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 강서, 구로, 금천 등 서남권이 ‘낙후지역’의 불명예를 벗지 못하고 있다. 지난 70~80년대 강남 개발에 치이고 2000년대 이후 강북의 ‘뉴타운’에까지 밀리는 등 서남권은 계속 소외됐다. 밀집돼 있는 공장단지와 열악한 주거 환경은 21세기 서울의 경쟁력과는 거리가 멀다. 뒤늦게 서남권에 대한 투자와 개발 약속이 잇따르고 있지만 각종 규제와 경기 침체 여파로 미래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 CBS노컷뉴스는 낙후된 서울 서남권을 4차례에 걸쳐 조명한다 [편집자 주]
[싣는 순서]
① 지금도 ‘공중변소’ 쓰는 21세기 서울시민②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더 가난해지는 동네
③ “최악의 출근길, 언제나 풀리려나“
④ “공원, 병원, 어린이집...제대로 된 게 없다”
서울 양평동 영단주택단지. 1940년대 지어진 낙후 주택으로 주민들은 지금도 공동화장실을 사용하고 있다. (임미현 기자)
지난 6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양평1동 아파트형 공장인 동아프라임밸리 앞.
대한민국 서울의 한복판이지만 참 낯선 풍경이 펼쳐져있다. 시계가 마치 1950년대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만 같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 아래 작고 허름한 집들. 반쪽은 주택, 나머지 반쪽은 공장으로 쓰이는 ‘주공혼재’의 독특한 단층 건물들이 줄이어 있다.
1m 남짓한 좁은 골목에는 LP가스통이 여기저기 놓여있고 습기를 잔뜩 먹은 시멘트 벽은 곧 터져나갈 듯 부풀어있다.
골목 안으로 좀더 들어가니 곧 무너져 내릴 듯한 지붕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살까 싶을 정도로 음산한 분위기다.
인근 고층 아파트와는 전혀 다른 ‘섬’같은 이곳은 이른바 ‘영단주택’ 단지로 불린다. 영단주택은 1940년대 초 지금의 LH에 해당하는 ‘조선주택영단’이 지은 노동자 주택이다.
대규모 단지형 주택의 최초 모델로 대부분 초가집이었던 당시로서는 ‘최신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다른 곳은 다 변했지만 이곳은 ‘준공업지역’이라는 규제에 묶인 채 변화 무풍지대로 남았다. 그래서 결국 낙후지역의 상징이 됐다.
여기에서 세탁소를 하고 있는 주모(69. 여)씨는 “너무 낡아서 사람이 살 수 없으니까 집 주인들은 거의 세를 내놓고 떠났다”면서 “골목 골목에 빈집이 수두룩하고 그나마 지금 남아있는 사람은 외국인 노동자와 노인들”이라고 말했다.
공장은 공장대로, 주거지는 주거지대로 망가지고 있는 영단주택단지 전경 (임미현 기자)
그러면서 주씨는 단 하루도 편하게 잠을 잘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여기는 흙담 위에 시멘트를 바른 집들인데 쥐들이 드나들어 무너질까봐 겁난다. 작년에는 저쪽 집 천장이 비 때문에 내려 앉았다. 또 집이 길 보다 낮아서 비가 오면 하수가 넘어오는데 장마가 진다고 하니 정말 겁난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화장실.
주씨는 “왜정(일제식민지) 때 모습 그대로여서 집집마다 화장실은 없고 아직도 ‘공동변소’를 쓴다”며 “요즘 같은 세상에 서울 한복판에서 공중변소 쓰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빈집 쌨으니(많이 있으니) 높으신 분들이 와서 하루 밤 자봐야 실정을 알 것”이라고도 했다.
이곳 영단주택단지는 지은 지 70년이 넘어 이젠 고쳐서 쓸 수준을 넘어섰다. 그래서 15년 전부터 주민들은 개발을 추진했다. 하지만 워낙 소규모 필지가 많아 이해 관계가 엇갈리는데다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준공업지역’ 규제가 발목을 잡았다.
여기에다 최근 ‘보존’의 목소리까지 높아지면서 개발은 아예 첫걸음도 떼지 못했다.
준공업지역은 제조업 중심의 1차 산업기반을 보호하기 위해 지정됐는데 건축 등 각종 규제를 받는다. 특히 정비 사업을 하더라도 반드시 일정 수준의 공장 면적을 그 안에서 확보해야만 한다.
기자가 찾아간 곳 이외에 또 다른 영단주택 단지 4곳을 포함해 영등포구의 준공업지역은 9.38k㎡나 된다. 서울시 준공업지역의 1/3이 영등포에 밀집돼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산업 구조가 바뀌면서 이곳 공장들이 ‘장부’상으로만 공장일 뿐 사실은 거의 비어있다는 점이다.
서울 문래동 대규모 영단주택단지 (임미현 기자)
한때는 기계와 부품, 가공업체들이 한데 모여 대한민국의 산업을 이끌어가던 심장부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기자 눈에도 인기척 조차 없는 빈 공장들이 쉽게 들어왔다. 대부분의 공장들이 여건이 좀 더 나은 곳으로 옮겨갔고 지금 남아있는 곳도 언제든지 떠나려고 한다.
양평동에서 밀링가공업을 하고 있는 이모(58)씨는 “여기서는 공장은 공장대로 생산성이 떨어지고 집은 집대로 사람 살기에는 엉망”이라며 “가능하다면 김포나 인천쪽으로 공장을 옮기려고 한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어렵사리 개발 사업을 시작하더라도 사업은 곧바로 난관에 봉착한다.
실제적으로 공장의 역할을 전혀 못하지만 등기부상으로 ‘공장’인 만큼 정비 사업을 추진하면서 그만큼 공장 면적을 확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