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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레저

    자연과 시간이 합작하다 '소금 산 파묵칼레'

    파묵칼레의 전경. (사진=김진오 기자)

     

    드넓게 펼쳐진 평원을 감싸고 있는 산허리에 하얀 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2km 전방에서 보면 순백색의 새하얀 목화솜을 쌓아올린 성(城) 같기도 하고 소금 산과 비슷한 비경, 목화의 성-파묵칼레.

    조물주는 어찌하여 소아시아 땅에 자연과 시간의 합작품이자 걸작품을 줬는가. 부러움을 느끼며 파묵칼레 정상에 서자 입이 떡 벌어진다.

    버스를 타고 좁은 길을 돌아 파묵칼레 정상에 올라 올 땐 하얀 소금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였으나, 막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소금 산에 쪽빛 호수가 군데군데 있는 듯했다. 신의 선물이라고 밖엔 달리 설명할 근거를 찾지 못했다.

    파묵칼레. (사진=김진오 기자)

     

    파묵칼레를 즐길 시간은 딱 한 시간.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붙잡고 실랑이를 벌이기에는 촌각이 너무 아까워 재빨리 양말과 신발을 벗고 파묵칼레 속으로 들어간다.

    콸콸 솟아 흐르는 물을 만져보니 뜨겁지도 않은, 발과 몸을 담그기에 꼭 알맞은 온도, 35도쯤이라고 한다. 먼저 온천수에 의해 석회암 수로가 만들어진 곳에 발을 담그고 사방을 주시한다.

    아래로 보고, 좌로 보고, 우로 보고, 눈에 넣고 또 담고, 가슴에 새기고, 품속에 간직하려 해도 멀어져만 가는 듯한 파묵칼레.

    파묵칼레. (사진=김진오 기자)

     

    자연이 만들어낸 경이로움 그 자체인 파묵칼레는 석회 성분을 포함한 온천수가 지하에서 솟아 공기와 만나면서 석회암으로 변한 것이다.

    물이 산 경사면을 따라 흐르면서 물웅덩이와 종유석, 석회동굴을 만들어 버렸다. 온천수에 다량 함유된 석회성분(산화칼슘)이 오랜 세월 침전되면서 순백의 비경이 탄생한 것이다.

    파묵칼레가 형성되는 데는 무려 1만4천년이라는 영겁의 세월이 흘렀으며 1년 동안 1mm씩 증가한다. 계단식으로 형성된 새하얀 석회석 밑에는 작은 쪽빛 호수(미니 노천, 테라스 풀이라고도 한다)들이 군데군데 펼쳐져있어 당장이라도 풍~덩 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파묵칼레. (사진=김진오 기자)

     

    작은 웅덩이, 호수, 미니 노천의 물색이 어찌나 곱던지 쪽빛, 하늘빛, 터키색이라고 부르는 등 사람마다 색감을 다르게 얘기한다고 한다.

    테라스 풀에서 온천욕을 즐기는 게 파묵칼레 관광의 백미였으나 지난 1988년 유네스코가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한 이후 석회층 보존을 위해 입욕을 금지시키고 맨발로만 걷게 했다. 지금은 수영복을 입은 관광객들이 줄지어 파묵칼레를 오르는 장면을 더 이상 볼 수 없다. 대신 세수와 족욕만 가능하다.

    파묵칼레는 맑은 날엔 파란 하늘빛을 담아내는가 하면, 흐린 날엔 회색빛을 띠기도 하고, 석양과 어울리면 연분홍에 금빛으로 물든다고 한다. 아침, 점심, 해질녘에 따라 색깔이 달라진다고 해 종일 파묵칼레에 머문다는 관광객이 가끔 있다고 한다.

    파묵칼레의 석양. (사진=김진오 기자)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있는데도 여행객들은 발길을 떼놓지 못한 채 대자연이 빚은 신비한 자연과 일심동체가 되는 듯 탄성을 지르기도 하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소리를 지른다.

    국적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말을 걸며 즐거워한다. 지금 이 순간엔 국적이, 언어가 무슨 문제냐며 서로가 서로를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천진스런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한국, 중국, 일본과 미국, 네덜란드, 독일, 스웨덴인 등 국적도 다양하다.

    (사진=김진오 기자)

     

    기원전(BC) 1천년 전부터 파묵칼레를 찾은 그리스와 이집트인들이 있었다고 하니, 파묵칼레의 온천수가 그만큼 효험이 있다고 한다.

    35도 정도의 파묵칼레 온천수는 심장병과 소화기 장애, 신경통, 피부질환에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로마 황제들은 물론이고 이집트 여왕인 클레오파트라가 가끔 찾아 목욕을 즐기고 사랑을 나눴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진다. 파트너는 안토니우스였단다.

    파묵칼레를 즐기기에도 빠듯한 시간에 로마사 한 대목이 뇌리를 스친다.

    안토니우스는 경쟁자이던 옥타비아누스 어머니와 사랑을 나누던 사이였으나 시저가 타살되기 전 작성한 유서를 통해 후계자로 생질녀의 아들인 옥타비아누스(후에 아우구스투스)를 세우자 그리스와 소아시아(지금의 터키), 이집트 지방의 집정관(2차 삼두정치에 의해)으로 간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 어머니와의 염문도 종지부를 찍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그 이후 알렉산드리아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지게 되고 이때부터 정사를 팽개치고 이집트 복장을 하며 사랑놀이를 즐기느라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른다. 둘의 세기의 사랑이 과했을까.

    옥타비아누스군에 의해 안토니우스. 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은 대패하고 자결을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스스로 독사에 물려 생을 마감한다. 그의 이름과 사랑을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도록 남기고...

    클레오파트라는 시저와의 사이에 아들 한 명을,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둔 것으로 전해진다.

    해가 뉘엿뉘엿하고 있는 파묵칼레. (사진=김진오 기자)

     

    쓸 데 없는 상념을 하며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파묵칼레에 마냥 취해있는 지 얼마나 지났을까. 그만 돌아 갈 시간이란다. 기억 속에, 사진 속에 새겨두고 헤어질 수밖에 없다.

    객은 가고, 내일 또 다른 객이 찾아오겠지. 파묵칼레의 땅거미와 이별의 아쉬움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폐허로만 남아 있는 고대 도시, 히에라폴리스의 슬픈 역사도 떠나기 싫은 여행객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파묵칼레를 끼고 히에라폴리스라는 도시국가가 형성돼 있기에 파묵칼레는 역사적 유적지로서도 손색이 없는 곳이다.

    기원전 190년에 페르가몬 왕국의 유메네스 2세가 세운 '성스러운 도시' 히에라폴리스는 로마를 거쳐 동로마제국(비잔틴 제국) 시대까지 번성했으나 셀주크 투르크에 의해 정복당하고 1350년대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고 말았다.

    19세기에 발굴돼 그 모습을 드러낸 히에라폴리스는 인구 15만을 자랑하는 내륙도시였다고 한다. 공중 목욕탕과 원형극장, 수로, 성벽 등 도시민들의 삶의 흔적이 곳곳에서 역력하다.

    히에라폴리스 폐허 전경. (사진=김진오 기자)

     

    히에라폴리스 뒷산에는 사도 빌립의 순교기념관이 있으며 여기서 보는 파묵칼레의 전망은 대단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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