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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그리고 강남스타일…냉전이 낳은 강남 개발의 역사



여행/레저

    북한 그리고 강남스타일…냉전이 낳은 강남 개발의 역사

    [서울의 재발견] 서울에 남아 있는 6.25 전쟁과 냉전의 흔적 ①

     

    ‘강남공화국’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는 대한민국. 그러나 1963년 서울에 편입될 때까지 강남은 그저 고요한 농촌 마을이었다. 아니, 1970년대 중반까지도 강남은 허허벌판이었고, 역삼동과 대치동, 말죽거리 모두 개구리가 울던 논밭이었다.

    그러던 땅이 불과 30년 만에 대한민국을 ‘강남공화국’으로 만들었고, 지금까지도 강남불패의 신화는 깨지지 않고 있으며, 강남을 동경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비틀어 노래한 ‘강남스타일’은 세계를 장악했다.

    도대체 그 짧은 시간, 강남에 왜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 강남개발의 전주곡 ‘제3한강교’, 전쟁 발발시 도강용으로 착공되다

    강남이 서울시로 편입된 것은 1963년 1월 1일. 그러나 ‘무작정 상경 시대’에 서울로 몰려든 인구는 사대문안의 도심을 중심으로 강북 지역에 집중돼 있었다. 인구 과밀 해소라는 과제가 뒤따랐다. 하지만 강남 개발은 서울시민 인구난과 주택난 해소의 대안이 아니었다.

    강남 개발을 본격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북한과의 대립과 그로 인한 안보 불안이었다.

    먼저, 강남 개발의 전주곡이 된 제3한강교(한남대교)의 건설.

    허허벌판인 강남으로 이 다리가 놓이게 된 것은 애초 강남 개발을 위한 거시 계획의 일환이 아니었다. ‘서울시민 유사시 도강용’이 그 목적이었다. 서울시민들은 6.25 때 이승만 대통령이 그나마 있던 제1한강교를 자신의 도강 직후 폭파시켜버려 많은 시민들이 서울에 꼼짝없이 갇혀버렸던 경험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제2한강교(양화대교)가 가설되기는 했지만, 이 다리는 전쟁이 났을 때 군 작전용으로만 쓰이게 돼 있었다.

    ‘6.25 때의 150만 인구가 1965년에는 350만으로 늘어났는데, 다시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한강을 건너 피난하는가, 그때는 다 죽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은 당시 서울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것이었다.

    그런 요구 속에 한남대교 가설공사가 착공된 것이 1966년 1월 19일이었다. 북한 평양 대동강에 너비 25m 교량이 건설됐으니 우리는 최소한 그것보다 1m라도 더 넓은 교량을 세워야 한다는 방침에 따라 당시로선 과하다고 느껴질 만큼 넓은 6차선 27m 너비로 설계됐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이 다리가 경부고속도로의 기점이 되고 ‘말죽거리 신화’로 불리는 광적인 투기 열풍의 요인이 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한 이는 없었다.

    ◈ 북한 특수공작원의 청와대 습격, 본격적인 강남 개발로 이어지다

    강남 개발이 본격적으로 계획되고 추진되도록 만든 사태가 1968년 1월 21일 벌어진다. 김신조를 포함한 31명의 북한 특수공작원이 청와대 바로 뒤편까지 습격해와 총격전이 벌어지고 이 과정에서 종로경찰서장이 사망한 이른바 1.21 사태다.

    1.21 사태 후 박정희 정권은 서울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6.25 전쟁 때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던 것은 한국군으로서는 지워버리고 싶은 악몽이었고, 게다가 개성을 전쟁 중 뺏겨서 남북경계선이 한국전쟁 때보다 더 가까워진 상황이었다. 급격히 증가하는 인구와 도시 시설들이 강북에 몰려있었고, 이대로 전쟁이 터지면 수도 서울은 인명 피해와 국가 핵심 시설의 파괴를 순식간에 겪을지 모를 일이었다.

    미군이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배치돼 있었지만, 1.21 사태는 ‘미국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신뢰는 이미 무너진 상황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자주국방의 기치를 내세우면서 온 나라를 병영국가체제로 몰아간 것이 이 때였다. 행정수도 이전 발상과 강남 개발을 통한 서울 인구의 강남 분산 정책이 본격화된 것도 이와 함께였다.

    1.21 사태는 서울도시개발의 역사에서 미국 9.11과 같은 전환기였다.

     

    ◈ 인도차이나 3국의 공산화, 서울 상류층의 강남 이전을 촉진시키다

    한반도 냉전 위기감이 크게 조성된 것은 베트남전과 한국군 파병이 계기로 작용했다.

    남한이 베트남에 군을 파병하자 북한도 따라서 파병을 하려했는데, 중국의 개입을 꺼려했던 베트남이 북한의 인민군 파병도 거절했다.

    호치민이 북한 인민군 파병을 받아들이지 않자, 김일성이 선택한 방법이 한반도의 긴장 조성이었다.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면 베트남에 한국군을 더 보내지 못하게 될 것이고, 더 위급해지면 파병한 한국군을 다시 빼올 수도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실제로 1967년부터 68년까지 휴전선 일대에서 남북간 군사충돌이 굉장히 잦아졌고, 최절정이 바로 1.21 사태였다. 그리고 1월 23일에는 미국의 최신예 첩보함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끌려가는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안보 불안감이 온 나라를 휩쓸었고, 강남 개발은 그렇게 본격화됐다. 그리고 1975년 4월과 5월에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3국이 차례로 공산화되면서, 위기감을 느낀 서울 상류층의 강남 이주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아직도 강북에 사십니까”라는 인사말도 급속히 퍼져간 것도 이때였다.

    ◈ 안보 위기감 속 강남 개발 속도전, 투기 광풍을 불러오다

    강남 개발은 이런 안보 위기감 속에 충분한 기반과 토대 없이 속도전으로 진행됐다. 강남을 개발할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속도전을 내야 하니, 이때 정부가 사용한 방식이 ‘개발 이익을 활용한 땅 장사’였다. 정부가 땅주인에게 땅 일부를 받아서 개발한 뒤, 주변 땅 가격 폭등을 야기시켜 땅 주인에게 이득을 챙겨주고, 정부도 개발하고 남은 땅 그러나 가격이 덩달아 폭등한 그 땅을 팔아서 개발 비용으로 충당하는 것이었다.

    땅 장사로 활용된 이 땅을 ‘체비지’라고 하는데, 70년대에는 서울시 간부들이 체비지를 잘 팔면 유능하다고 인정받았다. 한마디로 공무원들이 땅장사를 하러 다닌 것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도, 강남 개발도 이런 식으로 진행했다.

    손 안대고 코 풀기의 전형으로서 강남개발의 다른 이름인 ‘영동(당시 강 이남에 있던 대표적 개발 지역이 영등포였기에 ‘영등포 동쪽’의 강 이남을 또 개발한다는 의미로 지금의 강남에 ‘영동’이라는 단어를 썼음) 구획정리사업’은 이렇게 매각대금을 재원으로 하는 특별회계사업이었다.

    이런 방식은 정부로 하여금 공공투자를 하지 않고도 도시기반시설을 만들 수 있게 해주지만, 체비지가 팔리지 않는다면 사업 자체가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되는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체비지를 팔아 개발비용을 마련해야 했던 정부로선 땅값 상승을 원할 수밖에 없었고, 서울시가 이렇게 발 벗고 땅 장사를 하는 상황에서 부동산 투기는 규제의 대상이 아니라 사실상 조장의 대상이었다. 역사학자 한홍구 교수가 지적하듯, 대한민국 투기의 출발, 그리고 그 후 투기가 정부에 의해 잡히지 않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역시 속도전으로 진행됐다. 원래 개통일은 1971년 6월 30일이었지만, 1971년 4월 대선 일정에 맞추기 위해 경부고속도로는 1년을 앞당겨 개통됐다. 무리한 조기 완공 과정에서 77명이 목숨을 잃었고, 개통 직후 바로 시작된 도로 보수공사 비용은 도로 건설 비용을 넘어섰다.

    이러한 강남 개발과 맞물리는 것이 말죽거리 신화다. 양재역 부근의 말죽거리는 평당 30원쯤 하던 땅값이 1년 만에 3000원이 됐고 지금은 수천만원에 이른다. 복부인들이 가장 먼저 몰린 곳이 말죽거리였고. 그때 한건 했던 사람들이 지금 대한민국 상류층의 다수를 이룬다. 이런 말죽거리 투기 광풍이 당시 한건 한 사람한테는 말죽거리 신화가 되고, 못한 사람들한테는 말죽거리 잔혹사가 되는 것이다.

    (한홍구의 한국 현대사 이야기 <특강>. 한겨레출판. 2009. 참조).

     

    ◈ 서울시민의 강남 이주 유도 작전, 지하철 2호선 긴급 변경과 명문학교 전격 유치

    이제 강남을 키우기 위해 여러 정책수단들이 동원되기 시작한다. 지하철 2호선은 원래 순환선이 아닌 왕십리~당산동 연결 노선이었다. 방사선 노선이 지하철 노선 원칙이었던 중앙정부의 입장까지 뒤집으며 5.16 쿠데타의 이른바 ‘혁명주체세력’ 구자춘 당시 서울시장이 밀어붙여 결국 순환선으로 변경 발표되고 결국 지하철 2호선이 강남을 그대로 관통하게 된다.

    1970년 강남은 인구가 많지 않아 지하철이 그렇게 긴 노선으로 들어갈 조건이 아니었지만, 강남 이주 유도를 위해 강행했고, 실제 지하철 2호선은 강북 인구의 강남 분산에 큰 효과를 발휘한다.

    강북 도심에 난립해있던 고속버스 정류장들을 하나로 모아서 1976년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을 만든 것도 강남 이주 유도 정책 중 하나였다.

    당시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은 대부분 강북에 사는 서울시민들에게 접근성이 나빠 엄청난 불편을 안겨줬고, 이는 자주 신문의 비난 대상이 됐다. 그러자 정부는 서울 도심에서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한번에 차로 직진 주행할 수 있는 길을 여는데, 그래서 생긴 것이 남산 3호터널과 반포대교(잠수교)다.

    유흥업소도 강남 이전 대상이었다. 강북 도심에 유흥업소 허가를 금지하고, 경부고속도로 주변 체비지를 유흥업소들에게 팔아 고속도로 옆 신사역 주변에 앉혔다.

    1972년부터 신사동에 집중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카바레와 유흥업소들이 80년대에는 압구정동으로 번져갔다. 유흥가 강남의 이미지는 이렇게 굳어졌다. 대중가요의 공간도 ‘안개낀 장충단공원’, ‘돌아가는 삼각지’가 아닌, ‘제3한강교’나 ‘비 내리는 영동교’, ‘신사동 그 사람’, ‘아파트’와 같은 강남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강남 이주 유도 작전의 결정판은 명문학교의 강남 이전이었다. 서울의 명문 고교들은 모두 종로구와 중구에 입지해있었다.

    1974년 고교 평준화가 실시된 이후에도 서울시민들은 여전히 ‘명문 고교에 대한 향수와 동경’를 갖고 있었던 터라, 명문 고교의 강남 이전은 폭발적 힘을 발휘했다.

    1976년 경기고가 청담동으로, 1978년 휘문고가 대치동으로, 1980년 서울고는 방배동으로 이전했다. 경기여고가 개포동으로 이전한 것은 1988년이었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난 명문 학교들이 옮겨가면서 강남에는 또 수많은 새 학교들이 설립돼서 명문화해갔다.

    아무리 평준화됐다해도 학부모의 학력이나 경제력까지 평준화될 수는 없었다. 강남은 그렇게 교육특구가 됐고, 강남 불패의 신화는 이 배경 위에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강남공화국’은 이렇게 남북 대립과 냉전이 낳은 역사적 산물이다.

    군사 안보적인 이유로 급속히 진행된 강남 개발은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특권층과 투기 열풍 등으로 상징되는 부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해온 것이 사실이다. 남북 분단 체제가 우리 사회 면면에 얼마나 깊숙이 힘을 발휘해 왔는가를 실감하게 되는 대목이다. {RELNEWS:right}

    하지만 이제 조금씩 ‘강남’의 뉘앙스도 변화하고 있다.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멘토의 시대="">라는 책에서 “강남이라는 말에 들어 있는 것은 '합리적 주장', '상대에 대한 배려', '다양성의 인정', '닮고 싶은 매력', '촌스럽지 않음' '글로벌 경쟁력' 등”이라는 정치 컨설턴트의 발언을 전하고 있다.

    대한민국 사회의 주류층을 상징하는 ‘강남’이라는 단어 즉 ‘강남스타일’의 이미지가 “특권과 투기, 오만과 졸부”로 굳어갈 것인지, “배려와 합리, 매력과 경쟁력”으로 발전해갈지, 지금 그 분수령에 서 있다. 남북 대결 경쟁과 냉전의 역사적 산물인 ‘강남’ 그리고 ‘강남스타일’을 21세기 대한민국이 어떻게 새롭게 만들어갈 것인지는, 온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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