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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시골의사'' 박경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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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 박경철의 아름다운 동행>으로 알려진 박경철은 서울에서 의대를 마치고 마흔 살 이전에 친구들과 함께 고향 안동으로 내려간다. 병원에서 그가 만난 환자들은 그에게 의사로서의 사회적 지위와 부를 부끄럽게 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데…….

다리를 절단하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난 젊은 여자 환자, 농약 중독으로 죽어가는 아들을 둔 가난한 노모의 사연 등을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박경철 의사


- 어렸을 때 시골에서 함께 자랐던 친구들이 지금 같이 병원을 운영하신다고요?

네. 동네에서 같이 자랐던 친구 세 사람이 모두 의사가 됐습니다. 시골의 독특한 분위기일 수 있는데요. 그때만 해도 이과에서 성적이 좋으면 의대로, 문과에서 성적이 좋으면 법대로 보내던 시절이었어요. 자기 의지가 아니라 정체성 없이 진학했던 것 같아요.

- 어릴 때부터 경제관념 쪽에 밝으셨나요?

전혀 그렇지 못했어요. 오히려 시골에서 쌀 팔아서 학교를 다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경제관념은 익숙하지 못했죠. 경제적으로 크게 괴롭다는 생각은 안했지만 그것이 갈망으로 작용하지도 않았습니다. 도시에서 잘 사는 아이들이라도 봐야 갈망이 생기겠죠.

- 학창시절에 독서광이었다고요?

고등학교 2학년 때 밖의 봄빛이 너무 반짝여서 책상을 옥상으로 빼서 니체를 읽다가 선생님한테 맞기도 했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마당에서 내려다보면 백로가 놀고, 명로가 미꾸라지를 잡아먹던 모습을 보면서 자랐기 때문에 과거의 장면들에 대한 아련한 추억들에 잠겨있었어요. 그래서 유사한 환경이나 자극이 주어지면 쉽게 금방 그쪽으로 감정이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 책은 어떻게 조달했나요?

초등학교 때만 해도 공부 외에 독서를 할 수 없었어요. 시골 환경이 그랬으니까요. 그러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 대구로 유학을 가고,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학교 도서관이라는 걸 처음 봤어요. 거기 있던 엄청난 책들이 바다처럼 느껴졌어요. 그때까지 접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억눌림이 갑자기 해소되는 느낌이었죠. 그때부터 독서를 많이 하게 됐어요.

- 대학 시절에 심적 갈등을 많이 느끼셨다고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배우는 것과 눈에 보이는 게 달랐거든요. 우리가 배운 건 교육이란 건 일정한 틀에 맞춰서 진행됐고, 학교에서 옳다고 배운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됐죠. 제가 본과 1학년에 진학할 때 즈음은 온 나라가 시위에 휩싸일 때였는데요. 의과대학은 너무 타이트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이 사회활동에 뛰어들 때 도서관에서 움츠린 경우가 많았어요. 그런 모습에서 자괴감이 느껴졌습니다.

그 시절에 가장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본과 1학년 때 저와 함께 공부하던 동료가 미국 문화원 점거 사건에 연루되면서 제적당하는 상황까지 벌어졌고, 그런 상황에서 끝까지 도피한다는 것에 대해 인간적으로 고민이 컸습니다. 그래서 학생 운동 쪽으로 발을 들여놓으려던 찰나에 경찰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입지가 곤란해졌습니다.

아버지가 사직을 하느냐, 내가 그만두느냐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했는데요. 고맙게도 아버지께서 "네가 선택해라. 네가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내가 직장을 그만두는 한이 있더라도 말리지 않겠다. 다만 그것이 우리 가족의 삶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고, 우리 가족의 삶을 우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면 물러서라."고 말씀하셨어요. 고민 끝에 결국 제가 물러섰는데,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순직하셨어요. 그런 상황이 겹치면서 가치관에 엄청난 혼란을 겪게 됐습니다.

- 아버지는 어떤 상황에서 돌아가셨나요?

당시 한창 권위주의 정권 시절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지방에 내려오면 그 지역 경찰력의 절반이 대통령 경호에 동원됐습니다. 도시자 관저에 전두환 대통령이 주무시는데 인근의 모든 경찰력이 3~4일 전부터 물샐 틈 없이 경비를 할 정도였죠. 그때 아버지 연세가 49세였는데요. 굉장히 과로를 한 셈이었죠. 그래서 경비가 끝나자마자 정신적 피로가 누적되는 상황에서 12시간 정도 오프 시간이 주어졌대요. 그때 가톨릭 신자였던 아버지는 피정 모임에 참여하셨는데, 돌아오시는 버스 안에서 돌아가셨어요. 중간에 가까운 병원에 들렀는데 갓 졸업한 의사가 적절한 치료를 하지 못하고 산소마스크만 씌운 상태로 대도시로 이송됐어요. 그 와중에 뇌사가 와서 3일 후 돌아가셨습니다.

- 주식 투자는 언제부터 하셨나요?

의대 대학시절부터입니다. 어떻게 보면 양심을 접고 하숙방에 누워 빈둥대야 할 상황이 된 거잖아요. 당시 학생들이 가졌던 소박한 열망들이 저는 현실적으로 꺾인 상태라 하숙방에서 패배자의 모습으로 빈둥거리고 있는데, 저와 함께 하숙하고 있는 친구의 책장에서 우연히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란 책을 접하게 됐어요. 그 책의 핵심은 ''미래 사회는 지식이 권력''이라는 거였어요. 그 말을 읽고 번개를 맞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 삶에서 가장 큰 전류가 흐르는 느낌이었죠.

그때만 해도 총과 칼이 곧 권력이었는데, 미래 사회는 지식이 권력이라는 뉴 패러다임을 얘기하는 토플러의 이야기가 온몸을 충격으로 몰아넣었어요. 토플러가 말하는 미래사회의 권력이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의사로서의 길 외에 내세울 수 있는 지식 능력을 갖고 있는가 반문해보게 되었고, 거기에 대한 준비로 의업 이외에 공부할 다른 것을 찾다가 경제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 ''시골의사''라는 필명으로 주식 투자에 관련된 글을 기고하게 된 계기는?

97년 정도부터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면서 인터넷 매체를 통해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기고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저도 취미로 공부한 부분에 대해 많은 토픽처럼 글을 써서 오픈했었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됐어요. 그래서 어쩌다보니 제가 명함을 드리면 정말 의사냐고 반문하는 상황까지 생겼습니다.

- 잠시 의사 가운을 벗은 적도 있었죠?

제 본업은 의업이잖아요. 예를 들어 경찰관이 에베레스트에 올랐다고 해서 산악인이 아니듯 저 역시 의사로서의 본래의 삶이 중요하죠. 경제나 투자 분석에 대해 내가 공부한 것을 조금씩 글로 쓰거나 의견을 낼 수는 있지만 그것이 본류가 될 수는 없는데, 당시 모 공중파 방송국에서 저에게 취재를 왔었어요. 그래서 의사로서의 삶에 침해가 되지 않도록 이름이나 얼굴, 소속을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취재에 응했는데, 그쪽에서 약속을 어겼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병원의 이름까지 다 나온 거예요.

근데 방송이라는 건 시청자들이 여과 없이 보기 때문에 제가 대단한 무언가를 가진 사람으로 비칠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 방송을 보고 난데없이 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진짜 환자와 가짜 환자를 가릴 수가 없을 정도였어요. 그리고 제 환자들과의 중요한 연대도 많이 깨졌어요. 제 환자들은 저를 ''내 병을 고쳐줄 수 있는 의사''라는 관점에서 봐야 하는데 투자 전문가라는 관점에서 먼저 보게 되면 편견이 생기죠. 하지만 일단 모든 것이 내가 뿌린 씨앗이라고 생각하고 1년간 병원을 쉬면서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그 후 고향으로 내려가게 된 계기는?

의대 본과 4학년 때부터 고향 친구들끼리 농담처럼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를 했습니다. 시골에서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의사가 되기까지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어요. 경상도 사투리로 얘기하면 아재, 아지매들이 저희들이 성장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셨죠. 그래서 우리도 언젠가는 그분들께 도움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분들이 지금은 다 노인 연령이 되셨는데, 이분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드릴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근데 우리가 60살이 돼서 돌아간다면 그건 로하스나 웰빙의 개념에서 다운 시프트 하는 거죠. 정말 도움이 될 수 있을 때 돌아가자고 생각해서 친구들끼리 40살 전에 돌아가기로 결의를 했고, 그래서 39살이 되던 해에 친구들이 다 고향에 돌아가서 병원을 시작했습니다.

- 종합병원의 경영구조에서 의술과 타협해야 하는 부분도 힘드셨나봐요.

매일 아침 진료 실적 통계표를 받았어요. 특히 제가 근무하던 병원이 재벌그룹 계열에서 운영했기 때문에 더 그런 면도 있었던 것 같아요.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평가가 얼마나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는가, 병원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가,라는 관점으로 평가가 되기 시작하면 의사라는 존재의 역할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죠. 어떻게 보면 우리는 사회 부적격자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다행스러운 점은 다른 직업을 가진 분들은 그런 결정을 하기가 쉽지 않지만 저희들은 언제라도 창업이 가능한 직업이기 때문에 조금만 마음의 양보를 하면 언제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쉽게 고향으로 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 시골의사로서 살아가면서 만났던 환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분들은?

우리는 삶에서 우연성과 필연성 중 고민을 하게 됩니다. 모든 일이 우연 같지만 사실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건 수많은 우연들이 점철된 기록의 결과죠. 현재의 내가 있는 것이 필연이라면 그 과정들에 지나왔던 우연들 역시 오늘의 필연을 만들기 위한 연결고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책에서 기록으로 남긴 분들은 대개 그 순간 질병이라는 불운이 다가왔던 분들이죠. 우리가 병을 피해간 건 행운이지만 그분들에겐 불행으로 다가왔던 거예요.

언젠가 다리를 절단한 20대 숙녀분이 미니스커트로 나타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원래 아주 아름답고, 눈이 부실 정도로 빛나고, 아주 역량 있는 외국계 은행에 근무하시던 숙녀분이었는데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가 난 거예요. 예고치 않은 불행이 다가온 거죠. 병원에 도착하셨을 때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보호자가 없었어요. 보호자 없이 20대 여성의 다리를 절단한다는 건 상당히 무리가 있는 일입니다. 나중에 법적으로도 문제가 생길 수 있거든요. 근데 너무나 응급한 상황이었어요. 시간이 20~30분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병원 응급실에 있던 선생님들이 연대서명을 하면서 모든 책임을 의사들이 지겠다고 하고 절단 수술을 했습니다.

더군다나 그분은 결혼을 석 달 앞두고 있었는데요. 약혼자가 중환자실을 지키다가 한 달 정도가 지나자 보이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분은 퇴원할 때까지도 자기 몸의 한 부분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원래 어릴 때 내 몸을 잃어버린 경우와 어른이 되어서 잃어버린 경우는 달라요. 걷고 싶을 때 내 뇌는 먼저 다리에 명령을 내리는데 ''아, 나의 왼쪽 다리가 없었지''라는 생각은 그 다음에 하게 되죠. 그래서 왼쪽 다리를 디디면서 넘어집니다. 그런 바디 이미지가 굳어지는 데는 최소 3년 이상 걸립니다. 안 좋은 모든 상황이 겹쳐지면서 그분은 굉장히 힘들었을 겁니다.

근데 6개월 후에 다시 진료를 받으러 나타났을 때 그분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났어요. 자기의 다리가 사라졌다는 것, 내가 가진 모든 걸 잃어버렸다는 것, 절망 속에서 떠났던 환자가 굉장히 밝은 모습으로 나타난 거예요. 당시 그분은 고관절 아래쪽에 다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저는 그 모습이 나 스스로 내 불운을 이겨냈다는 자기 선언이었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나타난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다는 걸 알고 있었겠지만 앞으로 그것을 이겨내겠다는 자기 선언, 삶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분 뒤로 후광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감명 받았다는 표현 정도로는 적당치 않을 정도로 놀랐습니다. 근데 더 놀랐던 건 사라졌던 약혼자가 그분과 함께 등장하셨고, 약혼자 손에는 청첩장이 들려있었던 거예요. 다음 달에 결혼하기로 했는데 의료진들을 결혼식에 초대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알고 보니 그 약혼자는 당시 예정되어있던 회사 출장 때문에 부득이하게 외국으로 가게 됐었다고 하더라고요.

- 농약 마신 40대 아들을 둔 할머니에게 차비를 쥐어주신 적도 있다고요?

모든 게 사랑의 문제로 귀착되는 것 같아요. 그 여자 분은 연인의 사랑, 본인의 삶에 대한 사랑의 힘으로 일어섰지만 반대로 처연한 사랑도 있고, 사랑마저 마비시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얼마 전 콜라에 농약을 탄 사건이 있었는데요. 거기 투입된 약이 그라목손이라는 제초제에요. 한 스푼만 먹어도 폐가 망가지면서 현대의학으로는 구할 수 없습니다. 농약 사고가 참 많은데요. 일반적으로는 ''죽을 때 저렇게 고통스럽게 왜 농약을 먹을까''라고 생각하지만 삶에서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가슴이 아프거나 충격을 받은 사람이 목숨을 버리겠다고 생각하면 수단은 생각하지는 않죠. 그리고 어려울수록 주변에 농약이 있기 마련이에요. 타워팰리스에 농약이 있진 않잖아요. 자살을 하더라도 그 방식이 참으로 처참하고 힘든 건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언젠가 40대 남성이 그라목손을 마시고 병원에 왔는데, 입이 시퍼렇게 되어 있었어요. 그때 제가 본과 4학년이었는데, 이분이 들어오는 걸 보고 모든 사람들이 구할 수 없다고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하지만 구할 수 있든 없든 의사로서는 의무가 있기 때문에 목에 호스를 꼽아서 1만CC의 식염수를 위에 넣어서 세척했어요. 근데 현재 우리나라 의료보험 제도는 생명을 구하려는 사람에게는 혜택이 있지만 생명을 버리려는 사람에게까지는 혜택을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살을 택한 사람에게는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근데 자살을 선택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이잖아요. 경제적 문제 때문에 자살을 택한 분들이 병원 치료를 받게 되면 병원비가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까지 올라가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병원에서 목숨을 구하더라도 그분은 다시 빚더미에 올라앉는 거예요. 병원비를 평생 갚아야 하는 악순환이 거듭되죠. 그래서 그 분 어머님께 그런 내용을 말씀드리니까 어머님께서 단호하게 집으로 가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근데 저희들은 딜레마가 생기죠. 현대의학으로 목숨을 구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앞으로 3~4일 후에 돌아가실 게 확실한 환자를 집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잖아요. 그때 할머니가 서슬 퍼런 눈으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죽는다며? 살릴 수 없다며? 그러면 돈 안 받을 거야?" 딱 그 세 마디를 하셨어요.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자식을 위해 다 쏟아 붓는 게 부모 마음이죠. 그렇지만 삶이 너무 지나치게 개인를 압박하거나 고단하게 할 때는 부모 자식이라는 최소한의 사랑마저도 마비시킬 수 있습니다.

- 정치인 김근태 씨와는 어떤 인연이 있으신가요?

제가 특별히 정치적 관심이 컸다기보다는 저와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어요. 그런 생각을 쭉 가지고 사회현상을 바라봤는데요. 참 송구스럽지만 의사라는 직업이 아직은 먹고 살 만합니다. 제가 아무리 시골에서 병원을 하고 있지만 의사라는 이유만으로 경제적으로는 그리 불편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여전히 현실이라든가 제가 만나는 환자분들의 삶과의 괴리가 생각보다 컸어요.

그러던 어느 날 김근태 의원이 양심선언 하는 걸 보게 됐어요. 당시 대선후보로 출마했다가 당내 경선에서 떨어진 다음에 "내가 규정된 돈보다 조금 더 썼다. 나의 정치 생명이 끝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을 고백하지 않고는 넘어가지 못하겠다."는 선언을 하는 걸 보고 그분이 부러웠어요. 그때까지 쌓아온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릴 수 있는데 왜 저런 일을 할까, 하는 의문도 생겼고요. 저는 해보지 못한 일을 하는 분이었죠. 그래서 그분께 메일을 썼어요. 만약 재판을 하게 되면 큰돈은 아니지만 재판 비용을 보태줄 용의가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그분이 보기엔 고마웠나봐요. 그래서 저에게 간접적으로 고마움을 표현했고, 그것이 현재 의사로서의 제 자신을 돌아보는 하나의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 ''나 때문에 살아난 사람이 100명은 되어야 내가 진짜 의사''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저의 스승님께서 하신 말씀인데요. 내가 아니었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해야겠죠. 기준에 따라서는 제가 수술해서 목숨을 구한 분들이 수천명일수도 있죠. 근데 그건 이 나라에서 교육 받은 의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에요. 내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이 환자는 생명을 구할 수 없었다는 환자가 100명은 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저로 인해 더 좋은 의사를 만나지 못해서 살지 못했던 환자의 수가 아직은 더 많은 것 같아요.

- 앞으로의 계획은?

거창한 꿈은 없어요. 그저 제 욕심을 줄일 수 있는 일이 가능하다면 욕심을 줄여보고 싶고요. 선천적으로 몸이 불편한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계획을 하고 있어요. 지금 우리나라의 재활병원은 의료보험 기준으로 일정기간이 되면 또다시 퇴원을 해야 하고, 자기 비용으로 감당을 하기가 어려운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공익재단에서 무료로 치료해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어요. 저 혼자의 힘으로 안 되면 제가 사회에서 사귄 많은 분들을 설득해서라도 그런 모델을 만들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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