 떠나갈 것 같이 환호를 하는데 어느 연예인이 오기에 아이들이 그렇게 기뻐하겠어요. 제가 별 게 아니라 그 아이들이 원했던 저를 자기들 힘으로 초청했으니 얼마나 기뻤겠어요. 그 아이들은 이미 중고등학교의 하얀 도화지에 세상은 정글의 법칙뿐만 아니라 학교에서는 무조건 1등을 해야 하고 먹거나 먹히거나 이기거나 지거나 이게 아니라, 물론 그런 분야도 있지만 많은 분야는 다 같이 가고 함께 가고 서로 돌보고 사랑을 주고받는 이런 사랑과 은혜의 법칙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아이들에요.
중국어와 물자배분은 통일 한국을 위한 나의 몫▶ 여행 다녀오고 월드비전 들어가기 전에 중국에 1년간 다녀오셨어요. 중국에는 왜 가신 거예요?
- 이런 말 하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저는요 중국어는 통일한국을 대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인생의 목표 중에서 5개 국어를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중에 하나가 중국어였어요. 지금은 영어, 중국어, 일어, 스페인어를 하죠. 일본어는 일본에서 조금 살면서 공부를 했고 중국어는 본격적으로 1년 동안 중국에서 학교 다니면서 공부를 했고요. 통일이 되기 전에 북한에서 대량으로 난민이 넘어와서 난민촌이 생긴다면 중국으로 넘어가지 어디로 넘어가겠어요. 그러면 난민촌 촌장을 중국말을 할 줄 아는 한국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했죠. 저는 지금도 긴급구호 현장에 가면 물자배분 담당을 하고 있는데, 난민촌 촌장은 소위 말하자면 승진의 사다리로 보면 전혀 다른 사다리에요. 직업군인으로 치자면 아무리 올라가 봤자 상사밖에 못 되는 거예요. 그건 대장으로 가는 길이 아니에요. 그럼 사람들이 왜 그게 하고 싶으냐고 물어봐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만약에 우리나라에서 난리가 났을 때 북한의 주민들에게 식량을 배분해야 하는데 식량 배분을 하는 총책임자가 미국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영국 사람이면 좋겠어요? 당연히 한국 사람이어야 마땅하잖아요. 4,700만 명 중에 한 명의 물자배급 담당자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잖아요. 누구도 부여하지 않은 책임감이 제 어깨에 있어요. 그래서 제가 매일 아프리카에 가는 거예요. 거기서 물자 배분 훈련도 받고 직접 물자 배분도 하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훈련을 받고 있거든요. 그래야 우리나라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잘할 수 있지 않을까요.
▶ 그 준비까지 하셔서 중국어까지 배우셨는데 한비야 씨는 하루 시간을 어떻게 쓰세요? 잠은 자요? 책을 7권을 쓰려면 원고 쓰는 것도 쉽지는 않을 거 같은데
- 잠은 요즘에 매일 자요. 긴급구호 현장에 가면 그게 참 신기한데 잠이 안 와요. 며칠씩 못 자면 제가 시력은 좋은데 눈이 약해서 어떤 때는 며칠씩 못 자고 스트레스가 쌓이면 실핏줄이 터져요. 눈물하고 섞여서 나오면 피눈물이 나요. 조심하고 있는데 그래서 한국에 있으면 매일매일 자요. 글은 주로 밤에 쓰는데, 이단 글을 쓰는 날은 밤을 새우지요. 그리고 제 글은 일기장을 토대로 해서 나와요. 정말 눈 밝은 독자들은 알아요. 비야 언니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고. 그게 맞는 말이에요. 매일 제가 일기장을 쓰지 않았다면 제 책의 단 한 권도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 한비야 씨는 아이들이 몇 명이에요?
- 제는 미혼이지만 딸이 셋이 있어요. 제가 인생에서 꼭 하고 싶었던 일이 딸을 낳아서 키워보는 일이었어요. 결혼한 친구들 중에서 남편 자랑하는 건 하나도 안 부러운데 딸 자랑하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정말 부러워합니다. 특히 딸하고 엄마하고 똑같이 닮잖아요. 한눈에 봐도 너 이 집 딸이구나 하면 너무나 부럽죠. 에티오피아, 방글라데시, 몽골의 딸들을 입양했어요. 데려다가 키우는 딸이 아니라 한 달에 2만 원 후원금을 내면서 그 아이들 학교도 보내고 한 가족의 식량도 해결하고, 그다음에 그 집에서 완전히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게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한 아이 당 2만 원을 주는데, 2만 원을 이 아이에게 직접 주는 게 아니라 어떤 프로그램으로 주는 거예요.
예를 들어 이 아이가 학교를 가고 싶은데 그 동네에 학교가 없으면 안 되잖아요. 한 300명가량을 그 지역에서 돌보면 그중에 한 아이가 내 딸이잖아요. 그 돈을 모아서 학교도 짓고 진료소도 만들고 그 집이 가난하면 젖이 나오는 염소를 빌려줘서 젖을 짜서 팔게 하기도 하고 새끼를 배면 새끼를 주고 그렇게 해서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거예요. 2만 원이 산을 넘고 물을 넘어가면 어떤 아이의 인생을 바꾸게 하는 거예요. 사람으로서 가장 큰 권리가 굶어 죽지 않을 권리잖아요, 열심히 일하면 정말 끼니 걱정을 안 해야 하는 게 정상이잖아요. 또 아이가 학교를 다닐 수 있게, 적어도 ㄱ, ㄴ은 배울 수 있게, 허접한 1,000원짜리 병에 걸려서 죽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면서 일단 이 아이에게 기회를 주는 거예요.
세 딸의 엄마로 사는 기쁨, 일억 원 기부도 쾌척▶ 그러면 만약 청취자 여러분들이 나도 그런 아이를 갖고 싶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 일단 월드비전 홈페이지로 들어오시면 자세하게 나와 있어요. www.worldvision.or.kr 아니면 02-784-2004 전화하시면 안내원이 친절하게 어떻게 후원을 할 수 있고 국가별로 남녀별로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알려드릴 거예요. 다만 한 가지 부탁드릴 점은 한번 시작하면 꾸준히 해야 한다는 건데요, 충동구매가 있듯이 충동후원도 있어요. 불쌍하다 해서 했는데 몇 달 안가서 그만두면 이 아이는 희망이 갑자기 없어지는 거잖아요. 물론 다른 후원자를 찾을 수도 있지만 이 아이가 알아요. 그리고 그 아이한테 후원을 맺으면 아이 사진이 와요. 키가 몇이고 무슨 학교를 다니고 뭐를 좋아하고 이런 게 오는데 6개월마다 한 번씩 발달성장표가 오고 정말 그 아이하고 일대일로 만나는 거예요. 저는 3년 되었거든요. 아이들 커 가는 게 너무 뿌듯하고 월드통장에서 매달 6만 원씩 빠져나가는 것이 제일 자랑스러워요.
▶ 아이들 키우고 후원하려면 돈 많이 버셔야겠어요. 얼마 전에 광고를 찍으셨다고요?
- 난생처음 광고를 찍었는데 월드비전에 있는 한 어떤 상업적인 광고도 하지 안는다가 원칙인데 다행히 공익광고였고 광고료와 인쇄를 합쳐서 세계시민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 거예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세계시민으로서의 책임과 역할, 우리가 무엇을 할 때 어깨를 나란히 하고 갈 수 있고 모두가 함께 좋은 세상을 만들 것인가 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 건데요 이름도 정했어요. ''''지도 밖으로 세계시민 교육''''... 사병이 아닌 사관학교의 개념으로 잘 교육시킨 사관생도가 밖으로 나가서 자기 동료나 비슷하게 관심 있는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것이죠. 벌써부터 가슴이 뛰고 설레어요.
▶ 3월에 다시 아프리카에 가신다고 하는데 늘 건강하시길 바라고 가는 곳마다 행복이 가득하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