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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새 종정 진제 대종사가 걸어온 길



문화 일반

    조계종 새 종정 진제 대종사가 걸어온 길

     

    진제(眞際) 대종사는 1934년에 경남 남해에서 출생, 20세 되던 1953년에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내신 석우 선사를 은사로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이후 법(法) 스승이신 향곡 선사 문하에서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화두를 받아 2년여 동안 용맹정진하여 화두관문을 타파하고 개오(開悟)하시게 되었다. 그리하여 역대로 내려오는 모든 법문에 확연명백하셨으나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 화두에 막혀 다시 5년여 동안 신고하신 끝에 마침내 화두를 타파하고 확철대오하여 스승이신 향곡 선사로부터 법을 인가받고 전법게를 받았다.

    스님은 산중 스님들의 전유물이었던 참선법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여 부처님과 같은 진리의 낙을 누리게 하려는 뜻에서 1971년 시변(市邊)에 해운정사를 창건하고 선원을 개설했다. 이후 45년간 승속을 막론하고 참선법을 지도함으로써 선의 대중화, 생활화를 위해 진력했다.

    1994년 동화사 조실로 추대된 이후 18년 동안 해마다 여름안거, 겨울안거 결제에 임하는 전국의 수좌들과 재가 수행자들의 참선 수행을 지도하며 공부을 점검해 주고 있다. 또한 1996년 조계종 종립 기본선원의 조실로 추대되신 이후 16년째 참선공부를 시작하는 출가 수행자들에게 바른 참선법을 지도하고 있는 한국 불교의 대표적인 선지식이다.

    1998년, 2000년 백양사 ''1,2차 무차선대법회''에서 법주로 초청되어 서옹선사와 함께 법을 내렸고, 2002년에는 부산 해운정사에서 중국, 일본의 선의 대종장(大宗匠)들을 초청하여 ''국제무차선대법회''를 개최함으로써 한국 선(禪)의 역량을 세계에 알렸다.

    2009년에는 부산 벡스코(BEXCO)에서 750년 만에 재현된 ''백고좌대법회''의 법주로써 15,000명의 사부대중이 운집한 가운데 법문을 설하고 2011년에는 동양정신문화의 정수인 한국의 간화선을 세계에 널리 전파하고 세계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노구에도 불구하고 미국 뉴욕의 리버사이드 교회에서 2,000 여 대중이 운집한 가운데 간화선 세계평화 대법회를 개최한 바 있다.

    수행(修行)과 전법(傳法)

    < 출생과 출가 >

    스님께서는 1934년 경남 남해 삼동면에서 출생하여, 1953년에 출가했다. 불공(佛供) 드리러 절에 자주 다니던 친척을 따라서 동네에서 십 리쯤 떨어진 곳에 있던 해관암(海觀庵)이라는 조그마한 사찰에 가셨다가, 석우(石友) 선사를 친견(親見)한 것이 출가의 인연이 되었다.

    석우 선사께서는 청년을 보시더니,
    "세상의 생활도 좋지만 그보다 더 값진 생활이 있으니, 그대가 한번 해보지 않겠는가?" 하셨다.
    "무엇이 그리 값진 생활입니까?"
    "범부(凡夫)가 위대한 부처 되는 법이 있네.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나지 않은 셈치고 수행의 길을 가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래서 청년은 수행하는 스님들의 생활을 유심히 살펴보고, 세속에서는 볼 수 없었던 청정한 수행생활을 하는 스님들의 삶에 큰 환희를 느껴 출가하게 되었다.

    < 구도(求道)의 길 >
    남해의 조그마한 암자에서 시작된 행자 수업(行者修業)은 큰스님 시봉에다 공양주 소임 그리고 또, 나무를 해오고, 채소를 가꾸는 등으로 해야 할 일들이 종일 연속이었다.
    이렇게 해관암에서 열 달 가량 지내시고 나서, 석우 선사께서 해인사 선방 조실(祖室)로 가시게 되자, 선사를 따라 해인사로 가 그 해 겨울에 사미계(沙彌戒)를 받았다. 그 후 해인사 강원(講院)에서 한 해 동안 경전(經典)을 익히다가,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어 동화사로 가셨던 석우 선사의 부름을 받고 동화사로 가게 되었다. 그 곳에서 석우 선사를 시봉하면서 다시 경(經)을 익혔다. 그러던 중에 한 번은 동화사 대중스님 이십여 분과 함께 팔공산 상봉을 올랐다가, 우연히 빈 토굴을 발견하여 대중스님 몇 분과 함께 남아서 일주일 동안 용맹정진(勇猛精進)을 하고 돌아왔던 일이 있었다.
    석우 선사께서는 당장에,
    "어른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고 제멋대로 온갖 것을 다 하려고 든다." 하시며 호통을 치셨다. 그렇지만 참학의지(參學意志)로 가득 차 있던 진제스님의 심중을 간파하시고,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화두를 주셨다.

    스님께서는 이때부터 선문(禪門)에 들어서 오로지 화두참구에만 마음을 두시다가, 동화사를 떠나 운수행각(雲水行脚)의 길에 오르셨으니, 그 때가 1957년, 스님의 세수(世壽) 24세였다.

    25세 때 석우 선사께서 열반(涅槃)에 드셨다는 부고(訃告)가 날아와서, 동화사로 가 다비(茶毘)를 치르셨다.
    그러고 나서 경남 월내(月內) 묘관음사(妙觀音寺)에 주석하고 계시던 향곡(香谷) 선사를 찾아가 예배드리며,
    "이 일을 마칠 때까지 스님을 의지해서 공부하려고 왔다."하니, 향곡 선사께서 물으셨다.
    "이 심오한 광대무변(廣大無邊)한 대도(大道)를 네가 어찌 해결할 수 있겠느냐?"
    "신명(身命)을 다 바쳐서 해보겠다."라고 대답하니, 향곡 선사께서 새로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 화두를 주셨다.

    어떤 사람이 아주 높은 나무 위에서 입으로만 나뭇가지를 물고 손으로 가지를 잡거나 발로 가지를 밟지도 않고 매달려 있을 때, 나무 밑에서 어떤 사람이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를 물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묻는 이의 뜻에 어긋나고, 만약 대답한다면 수십 길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자기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어찌해야 되겠느냐?

    이 화두를 들고 2년여 동안 신고(辛苦)하셨다. 결제(結制)와 해제(解制)를 상관하지 않고 일체 산문출입(山門出入)을 하지 않으면서, 화두참구 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용납하지 않고 궁구(窮究)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28세 때 가을에 ''향엄상수화'' 화두 관문(關門)을 뚫어 내셨다. 그리하여 종전에 동문서답(東問西答)하던 미(迷)함이 걷혀지고, 비로소 진리의 세계에 문답의 길이 열리었다.
    오도송(悟道頌)을 지어 향곡 선사께 바치시기를,

    這箇柱杖幾人會
    三世諸不總不識
    一條柱杖化金龍
    應化無邊任自在

    이 주장자 이 진리를 몇 사람이나 알꼬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다 알지 못하누나.
    한 막대기 주장자가 문득 금룡으로 화해서
    한량없는 조화를 자유자재 하는구나.
    하니, 향곡 선사께서 물음을 던지셨다.
    "용이 홀연히 금시조(金翅鳥)를 만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이에 스님께서,
    "당흉하여 몸을 굽히고 세 걸음 물러가겠다.[屈節當胸退身三步]"라고 답하자, 향곡 선사께서는 "옳고, 옳다." 하시며 크게 기뻐하셨다.
    그러나 송고백측(頌古百則)으로 유명한 설두(雪竇) 선사께서도 다른 공안(公案)에는 다 확연명백하셨으나 ''일면불 월면불(日面佛月面佛)'' 공안에 막혀 다시 20년을 참구하셨는데, 선사께서도 이 공안에는 막히셨다.
    그리하여 이 화두를 가지고 다시 참구하여 5년여 동안 전력(全力)울 다 쏟으시다가 해결해 내셨다. 마침내 고인들께서 중중(重重)으로 베풀어놓으신 온갖 차별법문(差別法門)에 걸림이 없어 상통(相通)되셨다.
    오도송(悟道頌)을 읊으시기를,

    一棒打倒毘盧頂
    一喝抹却千萬則
    二間茅庵伸脚臥
    海上淸風萬古新

    한 몽둥이 휘두르니 비로정상 무너지고
    벽력 같은 일 할에 천만 갈등 흔적 없네.
    두 칸 토굴에 다리 펴고 누웠으니
    바다 위 맑은 바람 만년토록 새롭도다.

    < 법등(法燈)을 부촉받다 >

    그 후 스님의 세수 34세이던 1967년, 하안거 해제 법회시에 묘관음사 법당에서 향곡 선사와 법거량(法擧揚)이 있었다.
    향곡 선사께서 상당(上堂)하시어 묵좌(黙坐)하고 계시는데, 진제스님이 나와 여쭈었다.
    "불조(佛祖)께서 아신 곳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불조께서 아시지 못한 곳을 스님께서 일러 주십시오."
    "구구는 팔십일이니라."
    이에 스님이,
    "그것은 불조(佛祖)께서 다 아신 곳이다."하니, 향곡 선사께서는
    "육육은 삼십육이니라."라고 하셨다.
    이에 스님이 예배드리고 물러가자, 향곡 선사께서는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내려오셔서 조실방(祖室房)으로 가셨다.
    다음날 스님이 조실방을 찾아가 예를 올리고 다시 여쭙기를,
    "불안(佛眼)과 혜안(慧眼)은 여쭙지 아니하거니와, 어떤 것이 납승(衲僧)의 안목(眼目)입니까?"하니, 향곡 선사께서 이르셨다.
    "비구니 노릇은 원래 여자가 하는 것이니라.〔師姑元來女人做〕"
    그러자 스님이,
    "오늘에야 비로소 큰스님을 친견하였다."하니, 향곡 선사께서 물으셨다.
    "네가 어느 곳에서 나를 보았느냐?"
    "관(關)."
    그러자 향곡 선사께서는,
    "옳고, 옳다."하셨다.
    진제스님은 여기에서 향곡 선사로부터 임제정맥(臨濟正脈)의 법등(法燈)으로 부촉(付囑)받으시고 전법게(傳法偈)를 수(受)했다.

    付眞際法遠丈室

    佛祖大活句
    無傳亦無受
    今付活句時
    收放任自在

    진제 법원 장실에 부치노라

    부처님과 조사의 산 진리는
    전할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것이라
    지금 그대에게 활구법을 부촉하노니
    거두거나 놓거나 구대 뜻에 맡기노라.

    이렇게 진제대종사께서는, 석우 선사로부터 ''부모로부터 이 몸 받기 전 어떤 것이 참 나인가?''라는 화두를 받아 여러 수행처를 다니며 정진하시다가, 향곡 선사(부처님의 正統法脈을 이으신 제 78대 法孫)라는 대선지식을 만나 자신의 전 생애를 바치고 공부에 임하였다.
    전 생애를 바치는 이러한 희생을 통하여 ''''향엄상수화(香嚴上樹話)''''화두를 깨달아 마치고, 나아가 최고의 깨침의 관문인 ''''일면불월면불(日面佛月面佛)''''화두마저 깨달아 마치니, 2500여 년 전 부처님의 살림살이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깨달음의 세계를 얻게 되셨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 오로지 가섭에게만 전하신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심법(心法)을 깨달아 얻으신 것이고, 향곡선사로부터 법을 인가받아 경허-혜월-운봉-향곡 선사로 내려오는 부처님의 법맥(正統法脈)을 이은 것이다.

    < 대자유인(大自由人)의 삶 >

    이 후 50여 성상이 다 되도록 동화사와 해운정사 그리고 기본선원의 조실로 계시면서 하루로 빠짐없이 납자를 제접하시며 법을 펴고 있다. 이렇듯 오직 법을 이을 지음자(知音者)를 만나기 위해 회상을 열어 제방의 많은 수행자들을 지도하시고 있으며 "이대로 부처님의 법맥이 끊어질지언정 깨달음이 미천한 이에게 법을 전하지는 않는다."라는 말씀으로 법제자를 기다리고 있다.

    진제대종사는 평소 법문상(法門上)에 말씀하시기를, "모든 번뇌(煩惱)와 온갖 시비분별(是非分別)을 끊어 참 나를 온전히 깨달으면, 남이 없는(無生) 영원한 대안락(大安樂-온갖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난 안락의 세계)에 머물며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된다."고 부처님의 가르침과 깨달음의 길을 설명하고 있다.
    [BestNocut_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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