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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누구에게 긴급한 조치였나



기자수첩

    긴급조치, 누구에게 긴급한 조치였나

    [변상욱의 기자수첩]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의 긴급조치 판결 분석보고서가 공개되면서 ''여론몰이다, 반성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등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

    △긴급조치, 누구에게 긴급했기에 내린 조치였나?

    긴급조치 재판의 피고인으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 고 윤보선 전 대통령, 고 문익환 목사, 고 장준하 선생 등 유명한 지도자들이 보고서에 대거 들어가 있다. 이런 유명인사들의 이름은 모두 실명이고 보통 사람들은 사생활 보호를 위해 익명으로 처리되어 있다. 보통 사람들의 경우에는 정권에 대한 단순한 비판이나 답답한 심정을 얘기했다가 유죄판결을 받은 사건들이 많다. 이럴 경우 모두 긴급조치 9호 위반이다.

    당시에 기술된 내용을 보면, 모 점술가는 "1인 독재인데다가 빈부차가 너무 심하다"는 말을 했다가 징역에 자격정지 2년을 받았다. 이 분 오히려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 한 광부도 "독재정치는 계속 이어질 거야, 대대로 할지도 몰라"라고 말했다가 징역 2년을 받았다. 진짜 대대로 이어서 하겠다고 ''장녀''가 대선출마를 선언한 상황이다. 예지력이 대단하신 것 같다.

    한 농부도 "정치는 잘 하는데 독재다"라는 말 한마디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한 교사는 "우리나라 정권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해먹는다"라고 했다가 긴급조치 9호 반공법으로 구속당했다.

    또, 집권세력의 성스캔들을 입에 올렸다 처벌된 사람들도 꽤 눈에 띈다. 모 탤런트는 "국방부 제작 영화를 찍다가 어느 분께서 영화배우 누구랑 썸씽(something)있다"고 말했다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한 주부는 "어느 분이 영화배우 누구네 집에 들어가는 걸 본 사람이 있다더라"고 했다가 징역 2년6개월을 받았지만 2심까지 가서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받았다.

    다른 주부도 "어느 분은 여자 탤런트와 사귀는데 걸핏하면 죽도록 때린대. 또 누구는 어느 여배우에게 별장을 사줬다더라"는 말로 징역 2년6개월을, 모 술집주인이 "여배우 누구는 어느 분하고 좋아지내는 사이여서 그 분 부인이 해외로 쫓아냈다거 하더라"고 말했다가 1심에서 징역 4년, 2심에서 1년으로 감형을 받았다.

    10.26 현장에 여자 가수뿐 아니라 여대생까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사건들은 허위사실 유포보다는 국가기밀누설로서 문제가 된 사건이 아니었을까 싶다. 요즘 같이 몰카나 녹음기술이 발전해서 국민들 나누는 이야기가 도청됐다면 국민 상당수가 교도소를 들락날락하고 있을 것이다.

    △''긴급조치'' 관련 판결내린 판사 실명 공개는 문제의 논외

    당시의 정치 사회 분위기를 고려할 때 긴급조치 판결들은 엄연히 법으로 처벌이 규정되어 있는 행동들을 판사가 단독으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데 대해서 어느 정도는 납득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판결이 분명히 있었다는 것 또한 받아들여야 한다.

    1976년 11월 서울지법 영등포지원의 이영구 부장판사(현 변호사)는 수업중 "우리나라 정권은 동해물 백두산 마르고 닳도록 해 먹는다"는 다고 말해 기소된 교사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영구 전 판사의 판결문에 따르면 "우리나라 정권 중에 자유당이 일인집권했으니 사적 경험이 있는 사실이고, 박정희 정권도 장기집권 중인 게 사실, 장기집권에서 오는 지루한 안정에 대해 자유 국민이 갖는 염증과 감상을 표현한 것일 뿐이므로 무죄"라고 판결했다.

    1976년 5월에는 광주고법 재판장 노병인 부장판사(별세)도 "박정희 대통령이 무력으로 집권했다"는 등의 발언을 해 긴급조치 9호 등 위반 혐의로 기소된 뒤 1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던 농민에게 원심을 깨고 무죄를 선고했다.

    실명이 거론된 당시의 관련 판사들 중 현직에 계신 분들도 있어 곤혹스러워 하며 두문불출하고 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긴급조치를 충실히 반영해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 승승장구 출세하고 지금은 현직 떠나 변호사 개업해 편안하게 누리고 있는 사람들과의 형평성 문제도 제기하고 있다.

    또 별 것 아닌 일에도 엄청난 형량을 구형하며 유신체제 유지에 적극 나섰던 당시 검사, 고관대작 역임하고 지금 잘 지내는 검사들에게도 언론은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주장인데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이야기다.

    그저 편한대로 사법부 현직 간부들만 꺼내 비추는 언론의 책임이 크다고 본다. 일단 현직 판사들로서는 여기가 끝일 것으로 전망이다. 더 이상 뭘 어떻게 하라는 요구는 없으리라 본다. 다만 대법원이 포괄적인 유감과 자성의 입장을 밝히고 다시는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못하도록 다짐하면 긴급조치 과거 판결 문제는 여기서 매듭지어 질 것으로 보인다.

    긴급조치 위반자의 무너진 삶, 이후 쫓기듯 전과를 숨기며 살아온 고통, 가족들마저 직장에서 내몰리거나 진에서 누락되거나 하며 겪은 가혹한 연좌제의 아픔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당혹스러움과 혼란은 가벼운 편이다.

    아울러, 실명공개 문제는 ''실명공개''라고 이름 지어 부르는 것 자체도 문제다. 재판 기록에 판사가 실명으로 되어 있고 재판 기록을 그대로 공개하는 것이지 누구를 겨냥해 이름만 따로 뽑아 친일명단 공개하듯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록에 있는 명단을 그대로 놔두느냐 일부러 삭제해 감추느냐, 둘 중 하나의 문제일뿐 억지로 끄집어내어 공개하느냐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인터넷 게시판도 실명제로 올리라는 마당에 과거 재판기록의 이미 공개된 실명은 문제될 수는 없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진실화해위원회에 독재정권에 아들을 잃은 한 아버지의 증언이 눈길을 끈다.

    "모두 용서하고 싶다. 용서하겠다. 하지만 무엇을 용서해야 하는지는 알아야 용서를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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