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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판 해리포터 작가 김진경 ''그가 청와대를 떠난 이유는...''



책/학술

    한국판 해리포터 작가 김진경 ''그가 청와대를 떠난 이유는...''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고양이 학교'' 저자 김진경 前 청와대 교육문화 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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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육과 문학에는 관심 없었지만 서울대 국어교육과에 진학한 김진경. 그는 뒤늦게 글쓰기 재미에 빠져 시로 등단한다.

    5.18을 겪으면서 5월시 동인에 들어가고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해직까지 되버리는 상황에서 옥고를 치르고 난 그는 전교조 운동에 열성적으로 뛰어든다. 그 일이 인연이 되어 청와대 교육 문화 비서관까지 됐지만 어느날 홀연히 일을 그만둔다. 글을 쓰기 위해서였다.

    그리고는 자기집에 숨어든 도둑고양이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판타지 동화를 만드는데...

    한국판 해리포터라 불리는 ''고양이 학교''를 써서 프랑스 아동문학상을 수상한 김진경 전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의 이야기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김진경 전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


    - 프랑스에서 아동문학상을 수상하셨다고요?

    ''앵코뤼프티블상''이라고 하는데요. 1년 동안 나온 아동 청소년 문학 작품 중에서 도서관 관계자나 학부모 등 몇백 명이 여섯 편의 후보작을 뽑아요. 그 후보작을 약 3000여 학교의 학생들에게 읽히면서 저자들을 초청해서 독자들과 대화하는 시간을 계속 갖는 거에요. 그러고나서 1년 뒤에 아이들이 투표를 해서 여섯 편 중 한 편을 뽑는 거에요. 올해는 13만 6천여 명이 참여했다고 하더라고요. 연령대별로 나눠서 뽑는데, 제 작품은 3만 6천여 명이 투표한 중에 8천여 표를 얻었다고 하더라고요.

    - ''고양이 학교''는 언제, 어떤 계기로 집필하게 되셨나요?

    2000년부터 2002년 사이에 구상하고 집필했어요. ''고양이 학교''는 우리집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에요. 주인공이 버들이인데, 우리가 15년 정도 길렀던 고양이에요. 우리 작은애보다 고양이 나이가 더 많았죠. 고양이는 죽을 때 되면 아주 묘한데요. 주인도 손이 안 닿는 데 올라가서 밥도 안 먹고 가만히 있어요. 그러다가 정말 죽을 때가 되면 사라져버려요. 사람한테 죽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요. 야생성이 있는 고양이였거든요. 버들이가 그렇게 사라졌죠.

    우리 작은애는 태어나면서부터 있던 고양이가 없어진 거라 너무 슬퍼하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엔 간단하게만 쓰려고 했어요. 버들이가 죽은 게 아니라 나이가 들면 고양이는 고양이들만의 세계로 가서 재밌게 지내는 거라고. 그런 얘기를 간단하게 쓰려고 했는데, 잘 써지는 소설은 소설의 상황과 인물을 만들어내면 그 인물들이 살아서 움직이잖아요. 고양이 인물을 만들어 놓으니 자기들이 막 살아 내가 10년 동안 공부한 신화의 지식을 다 먹으면서 돌아다니는 거에요. 그래서 길어지게 됐어요.

    - ''한국판 해리포터''라고도 하던데요?

    그런 문학적 장르가 있더라고요. ''해리포터''는 성장의례의 틀을 갖고 온 거고요. ''고양이 학교''는 고양이가 죽은 건데, 죽어도 통과의례가 있거든요. 그런 골격을 갖고 있는 거에요. 하지만 동화니까 죽는다는 표현은 안 하고요.

    - 고양이 키우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뭔가요?

    고양이도 종류에 따라 달라요. 우리는 도둑 고양이를 키웠던 거라 별 신경을 안 썼죠. 근데 개를 가지고는 이런 환타지를 못 쓰겠더라고요. 개는 사람과 너무 가까워서 자기 세계가 없어 보여요. 근데 고양이는 사람 곁에 있으면서도 자기 세계가 있거든요. 그런 게 환타지를 구상하는 데 굉장히 맞는 구조에요.

    - 1953년에 충남 당진에서 태어나셨죠?

    네. 근데 아버지가 선생님이셔서 전학을 많이 다녔어요.

    - 충남 쪽이 말이 느리죠?

    그렇죠. ''빨리 와라''를 ''빨리 오너어어어~''라고 할 정도니까요.

    - 말이 느려서 생긴 에피소드 있나요?

    평소엔 잘 몰랐는데, 전교조 만들면서 지방에 강연하러 많이 다니잖아요. 특히 경상도 쪽에 가면 사람들이 거의 다 자고, 듣는 사람들도 나중엔 속 터져 죽을 거 같다고 하더라고요.(웃음)

    - 고등학교 3학년 때 대학 진학을 포기할 뻔 했다고요?

    고3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저희가 6남 1녀고, 그때 돈 버는 사람이 큰형 밖에 없어서 상당히 어려웠죠. 그래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어요.

    - 그러다가 어떻게 서울대 국어교육과에 입학하셨나요?

    그냥 벼락치기로 공부로 한 거죠. 그때는 본고사였기 때문에 전과목 시험을 봤어요. 근데 2학기가 다가오니까 대학은 가야겠다 싶더라고요. 근데 등록금 때문에 사립대는 도저히 갈 수가 없어서 국립대인 서울대를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때 제가 문과 280명 중에 240등 쯤 했어요. 그래서 여름방학 때부터 사회랑 과학을 벼락공부 했어요. 근데 당시엔 시험이 너무 어려워서 100점 만점에 커트라인이 30점대일 정도였거든요. 그래서 두 과목만 엄청 열심히 해서 점수를 잘 받으면 가능성이 있었어요.

    근데 전 대학을 포기한 뒤로 제2외국어를 안해버려서 독일어는 아예 포기했죠. 나중에 입학한 후에 진학지에 제 이름이 나왔는데, 서울대 입학자 중 독일어 최저 득점자로 나왔더라고요. 50점 만점에 7점 받았거든요. 사람들이 저에 대해 가장 크게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이 사람이 일찍이 교육과 문학에 뜻을 둬서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들어갔나보다''라고 하는데, 전혀 아니거든요. 국립대학을 가긴 가야겠는데 커트라인이 가장 낮은 데를 찾다보니 국어교육과가 된 거에요.(웃음)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건데, 교육과 문학에 일찌기 뜻을 두고 라는 식으로 말하면 당혹스러워요.

    - 대학에서 문학반 동아리셨죠? 그때 같이 활동했던 분은?

    평론하는 김재용 씨, 그리고 이문열 선배는 얘기만 들었죠. 돌아가신 김태희 선배에 대한 얘기도 자자했고요.

    - 대학교 3학년 때 시로 등단하셨잖아요?

    대학 다니기 전에 글을 열심히 쓴 적은 없어요. 하지만 아무래도 글을 쓸 것 같다는 느낌은 중학교 때부터 가졌어요. 중학교 1학년 때 우리집이 망했는데요. 60년대에 계 파동이 있었잖아요. 계주들이 막 도망가고. 그래서 우리집도 망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어요. 그때 굉장히 어려웠어요. 자기 속에 스스로 뭔가 만들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니까.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 언젠가는 내가 글을 쓰지 않을까 라는 느낌을 가졌어요.

    - 어떻게 등단하셨나요?

    사대문학회 활동하다가 시를 잘 쓴다고 하길래 시 몇 편을 잡지사에 보냈어요.

    - 그때 만난 문인이 이문구 선생이시라고요?

    네. 그때 한국문학 편집장이었죠. 고은 선생도 들락날락하셨고요.

    - 그러고나서 1976년에 교단에 서셨죠?

    한성 고등학교에서 교사를 하다가 군대를 갔죠.

    - 그후 80년대에 ''5월시'' 동인으로 활동하셨죠?

    네. 곽재구, 나해철, 이영진, 나종영 씨 등과 함께 했었죠. ''5월시''의 5월은 광주 5월을 말하거든요. 80년대 초에는 5월이나 광주라는 말 자체를 못 하던 때였어요. 그래서 시로라도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 싶어서 5월시 동인을 만들었는데요. 첫호는 인쇄소에서 제대로 꺼내오지도 못했어요. 밤에 이영진 씨가 가서 몰래 100부를 들고 들고나와 버렸죠.

    - 85년에 민중교육지 사건으로 처음 옥고를 치루게 되셨는데요?

    5월시 동인에 교사들이 많았어요. 절반 가까이 교사였는데, 우리가 광주 5월을 얘기하면서도 막상 우리가 서는 교단의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는 한번도 글을 쓴 적이 없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 교육에 대해 전면적으로 비판적인 적이 한번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우리가 해보자고 의기투합해서 민중교육지를 만들었는데, 그게 사건화 된 거죠.

    - 어떤 내용이 문제였나요?

    지금 읽으면 이게 왜 문제인지 이해가 안될 거에요. 지금은 당연히 학교 교육의 문제라고 얘기하는 것들이죠. 그리고 그땐 사전검열을 했거든요. 납품필증을 받아야 서점에 보내곤 했어요. 우리는 납품필증을 다 받아서 몇개월 동안 팔았던 건데 갑자기 문제를 삼은 거죠. 정치적으로 이용한 거죠. 정부에서 학원안정법을 추진하면서 일종의 정치적 분위기 조성을 한 거에요. 그래서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고 바로 해직됐어요. 85년에 해직돼서 2000년에 복직했으니까 15년 동안 해직 상태였어요.

    - 그 15년 동안 생계는 어떻게 하셨어요?

    집사람도 교사인데 5년 동안은 같이 해직 상태였어요. 같이 해직 상태니까 좋더라고요.(웃음)

    - 전교조의 초대 분위기는 어땠나요?

    전교조가 결성되던 시기의 교사 운동은 정말 순수했죠. 교사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아이들에게 어떻게 좋은 교육을 해야 하는가를 가지고 싸우는 운동이었으니까요. 그로 인해 1500여명이 해직되곤 했어요. 아름다운 운동이었죠.

    - 당시 제일 기억에 남는 일은?

    선생님들 하나하나는 다들 순하고 약한 사람들이잖아요. 근데 명동성당에서 단식농성을 한 적이 있어요. 700명 정도가 와서 텐트치고 단식농성을 하더라고요. 당시 제가 정책실장이었기 때문에 겉으론 열심히 싸워야 한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저 사람들이 미쳤나 싶었죠.(웃음)

    - 교육계 현실에 대해 서운한 점은 없나요?

    어떤 운동이나 조직이든 구체적인 시대 상황 속에서 역할을 하는 거니까. 저도 그 시대의 역할을 한 거죠.

    - 15년 만에 국어교사로 복직했을 때 기분이 어떠셨나요?

    난감했죠. 15년 만에 돌아간 거니까. 그게 ''고양이 학교''를 쓴 것과도 연결되는데요. 아이들이 질적인 변화를 한 시기가 있어요. 90년대 초에 사이버 세대, 소비문화 세대가 등장한 거죠. 94년에 전교조 해직 교사 1500여 명이 복직했는데, 아이들이 너무 많이 바뀌어서 의사소통이 안되는 거에요. 그때 복직교사들 중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은 분들도 많았어요.

    - 무엇이 그렇게 다르던가요?

    제가 신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아이들의 변화 때문이었어요. 도대체 이 변화가 뭘까 들여다보다가 신화 공부를 하게 된 거죠. 당시에 그것 때문에 교육학, 인류학, 사회학 등 여러 분야의 책을 많이 봤어요. 근데 그런 문제에 대해 쓴 글은 단 한 편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내 나름대로 생각하기 시작했는데요. 염색이 그때 시작됐어요.

    아이들이 염색하고 피어싱을 하는 극단적인 형태가 문신인데, 그때 이미 미국에서는 문신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일반적인 문화였어요. 그래서 문신이라면 고대부터 역사가 있을 것이다, 그걸 들여다보면 이 변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거다 싶었죠. 그래서 문신에 대한 인류학적 책을 찾아봤는데 없더라고요.

    그래서 고대 한자를 들여다보니까 문신의 역사가 추적되더라고요. 고대국가가 세워지기 전까지는 문신이 굉장히 신성한 종교적 행위였어요. 그 후 고대국가가 형성되고부터 우리 세대까지 문신은 범죄자나 노예의 표식이었죠. 그러다가 3000년만에 아이들에게서 문신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 거에요. 그런 문화적 변화를 추적해갔죠. 문신을 신성하고 긍정적으로 볼 때는 사람들의 의식 구조에서 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때입니다. 우리는 문신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이거든요. 그런 게 어떻게 보면 문명사적인 변화더라고요.

    아이들의 신화적 사유, 판타지적인 것들이 앞으로 아이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코드가 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아이들의 코드를 통해 얘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 싶어서 신화 공부를 10년 가까이 했죠. 그러고나서 2000년에 복직해보니까 정말 아이들이 엄청나게 변화했더라고요. 그때 ''고양이 학교''를 구상하고 집필했죠.

    - 청와대 교육문화비서관은 어떤 일을 하나요?

    교육부와 문화관광부 정책 업무에 대해 조정 기능을 해요. 주요정책의 방향이 비틀어져 있으면 조정 작업을 하는 거죠.

    - 어떻게 청와대에 가게 된 건가요?

    전교조 시작하면서 정책실장이었잖아요. 그때 나름대로 교육문제를 바라보고 정책적 대안을 마련한 것에 대해서 일정하게 평가를 받은 거죠.

    - 비서관을 그만두게 된 얘기 좀 해주세요.

    거기서 1년 정도 일하면서 사학법과 교원평가 문제, 대입 문제는 어느 정도 수습한 상태였는데요. 제가 살아오면서 군대에 있을 때도 글을 썼는데, 청와대 들어가니까 글을 못 쓰겠더라고요. 격무고 신경이 많이 쓰여요. 그래서 여기서 계속 있으면 안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리고 현안으로 있던 큰 문제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됐고, 제가 관료 생활이나 정치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이 정도에서 나와야지 생각했죠.

    - 앞으로의 계획은?

    ''고양이 학교''를 3부작으로 구상한 거라서 이제 3부를 써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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