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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의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공부하고 과거를 거쳐 관직에 진출한 계층이 대종을 이룹니다.
공민왕 때의 개혁에 참여한 이들은 1391년 과전법을 시행해 권문세족의 불법적인 토지를 몰수, 주인에게 되돌려 준다는 것을 명분으로 대대적인 토지개혁을 시도합니다.
이것이 무인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조선 건국 주체세력의 물적 토대가 된 것으로, 손실답험법(損失踏驗法)이라는 세법으로까지 일시에 바뀌게 됩니다. 당연히 자영농의 수적 증가와 함께 종래의 귀족세력은 몰락하게 되는 혁명적 경제개혁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부정축재자 재산환수''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과전법으로 대표되는 조선초기의 토지경제는 점차 본래의 정신을 망각하고 수신전(守信田:관리 사망시 그 아내에게 세습), 휼양전(恤養田:관리 사망시 고아인 자녀에게 세습) 등의 명목으로 세습돼 새롭게 관직에 진출하는 신진관료에게 지급할 토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되는 등의 문제점을 초래하게 됩니다.
세조는 1455년에 등극해 조카 단종을 죽이고 강력한 왕권을 장악해 갑니다. 집권과정의 부도덕성은 권력의 탐닉을 가져오고, 저항세력을 막기 위해 왕권을 전제화해야 했습니다.
결국 수신전과 휼양전을 박탈, 과전법을 폐지하고 직전법(職田法)으로 대체해 현직관료를 대상으로 토지를 지급합니다. 이러한 직전법은 약 90년간 시행되다 명종 11년(1556)에 폐지됨으로써 관리는 녹봉만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권력있고, 문벌 좋은 사람들이 관직을 독점하는 세상이니 그들은 이미 국가에서 주었던 수조권적 토지가 아니라도 상속받은 토지 등 여러 자산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신분유지 및 사회적 체통에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한편 각 지방의 토호, 수령, 지주층, 관료 등은 종래보다 더욱 토지집착이 강해집니다. 이러한 토지집적 욕구가 커짐으로써 지주제가 확대돼 이 시대 초야에 묻혀 실학을 연구하던 많은 지식인들이 하나같이 토지소유와 분배문제를 들고 나왔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백가쟁명(百家爭鳴)의 개혁안이 나오고 있었으나, 당시 집권층은 당리당략에 빠져 이념적인 예송논쟁(禮訟論爭)이나 이기론(理氣論)에 치우쳐 현실성있는 정책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실학자들의 개혁안을 외면함으로써 조선 후기 마지막 기회였던 국가 재충전의 기회를 잃고 맙니다.
18세기부터 성장해가던 상업자본마저 보호하지 못하고 붕당 및 세도가들은 그들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사회통합의 기회를 완전히 잃게 되고 맙니다.
이에 따라 봉건왕조는 19세기 왜란 이후 꾸준히 성장해 온 민란에 혼비백산합니다. 확산되는 천주교, 전국적으로 번져나가는 동학, 보수와 진보의 사상적 대립 등 이 때의 집권층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난제가 중첩되고 국가의 미래는 암울하기만 했던 것입니다.
결국 이 시기의 집권층이 보다 도덕적이고, 현실정치의 감각을 가진 귀족으로서, 혹은 국가 경영자로서 의무를 다했더라면 오늘 우리는 어떠한 위치에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노량진 이그잼고시학원 한국사 김유돈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