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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보원, 정치학과 갔던 광대… "거긴 유머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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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해 남보원 백남봉 하면 한국 연예가를 이끌어온 1세대 코미디언이다. 유랑극단 시절부터 숱한 세월이 흘렀어도 이들은 여전히 지칠 줄 모르는 활력을 자랑하며 현역으로 뛰고 있다. 환갑을 넘기고 칠순마저 넘긴 코미디언 남보원은 방송계에서 은퇴한 지 오래이지만, 그는 결코 은퇴하지 않았다.

    반 평생을 원맨쇼의 대부로 살아온 국보급 코미디언 남보원의 현재 무대는 각종 회갑잔치와 지방공연이지만, 그는 지금도 성대모사의 1인자를 자처하며 젊은 시절보다 몇 배 더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가수로서 앨범도 낸 그를 지난 30일 방송된 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만나보았다.

    남보원

     

    -건강하시죠?

    ▲ "건강하긴 한데 외국에서는, 그러니까 일본의 ''만담''만 봐도 나이든 양반들이 기술을 가지고 지금도 저렇게 재롱을 부리고 박수를 받는데 우리나라에도 저런 것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건만 어째서 그러한 프로그램은 없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지난해에 앨범도 내셨는데, 노래가 전공은 아니시잖아요?

    ▲ "손 선생님, 손 선생님, 제가요, 노래를 했으면 지금 현철이라는 가수가 없습니다. 설운도도 없습니다. 태진아도 없습니다. 송대관도 없어요. 그때는 제가 누구 목소리까지 냈냐면 ''눈물 젖은 두만강''의 김정구 선생, ''배뱅이굿'' 하시던 이은관 선생, 고운봉 선생 목소리 등에 최희준, 배호, 남진… 이런 분들의 목소리를 가수로서 충분히 뽑을 수가 있으니까."

    16살때 헤어진 누이 50년 지나 평양서 만나

    -평안남도 순천에 사셨다고 하는데, 그럼 일사후퇴 때 온 가족이 함께 내려온 것인가요?

    ▲ "아닙니다. 아버지께서는 해방되면서 작은어머니랑 작은누이를 데리고 남쪽으로 가셨어요. 그래서 일사후퇴 때 어머니랑 저랑 큰누이랑 발가벗고 얼음이 둥둥 떠 있는 대동강을 건넜습니다. 그때 물이 가슴까지 찼는데 어머니가 ''허리 펴라우, 허리 펴라우. 허리 펴야지 살지 이렇게 하면 못 산다. 허리 펴라우, 정신 바짝 차리라우'' 하셨습니다.

    다리부터 아랫도리가 얼마나 시린지… 1951년 1월 4일에 16살 어린아이가 보따리 짊어지고 죽기 살기로 넘어왔지요. 그런데 건너오고 나니 큰누이랑 매형이랑 금방 봤다는데 안 보이는 거예요. 그렇게 순식간에 이산이 된 것이죠. 그러다가 지난 2000년도에 50년 만에 평양에서 만났습니다.

    곱던 모습은 하나도 없고 이 다 빠지고 몸은 바싹 마르고 할머니가 된, 내가 16살, 누이가 20살 때 헤어진 누이를 딱 50년 만에 만나니 오죽했겠어요."

    대학 2학년 때 등록금 들고 나와 무대 의상

    -서울에서 학교 다니면서도 유명하셨다면서요? 별명이 짱꼴라라고.

    ▲ "중국음식을 좋아하고 중국집을 들락날락 하면서 자꾸 외상으로 먹으니까 중국집 사람들이 ''우리 이러면 장사 못해, 이 촹컬라 같은 놈아'' 하다가 제가 짱꼴라가 됐습니다."

    -어떻게 코미디언이 되셨나요?

    ▲ "서울에서 중학교 다니다가 퇴학당하고 고등학교에 가서 축구도 하고 레슬링도 하고 유도도 하다 보니까 싸움도 잘 하게 되더라고요. 제가 57학번인데 학교에서 짱꼴라라는 별명으로 넘버원을 차지했지요. 그러다가 윤삼육이라는 친구를 만나 연예계에 데뷔하면서 제 레퍼토리가 확 발전했습니다."

    -데뷔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 "영화배우 모집하는 곳에 가서 사기도 많이 당하고, 아나운서 시험도 보고, 탤런트 시험도 봤다가 떨어졌지요. 그러다가 1963년도에 영화인협회에서 영화배우 모집을 해서 갔는데 ''태산이 높다 하되…''를 팔도 사투리로 해서 코미디 분야 1위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바로 뜬 것은 아니고 밑바닥부터 힘들게 시작했지요."

    ''남보원'' 작명후 2등은 안된다 싶어 더열심

    -남보원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얻게 되셨나요?

    ▲ "윤삼육씨 하고 나 하고 둘이 앉아서 이름을 지었는데 후라이 보이나 체리 보이 같이 무슨 보이는 유치하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넘버원 비슷하게 남보원이 후보로 나와서 좋다 싶어 남쪽 남, 보배 보, 으뜸 원자로 해서 남보원이 됐지요. 이름을 그렇게 지어놓고 보니까 남보원이라는 타이틀 때문에 두 번째가 되기는 싫고 무언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더 열심히 하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남자가 그런 일을 하는 것을 안 좋게 봤을 텐데.

    ▲ "그래서 군대를 갔다 와서 동국대학교 정치과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요즘 같아선 정치 안 하고 차라리 광대가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분들 보면 유머가 없잖아요(웃음)"

    -예전에 국회의원 하셨던 이주일 씨가 이러시더라고요. ''그런데 말이야, 그 사람들은 거기가 코미디더만?''

    ▲ "그분들이 코미디를 먼저 하니까 우리가 지금 할 게 없는 거예요(웃음). 옛날에 정치풍자는 흉내도 못 내고 입에도 못 담았지만 요즘에는 사람들이 신문이나 뉴스에 나온 이야기를 풍자하는 걸 제일 좋아하더라고요.

    여하간 아버지가 정치를 하길 바라셔서 제가 정치과에 갔는데 제가 가지고 있는 소질을 가지고 그럴 수 있습니까? 그래서 2학년 때 등록금으로 등록을 안 하고 양복점에서 무대의상을 맞춰 입은 거예요. 위아래로 쫙 차려입고 멋지게 입고 휘파람 불면서 동네를 지나가는데, 곱창 먹던 노인들이 ''어이, 짱꼴라!''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제 짱꼴라라고 부르지 말고 남보원이라고 부르라고 하면서 곱창에 소주 얻어먹곤 했지요. 그렇게 알딸딸하게 다니다가 결국 코미디언도 되고."

    -문화훈장을 받고 부모님 산소에 가셨다는데.

    ▲ "살아계실 적에 제가 이렇게 광대가 돼서 유명해지니까 아버지는 날아갈듯 하셨지요. 우리 아버지도 끼는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세태가 그래서 반대를 하셨던 거지요. 제가 어릴 적에 어머니랑 셋방에서 살고 작은 어머니는 집에서 살고 하시니까 불만이 쌓여서 저도 모르게 깡패 생활을 하면서 못된 짓도 하곤 했는데, 그런 잘한 것도 없는 사람한테 나라에서 화관문화훈장을 줘서 ''이게 나한테 올게 아닌데'' 하고 먼저 저를 데리고 38선을 넘어오신 어머니께 바쳤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아쉬웠던 점이 있으신가요?

    ▲ "인간문화재 박동진 선생님께서 ''야 이 썩을 놈아. 너는 임마 그 원맨쇼가 뭣이냐? 그 목소리를 가지고 판소리를 했으면 인간문화재가 되었을 것인데'' 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후계자가 없어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 많은 개그맨들은 내 후계자가 아니냐고 할지 모르지만 고유하게 제 전수자를 만들어서 한두 시간씩 혼자서 별의별 소리를 낼 수 있게 해야 하는데 말이죠."

    -늘 건강하시고, 요즘 웃음이 아쉬운 시대이니까 많이 웃겨주시길 바랍니다.

    ▲ "우리 국민들 지금 상당히 초조하시고 대선도 남았잖아요? 그래서 과연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될 것인가 하는 스릴과 서스펜스 속에서 살아가는데 저는 그 속에서 웃기면서 좋은 대통령을 뽑기 위해서 한줌 노력을 하겠습니다."

    ※CBS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는 월~토 오후 4시 5분에 방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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