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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서신'' 김영환 "북한 밀입국은 시대의 사명감이었다"

''강철서신'' 김영환 "북한 밀입국은 시대의 사명감이었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김영환

강철 김영환. 보통사람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며 주사파라 불렸던 학생들에 그는 신화와도 같은 존재였다. 강철이란 사람이 정말 존재하는 사람인지, 한 사람인지 여러 사람인지 의견이 분분할 정도로 그의 실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10여년에 걸쳐 대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대학을 마친 김영환은 남파간첩을 만나게 되고, 잠수정을 타고 북한에 가서 김일성 주석을 두 번 만났고, 공작금 40만 달러를 받았다. 그러던 그가 90년대 중반에 이르면 북한의 수령론을 사기극이라고 하고, 이제는 김정일 체제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평범한 청춘 대신 지하당의 당수처럼 살았던 ''강철서신'' 김영환의 이야기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김영환


- 어디서 자라셨어요?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고, 6살 때 대구로 가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있다가, 이후엔 서울에서 살았습니다.

-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전형적인 중산층 지식인이었어요. 유신에 대한 비판의식이 대단히 강했죠. 그래서 저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얘기를 많이 들으면서 자랐어요. 특히 제가 중학교 3학년 때인 78년 12월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는데요. 부모님이 관심이 많으니까 저도 덩달아 관심을 가지고 밤늦게까지 개표방송을 지켜봤어요. 아침에 일어나보니 어머니는 그때까지 개표방송을 보고 계시더라고요. 당시 저희 동네인 관악동작 지역에서 신민당 후보가 18만 표 정도를 얻었고, 공화당 후보가 5만 표를 얻어서 압도적인 격차로 신민당 후보가 이겼고요. 저희 학교가 있었던 용산 마포에서는 1, 2등 당선자가 모두 신민당 후보였어요. 그런 걸 보면서 대단히 통쾌한 기분을 느꼈을 정도로 정치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 원조 주사파로 불리시는데요. 당시 그 정보는 어디서 얻었나요?

다른 사람들과 달리 특별한 접근통로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정부자료를 주로 활용했어요. 도서관에 가면 일반인은 접근이 금지되어 있지만 석사 과정 이상에게만 접근이 가능한 자료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대학 1,2학년 때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김일성이나 항일운동과 관련된 자료를 많이 찾아봤어요. 물론 대학 도서관에 있는 자료들은 반공주의라든가 중립주의적인 입장에서 쓰인 자료들이었어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고등학교 때 배우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죠. 상당히 많은 학자들이 김일성의 항일운동 자체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상황이었고요.

- 강철서신을 쓸 때가 몇 살이었나요?

만 23세였습니다.

- 아직 다 갖고 있나요?

당시엔 이적표현물이라 제가 소지할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교도소에서 나온 89년에 제 글을 모아서 ''강철서신''이라는 제목의 책을 정식으로 출판했는데요. 저는 항상 감시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정작 그 책을 가질 수 없었어요.

- 강철서신은 주로 어디에서 썼나요?

저는 당시 수배 상태였는데요. 운동권 사람이 타자기를 갖고 있는 건 위험한 때였기 때문에 제가 펜으로 쓰면 저를 도와주던 여자후배가 타자를 했고, 그걸 서울대에서 가까운 복사집에서 복사했죠. 그런데 초벌복사본은 위험했기 때문에 2벌만 갖고, 나머지는 재벌복사를 해서 배포했어요.

- 왜 초벌복사본이 위험했나요?

초벌복사본은 원본을 쓴 사람과 가깝다는 증거이기 때문이죠.

- 도피생활을 할 때 가장 잊을 수 없는 기억은?

경찰에서 저를 NL 그룹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고 파악했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수배했어요. 그래서 경찰들이 엄청나게 따라붙었습니다. 저희 어머니를 미행하는 사람만 6명씩 2개조로 총 12명이 있었으니까요. 제가 어머니를 만나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에 당시 연세대에 다니던 여동생과 만나기 위해 연세대 극예술연구회 동아리방으로 제 후배를 보냈어요. 대학 안은 상대적으로 안전했거든요. 그래서 여동생을 만나려고 약속장소에 갔는데, 어머니가 나와 계시더라고요. 대단히 반가웠지만 한편으로는 주위에 이상한 사람이 없는지 당황하기도 했어요. 알고 보니 어머니가 등산 차림으로 나와서 산을 넘어오셨던 거예요. 산은 한적하고, 평일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를 미행하기가 극히 어려웠던 거죠.

- 부모님은 어떤 반응이셨나요?

당시 정권에 대한 분노가 강하셨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이해하는 측면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단히 안타까워하셨죠.

- 수배되는 동안 측근들도 많이 고통 받았죠?

저 때문에 여러 명이 고통 받았어요. 저와 가까운 후배 한 명이 있었는데요. 제가 그 후배와 사전에 약속해놓은 게 있었어요. 만약 잡혀가더라도 내가 있는 곳을 바로 얘기하면 의심할 테니까 2~3일 정도 고문을 참다가 거짓으로 장소를 실토하라고 했는데요. 이 후배가 잡힌 다음에 저하고 약속한 그대로 했어요. 그랬더니 저쪽에서는 철석같이 믿고, 그 후배와 똑같은 얼굴의 가면을 만들었대요. 후배를 데려가면 이상한 행동을 해서 제가 도망갈 수도 있으니까 경찰관이 그 후배 가면을 쓰고 약속장소로 나온 거예요. 당시 500만 원 정도 들여서 만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아무튼 수십 명의 경찰이 그곳에 배치됐고, 당연히 저는 안 나갔죠. 그 후배는 며칠 동안 엄청나게 맞았다고 하더라고요.

- 20대 초중반의 나이에 ''내가 너무 큰일을 벌이고 있지 않나'', ''너무 과대평가 받는 것 아닌가''라는 정신적 부담감도 있었을 것 같아요.

당연히 있었습니다. 저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의 짧은 시간에 너무나 많은 운동권 사람들이 우리와 연계해서 일하길 원했어요. 근데 저도 운동권 경험이 별로 없고,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도 대부분 마찬가지였어요. 저와 동갑이 2~3명 있었고 나머지는 다 후배들이었기 때문에 부담감이 컸죠. 그나마 저는 약간의 경험이라도 있는데, 제가 집중적으로 수배되면서 저와의 연계선이 자주 끊어졌어요. 그때 저는 ''지나치게 과격하게 흐르지 않을까. 대중의 지지로부터 이탈하지 않을까''라는 부분을 가장 걱정했습니다.

- 지금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어떤가요?

표현도 대단히 과격했고, 운동방식도 대단히 과격했는데요. 그런 과정 속에서도 어떻게 그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는지 미스터리입니다.(웃음) 당시엔 운동권 자체의 기본적인 건강함이 있었고, 정권이 워낙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언론이 제대로 된 정보를 발표한다 하더라도 국민들이 신뢰하지 않았어요. 그런 부분이 우리가 활동하는 데 유리한 측면이었습니다.

- 연애는 했었나요?(웃음)

전혀 못 했어요. 하지만 연애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어요. (웃음)

- 89년에 처음으로 남파간첩과 만나셨다고요?

네. 어느 날 오전 10시쯤 집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자기가 어떤 연구소의 연구원인데, 자료를 부탁하고 싶다면서 당장 만나자고 하더라고, 지금 집 앞 공중전화 박스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자료를 부탁한다는 건 만나기 위한 핑계였고요. 자기가 북한에서 온 연락대표 김철수라고 하더라고요.

- 기분이 어땠나요?

일단 당황했죠. 처음엔 ''이 사람 신분을 알 수 없다. 안기부에서 나온 사람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동네 뒷골목을 30분 정도 걸으면서 그 사람이 주로 얘기를 했는데요. "자기 신분을 못 믿을 수도 있으니까 1주일 후 몇 시 몇 분에 평양방송에서 ''평양의 김영희가 서울의 김영철에게 보내기로 한 편지는 보내지 않기로 했습니다.''라는 방송이 나올 것이다. 그러면 믿어 달라."고 하더라고요.

- 91년에 잠수함을 타고 북한으로 밀입국을 하셨는데요.

당시 저희들 입장에서는 시대의 사명감이었습니다.

- 잠수함 속은 어떤가요?

큰 잠수함이 아니었어요. 반잠수정이라고, 굉장히 작아서 실제로는 3명 정도만 탈 수 있어요. 당시 승무원이 6명 있었는데, 객실이란 게 2명이 완전히 몸을 쪼그려서 겨우 앉을 수 있는 정도였어요.

- 해안까지 잠수정이 들어왔나요?

그 당시엔 해안까지 들어왔어요. 근데 90년대 말 이후에는 한국에서 전자 장비를 개발해서 쉽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바닷가에서 만나면 위험하니까 바닷가에서 1~2km 떨어진 야산에서 만나서 잠수정까지 걸어갔어요. 잠수정을 타고 4시간 정도 걸려서 해주 해안가에 도착했습니다. 해주에 도착하니까 노동당 부부장과 과장이 영접을 나왔더라고요. 거기서 아침식사를 하고, 바로 헬기를 타고 평양까지 갔습니다.

- 안 무서웠어요?

잠수정을 타고 굉장히 좁은 절벽을 지나가는데, 그 절벽 위에는 보초병들이 대형 서치라이트를 바다 위로 왔다갔다 비추고 있더라고요. 순간 저는 긴장했는데, 북한에서 온 호위병들은 전혀 긴장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더라고요.

- 김일성 주석과의 첫 만남은?

당시 김일성 주석은 주로 묘향산에 거주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기차를 타고 묘향산까지 가서 호텔에서 1박을 하고, 그 다음 날 만났습니다. 오전 10시에 만나서 12시까지 얘기를 하고, 12시부터 식사를 하면서 1시간 반 정도 얘기를 더 했습니다.

- 첫 인상은 어땠나요?

평소에 알고 있던 것과 비슷했어요. 굉장히 사교적이고, 사람을 편하게 해주려고 하고, 인자한 분이었습니다.

- 직접 북한에 가본 느낌은 어땠나요?

북한에 가서 실망한 게 여러 가지 있었어요. 일단 관리들이 일반 주민들에게 대단히 고압적인 자세였어요. 마찬가지로 높은 관리들은 낮은 관리들에게 고압적이었고요. 어쨌든 저희들은 사회주의 운동을 해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높은 수준의 평등을 실현하고, 관민사회의 벽을 없애고,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는 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투쟁해왔잖아요. 70년대에 사람들이 표창장 받으러 박정희 대통령 앞에 와서 90도로 인사하는 모습에 대한 반감을 어릴 때부터 키워온 사람 입장에서, 남한의 70년대보다 훨씬 더 관료적인 북한 사회를 보면서 많은 거부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론가로 북한에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학자들과 토론을 주선해놨더라고요. 그래서 그분들과 이틀에 걸쳐서 토론을 했는데요. 물론 대단히 똑똑한 분들이었지만 자유롭게 얘기하지 못하더라고요. 예를 들어 제가 "만약 수령이 오류를 범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예를 들어 문화대혁명은 중국 공산당과 조선 노동당에서도 오류로 인정하는데, 수령이 그런 명백한 오류를 범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수령에게 잘못된 것이니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릴 것인가, 아니면 수령은 무조건 옳으니까 그냥 하라고 말할 것인가?"라고 물어봤어요. 그랬던 이분들이 그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대답을 하더라고요. 북한은 세계에서 주체사상 연구가 가장 발전되어있는 나라가 아니라 주체사상 연구의 자유가 가장 없는 나라였어요.

- 주체사상의 좋은 점은 무엇이었어요?

주체사상 자체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식이니까 절대적인 휴머니즘을 추구하는 사상이었죠. 이것이야말로 21세기를 이끌어 갈만한 사상이다, 자연과학의 시대와 응용과학의 시대를 넘어서서 인류가 인간과학의 시대로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러려면 사상철학에 있어서도 인간 중심의 사상철학을 중심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것이 대단히 매력적인 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대중의 정서를 고려해서 주체사상이라고 부르지 않고 주로 인간중심철학이라고 합니다.

- 95년부터 공개적으로 "북한과 마르크스주의는 분리해서 봐야 한다."고 말하기 시작했는데요. 자기가 신봉했던 것을 자기 입으로 아니라고 말하기까지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요.

대단히 힘들었어요. 저에겐 몇 차례에 걸쳐서 그런 충격이 있었는데요. 동유럽 사회주의 사회의 붕괴가 일차적인 충격이자 제 일생에서 가장 큰 충격이었습니다.

- 북한에 갔을 땐 이미 붕괴가 시작되고 난 다음이잖아요?

그러니까 이미 그때는 생각이 많이 바뀌고 있을 때였습니다. 국유제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나 개혁경제 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아니라는 생각을 이미 갖고 있었죠. 북한을 유지하는 게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개혁경제인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도 이미 신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주체사상을 기초로 해서만 나올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고, 김일성이나 북한의 학자들에게 기대를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북한 사회에서 직접 본 것이 두 번째 충격이 됐어요. 하지만 북한 사회에 대해 실망만 많이 했을 뿐 그 실상은 정확히 몰랐어요. 그런데 이후 탈북자들에게 들었던 것, 특히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90년에 한국에 들어온 강철환, 안혁 씨의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증언이었어요. 아우슈비츠 수용소보다 훨씬 더 잔혹하고 비참한 수준이었죠. 운동권 사람들 대부분이 거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저 같은 경우 오랫동안 북한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기 때문에 대충 그 말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감이 빨리 오는 편이거든요. 근데 이건 도저히 거짓이라고 볼 수 없었어요. 믿어야 하는데, 믿기는 너무 어려운 충격이었어요.

- 99년 10월 4일에 ''북한에 다녀온 것에 대한 반성문''을 쓰셨는데요. 그 배경은 무엇이었어요? 조갑제 씨가 관계됐나요?

조갑제는 제가 국내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만 중개를 했었어요. 국내에 들어오더라도 수사 받지 않도록 했죠. 원래 저와는 전혀 관련 없는 분이었는데요. 당시 월간조선에서 저희를 인터뷰하는 특집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사람들과 조금 친해지고, 또 조갑제 씨 입장에선 제가 왜 귀국하지 않고 해외에 있는지 궁금했겠죠.

- 월간조선이란 매체와 인터뷰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나요?

저희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건 북한 인권운동과 민족운동이었어요. 지금은 많은 언론매체나 사람들이 나서고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별로 없었어요. 당시엔 그 부분에 대해 월간조선이 가장 적극적이었고. 그런 부분에 대해 좋게 평가하고 있던 때였어요.

- 월간조선과의 인터뷰라든가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하는 것에 대해 젊은 시절의 친구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대단히 큰 거부감을 보이는 분들이 많았고요. 너무나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반응을 보인 분들도 있었습니다.

- 황장엽 씨와 국정원에서 만난 계기는?

제가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을 때 황장엽 씨를 만나고 싶다고 했어요. 하지만 국정원에선 허락하지 않았죠. 그러다가 일단 수사가 한 고비를 넘겼고, 황장엽 씨도 저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피력했어요. 그래서 만나게 됐죠. 근데 한밤중에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만났기 때문에 긴 얘기는 나누지 못했어요.

- 황장엽 씨를 ''20세기 최고의 사상가''라고 말한 이유는?

저는 주체사상, 혹은 인간중심철학에 대해 대단히 높은 신뢰를 갖고 있고요. 21세기 인류가 중심적으로 해나가야 할 사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을 만든 분이 황장엽 선생이잖아요. 그리고 학문적 조예도 대단한 분입니다.

- 요즘은 어떻게 지내세요?

북한과 관련해서 탈북자들을 지원한다든가 북한의 인권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이런저런 잡지에 글도 투고하고 있습니다.

- 일심회 사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세요?

만약 언론에서 나온 게 사실이라면 대단히 안타까운 일이죠.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는 북한에 대한 정보를 구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상태였는데, 지금은 너무나 많은 탈북자들이 여기 와있잖아요. 여기에 있는 탈북자들을 못 믿겠다면 중국에 가보세요. 얼마든지 생생한 정보들을 직접 들을 수 있는데 아직까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활동하고 있는지.

- 만약 다시 80년대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살 것 같아요?

노선이 달라질 순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비슷한 삶을 살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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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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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OOGLEkhjdghs2025-03-11 16:49:50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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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다보면 권태기도 오고 슬럼프도 오는 법이죠. 내가 열심히 노력해도 사람들이 몰라줄 떄도 있고 되려 좋지 못한 시선과 말만 들을 떄도 있죠. 하지만 밝은 해과 어두운 밤이 지난 후애 오는 것 처럼 힘들고 어려운 역경을 이겨내고 나면 꼭 행복한 일이 생길거에요! 누구보다 열심히 하시고 노력하시니까 꼭 좋은 결과 있을겁니다. 원하는 바 이루길 응원하고 화이팅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