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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으로 감귤과 쇠소깍으로 유명한 제주도 서귀포시 효돈동.
아직 동이 트지 않아 어둠이 얕게 깔린 새벽 6시. 대부분의 집에 불이 켜지지 않았을 때 밝게 빛을 켜는 한 곳. 그 곳은 바로 ''담배''라는 간판을 조그맣게 달고 있는 구멍가게.
가게 안을 들여다보니 세월의 흔적을 가득 머금은 할머니가 다 채워지지 않은 선반을 정리하고 있다.
대형마트에서는 담아내지 못할 삶의 흔적들수퍼마켓과 편의점에 밀려 지금은 흔히 찾아 볼 수 없는 구멍가게를 같은 자리에서 30년동안 지키고 있는 허희자(78) 할머니를 만나 평범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는 보통사람들의 사는 얘기를 들어봤다.
"음...지금 이 자리에서 운영한건 30년 전이다. 처음 시작한건 그 전보다 훨씬이고..."
처음 가게를 시작하게 된 사연을 듣다보니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나에게 남은것은 하나도 없었지...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다리를 다쳤어.... 다리를 다치니 더 이상 공장 일을 못하게 됐으니 살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어? 마침 그때 결혼을 하고 딸을 낳았는데 딸도 키워야 했고... 그래서 뭐라도 해야 겠다라는 생각에 가게를 시작했지...처음 시작할 때? 그건 가게도 아니었어. 처음 시작했을 때는 그냥 집에서 물건을 갖다 놓고 오는 사람한테 파는 것으로 시작을 했지. 음료수도 사이다, 콜라. 지금처럼 주스랑 여러 탄산음료은 있지도 않았어. 과자 종류도 별로 없었고 지금 팔고 있는 아이스크림이나 그런 것도 하나도 없었지."
그래도 이 가게는 허할머니 인생의 전부였다.
" 지금 가게로 옮겨 온지 30년이 넘었어. 올해 47살인 첫째 딸이 중학교에 갓 입학할 때였으니까. 지금 가게 앞에 있는 도로가 그 당시에 막 생길 때 였지. 그래서 지금의 가게를 사려는 사람이 많았어... 나도 이 가게를 사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보다 높은 가격에 이 가게를 사야 제가 살 수 있는 상황이었어 그 때 상황이... 그래서 있던 밭을 360만원에 팔고 이 가게를 550만원에 샀지... 이 가게를 사면서 빚도 200만원이나 지고 사람들도 무모했다고 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내가 왜 그땐 그랬는지 모르겠어.(웃음) 이 가게를 사서 장사를 해야만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았거든.
열심히 하다보니 가게를 사면서 생긴 200만원의 빚도 청산하는 기쁨도 누렸다.
"그 빛은 가게를 운영하면서 다 갚았지... 빛을 갚고 2명의 딸을 키우면서 생활하기는 힘들었지만 점심도 못 먹어가면서 장사를 했어... 이렇게 생활하면서 아끼고 또 아끼니 200만원의 빚은 갚을 수 있었지..."
''''할머니가 운영하는 이런 조그마한 구멍가게가 주변에 많았지만 지금은 할머니가 운영하시는 가게 하나만 남았다고 한다.
"옛날에 구멍가게 엄청 많았지. 아랫동네에도 3개나 있었고 이 주변에도 2개나 있었어. 근데 그건 다 옛날 얘기야. 이제 내가 운영하는 이 가게 하나만 남고 다 없어졌어."
"다 개인사정이야 있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조그마한 동네에도 큰 마트가 들어서기 시작했어. 물건 종류도 다양하고 묶음 상품을 싸게 판매하는 마트들 있잖아. 그리고 많이 사면 포인트도 적립해주고 경품도 주는... 에효... 이젠 그런 대형마트들 말고도 여러 편의점까지 생겨서 장사가 안되는 형편이라 다 장사를 그만 두었지."
대형마트의 쓰나미가 제주의 남쪽 끝 조그만 마을 가게도 집어 삼킨 것이다. 그래도 가게를 왜 계속하려는 걸까?
"사람이 일을 해야 하잖아요. 내가 앞에서 말했듯이 다리를 다쳐서 많이 움직이는 일을 못하니까... 그나마 할 수 있는게 가게 운영이었어... 그래서 가게를 운영할 수 밖에 없었지. 돈이 되지 않아도 얘들은 커가고 할 수 있는 일은 이런 장사하는 일밖에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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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대형 마트도 생기고 편의점도 주변에 많이 생기던데....''''말도 말아.....우리 가게도 장사가 안되서 미치겠어...싸게 파는 편의점이 늘어나니까....여기는 오지도 않고....동네 사람들도 여기는 안오고 다 큰 마트들만 가서 사.. 포인트? 그런거 적립해 준다고....
''''그래도 단골손님이 있지 않나요?''''
"단골손님은 무슨... 30년째 가게 운영한다고 단골손님... 단골손님... 하는데... 그거 다 옛날 얘기야. 단골 손님도 다 편의점이나 대형마트 가버리고... 에휴... 그나마 사람들 자주 오게 하려고 담배 하나 사면 라이터를 주는데 이렇게 장사하면 남지도 않고 걱정이 태산이야."
"물건이 가게에 잘 안들어 와요?'''' 시골이라고 물건 조달이 여의치 않다고 한다.
"장사가 안되니까....물건을 여기에 파는 사람들 입장에서도 보면 주기 꺼려하지. 그래서 요즘엔 동네에 있는 큰 마트에서 불러다가 쓰는 데 그것 마저도 부르는 양이 적으니까 그 쪽에서도 보내주기 꺼려하고.그러다 보니까 우리가게에 밀가루를 안 판지 오래야. 가게 선반도 텅텅 비고..."
그래도 가게를 둘러보니까 선반이나 진열대에 있는 물건들이 여느 마트 못지 않게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다. 할머니의 깔끔한 성격을 엿볼 수 있다.
"깔끔하게 정리하는 건 기본이지.아무리 구멍가게라도 사람들이 봤을 때 기분이 좋아야 하잖요. 이건 제가 30년동안 가게를 운영하면서 꼭 지키는 사항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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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할머니의 구멍가게
''''그럼 이 가게는 언제까지 운영하실 생각이세요?''''
"이 가게... 아마 계속하지 않을 까 싶어... 몸이 안 좋아서 운영을 못할 때 까지는... 장사는 안되지만... 우리 손자, 손녀들 오면 몇 푼 안되지만 용돈도 쥐어줄 수 있고... 그리고 이 가게를 하니까 그나마 지금까지 살아온 거지 가게를 안했으면 어떻게 살아갔을지 모르겠어."
''''구멍가게''''는 조그만 가게. ''''대형마트''''는 크고 화려한 가게를 말한다. 하지만 내가 방문한 이 구멍가게는 대형마트에서는 담아내지 못할 할머니의 인생과 역경, 그리고 삶의 흔적이 남아있다.[BestNocut_R]
그나마 가게를 운영하니까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허희자 할머니. 가게에 대한 얘기를 할 때 마다 웃기도하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한 그녀에게서 가게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무한한지 느낄 수 있었다.
내일도 새벽같이 일어나 가게를 청소하고 선반을 깔끔하게 정리할 할머니. 할머니는 그런 내일을 위해 오늘도 일찍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