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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학생이 멘토 가질 그날까지 완주"



"모든 학생이 멘토 가질 그날까지 완주"

[인터뷰] 공신닷컴 강성태 대표

 

훤칠한 키에 하얀 얼굴,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 경기도의 한 초등학교에서 초등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막 끝내고 인터뷰 장소에 들어서는 그의 첫 인상은 '훈훈한 교회오빠'의 모습이었다.

30만 회원을 거느린 공신닷컴(www.gonsin.com)의 대표 공신 멘토이자 인도네시아에 공신(마하멘토)을 뿌리내린 강단있는 경영자인만큼 강한 모습을 예상했지만 강 대표는 시종일관 부드럽고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아 함께 있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경북 점촌에서 태어난 강 대표는 어린 시절 유약했다. 내성적인 성격에 몸이 약했던 탓일까, 어린 강성태는 늘 또래 친구들의 표적이었다. 그런 그가 친구들의 괴롭힘을 이겨내고자 선택했던 유일한 돌파구는 바로 공부였다. 전교 380명 중 307등에서 수능성적 400점 만점에 396점을 받아 전국 상위 0.01%의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대 기계항공항부에 입학했다. 이어 자신의 학습노하우가 담긴 무료학습사이트 '공신닷컴'을 열어 30만 명의 회원 수를 거느린 사회적 기업의 어엿한 CEO가 됐다.

돈이 없어 공부 못하는 수험생들의 '신'에서 꿈이 없어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꿈 길잡이'가 되고 싶다는 그의 사연많은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 방황하던 서울대 학생, 교육봉사로 꿈 찾다

학창시절, 점촌에서 서울로 전학을 온 강 대표는 몸이 약했던 탓에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됐다. 쉬는 시간마다 화장실에 불려가 이유없이 맞는가 하면 같은 반 친구가 뱉은 가래침을 얼굴에 맞고도 손으로 가래를 훔치는 비참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 문득 '공부'만이 이 비참한 생활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라 생각했고 그때부터 이를 악물고 공부에 매진했다.

그렇게 여러 번 시행착오를 거쳐 우수한 수능 성적으로 모두가 선망하는 명문대학교에 입학하게 됐다. 그러나 상상했던 것과 너무 다른 대학생활 탓에 강 대표는 수 차례 학사경고를 받아 제적 위기에 처할만큼 방황하게 된다.

강 대표는 "건강까지 바쳐가며 수험생활을 했지만 막상 대학에 오게 되니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달라 방황하기 시작했다. 꿈도 없었고 인생의 방향조차 설정하지 못해 더 힘들었다"고 당시 상황을 말했다.

그러던 강 대표는 돌연 해병대에 자원입대한다. '더 이상 방황할 수 없다'는 생각에 결행한 것이었다. 그는 입대 사실을 가족들에게조차 알리지 않았다. 날마다 화장실에서 몰래 눈물을 훔칠만큼 힘든 군 생활이었지만 편하게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깨닫게 된 계기가 됐다. 왜 굳이 해병대이었냐는 물음에 그는 "내 한계를 시험해보고 싶었다"고 답했다.

전역 후 강 대표는 교육봉사동아리에 들어가 저소득층 아이들의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하며 또 한 번의 변화를 겪는다. 그에게 '꿈'이 생기면서다.

강 대표는 "옆에서 응원해주고 꿈을 갖게 해주는 멘토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잘 성장 할 수 있다"며 공신멘토링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된 계기를 말했다. 그는 "오히려 내 스스로 멘토링을 하면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즐거웠고, 또 내 멘티들이 긍정적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을 보며 참 행복했던 것같다. 그 때부터 공신만의 길을 걸어가야겠다 생각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 공부의 신, 바보CEO 되다

소외된 아이들에 형처럼 오빠처럼 공부의 비법을 알려주던 공부의 신은 새롭게 사회적기업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동생만큼은 자신이 경험했던 시행착오들을 겪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만들었던 공부비법들이 담긴 노트들을 인터넷에 잘 정리해서 올리면 '누구나 도움을 받을 수 있겠구나'는 생각에서 동생 성영 씨와 함께 네 평 남짓의 조그마한 기숙사에서 밤낮없이 '공신' 사이트 개설에 매진했다.

그렇게 탄생한 사이트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일간지에 대서특필됐고 파일럿 프로그램에서 정규 프로그램으로 고정 편성되는가 하면 최근에는 드라마로 제작돼 큰 인기를 끌만큼 대중들의 뜨거운 관심을 얻었다. 강 대표는 "운이 좋았다"고 몸을 낮췄다.

2006년 공부방법을 알려주는 동영상 서비스로 시작한 공신은 그렇게 수험생들의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더니 각종 언론매체에 소개되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청소년 기관과 일선 학교에서 방과 후 프로그램으로 '공신 멘토링'을 운영하던 '공신'은 2008년 '공신닷컴'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사회적 기업으로서 새출발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코이카에서 군복무하게 된 동생 성영 씨의 뜻에 따라 인도네시아에 공신(마하멘토)을 전파, 현지에 마하멘토로 뿌리내리게 됐다. 이후 강 대표 형제는 비록 언어는 다르지만 먼 이국 땅에서 한 마음으로 뜻을 함께하는 이들과 손잡고 아이들의 가슴에 불꽃의 씨앗을 심어주기 시작한다.

한국에서 공신닷컴이 했던 것처럼 열악한 환경에 방치된 벌거벗은 아이들에게 멘토를 만들어주고 꿈을 만들어 준 것이다. 그렇게 공신닷컴은 국내외에서 승승장구하며 많은 아이들의 가슴에 '희망'이라는 두 글자를 깊이 아로새겼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던가. 강 대표에게 다시 시련이 찾아온다. 공신의 꿈을 함부로 도용하는 대기업 사교육업체의 얌체행각 때문이었다. 결국 강 대표는 자신의 꿈과 열정을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만 악용하는 사교육업체와 상표권을 두고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법적다툼을 벌여야했다.

끝이 안 보이는 법정 공방전, 여덟 번의 이사, 사무실에서의 쪽잠, 김밥 끼니…. 송사(訟事) 기간은 악전고투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매일매일이 설레임이었다. 대한민국 젊은이들에게 가슴 설레는 꿈을 꾸고 그 길을 찾아나갈 수 있도록 멘토를 한 명씩 만들어주는 가슴 뛰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때문이었단다. 비록 불가능해보이고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을 고군분투하며 달려가고 있지만 끝까지 즐겁게 완주해나갈 생각이란다.

■"난 행복한 사람"

"요즘 참 행복해요. 어려웠던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이 너무 좋아요. 같은 뜻을 가진 공신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 자체 만으로도 기쁘고 행복해요. 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 걸어갈 길을 먼저 걸어본 사람에 불과해요. 대한민국 모든 학생 모두에게 멘토를 한 명씩 만들어주는 그날까지 제 도전은 계속될 거예요. 여러분의 꿈에, 그리고 제 꿈에 진심으로 응원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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