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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에 남은 ''불멸의 커플'', 박용길 장로-문익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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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사에 남은 ''불멸의 커플'', 박용길 장로-문익환 목사

    [변상욱의 기자수첩]

    ㅊㅊ

     

    테마가 있는 고품격 뉴스, 세상을 더 크고 여유로운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기자수첩 시즌2''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담았다. [편집자 주]

    통일운동의 대모이자 고(故)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가 소천했다. 80년대 초 기독교계에서 민족운동 내지는 민주화 운동에 뜻을 두고 활동하던 사람들이 모이면 종종 문익환 목사의 집안 이야기를 화제로 꺼내곤 했다. 그 가족사가 곧 이 나라 근대사이자, 현대사이고 민족운동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 이런 걸 <명문가 名文家="">라 부른다

    문익환 목사의 할아버지(문병규)는 동학군 출신이다. 봉건적 억압의 타파와 민족 자주의 꿈을 위해 싸웠던 동학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서구 선진문물을 익혀 나라를 살려내기로 결심하고 기독교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함경북도 종성에서 북간도 명동으로 터를 옮겼다. 이때 아버지의 손을 잡고 북간도로 간 4살 난 아들이 바로 문익환 목사의 부친인 문재린 목사.

    문재린 목사는 북간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3월 중순, 3.1운동을 간도지역에 전파하기 위해 만세 행진을 주도했다가 투옥됐다. 그 뒤 캐나다로 가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다시 선교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된 한국 사회에서 최고의 엘리트 목사지만 문재린 목사는 교권과 권위에는 관심 두지 않고 평신도 운동과 교회 개혁운동, 민주화 운동에 나섰다. 독립운동, 민족운동과 관련해 감옥살이만 4번이다.

    아들인 문익환 목사는 60세 나이에 처음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감옥생활을 시작해 그 후 심장마비로 작고하기까지 6차례, 18년 중 11년3개월을 옥에서 지냈다. 동생 문동환 목사도 2번의 옥고를 치르고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 망명길에 올랐다.

    3.1민주구국선언 때의 가족 일화가 있다. 문익환 목사와 동생 문동환 목사는 감옥에 갔고 부인 박용길 장로와 아들 문호근(문성근 형) 씨는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이 때 문 목사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는 "집안에 애국자가 넷이나 있어 흐뭇하다" 했고, 부인 김신묵 권사는 "내 아들 며느리야 나이도 있고 유명한 사람들이니 심한 고문을 당하지 않겠지만 젊은 학생들은 심하게 당할 텐데.."라고 걱정하면서 기도를 시작했다는 유명한 이야기다. 그 후 며느리 박용길 장로도 나이 76살이 되던 해 심장병을 앓는 상태에서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 시가, 외가, 처가 어느 쪽으로도 명문가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이자 박용길 장로의 시어머니인 김신묵 권사는 함경북도 회령이 고향이다. 명동여학교와 배신성경학교를 졸업한 뒤 교회와 야학을 이끈 여성 지도자이다. 문익환 목사와 문동환 목사 형제에게 외세를 물리친 우리 역사를 밤마다 가르치고 베게머리에는 태극 문양을 수놓아 조국과 민족을 일깨웠던 일화는 유명하다.

    김신묵 권사의 아버지, 그러니까 문익환 목사의 외할아버지(김하규/실학자)가 문익환 목사와 윤동주 시인에게 논어와 맹자를 가르친 스승이기도 하다. 문재린 목사와 김신묵 권사 두 사람의 회고록 초안과 일기, 후배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녹음해 구술한 기록까지 보태 2008년 두 사람의 회고록 <기린갑이와 고만네의="" 꿈="">이 세상에 나왔다.

    박용길 장로의 이력에 대해 ''광부의 넷째 딸로 태어나...''라고 소개하는 신문 기사들이 간혹 있는데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박용길 장로의 아버지(박두환)는 조선조 말에서 대한제국으로 건너가는 구한말 시대의 무관(武官)이었다. 말을 타고 임무를 수행하는 기마장교였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무장해제 당하자 울분을 참지 못해 평북 창성의 대유동 금광촌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기사로 일하며 한편으로는 ''의신학원''이라는 학교를 설립해 민족교육 운동에 헌신했다. 부인도 유치원을 세워 아이들을 보살폈다. 그리고 뒤로는 독립군을 도왔다. 해방이 되자 박용길 장로의 부친은 너무 기쁜 나머지 다시 대한민국 국군에 입대했다 사고로 순직해 현재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모셔져 있다.

    ㄴㄴ

     

    ◇ ''늦봄''을 이끌어 준 ''늦길''

    박용길 장로는 넷째 딸로 태어나 경기여학교, 일본 요코하마 여자신학교를 거치는데 일본 유학 시절 관동조선신학생회 모임에서 문익환 목사를 만난다. 문익환 목사의 건강이 나빠 집안에서 반대하자 "반년만 같이 살아도 좋다. 이 남자와 결혼 못한다면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버텨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문익환 목사의 호 ''늦봄'', 박용길 장로의 호 ''봄길''. 문익환 목사는 ''늦봄''인 자신을 이끌어 준 ''봄길''이라고 부인에 대한 고마움과 믿음을 표하곤 했다. 문익환 목사는 박용길 장로를 애칭 ''연분홍 코스모스''로 부르고 만나면 늘 손을 잡고 다녔다. 평생 주고받은 편지가 1,000통이 넘는다고 한다.

    박용길 장로도 "문익환 목사와 반년만 살고 헤어진다 해도 좋다며 결혼했으니 그 이후 함께 한 삶은 덤이자 축복"이라고 이야기 하곤 했다. "삶을 축제로 여기며 살아가라"는 권면도 기억이 난다. 두 사람은 만주에서 신혼생활을 하며 교회를 꾸려 나갔다. 해방 후엔 만주 피난민 수용소에서 난민을 돌보았는데 중국 당국의 핍박으로 쫓겨나 가족과 난민들을 이끌고 걸어 걸어 만주에서 신의주, 평양, 사리원, 3.8선, 서울까지 대장정을 펼치기도 했다.

    ◇ 박용길이 문익환이고 문익환이 박용길

    문익환 목사가 세상을 뜨고도 박용길 장로는 문익환 목사의 모습을 그대로 세상에 이어갔다. 박용길 장로 구순 잔치가 수유리에서 열렸을 때 고은 시인이 ''박용길이 문익환이고 문익환이 박용길이야''라고 축사를 했다. 그건 박용길 장로의 생전 직함을 보면 바로 증명이 된다.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의장, 통일연대 고문,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고문, 6.15남북공동선언 실천 남측준비위원회 명예대표 등을 역임했다.

    민족의 평화통일이라는 염원을 안고 국가보안법과 냉전체제를 넘어 북한을 방문하고 통일운동에 매진한 이 부부를 일컬어 ''민족사에 바쳐진 불멸의 사랑''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시적인 표현을 떠나 역사 속에서도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의 민중들에게 동시에 존경을 받는 부부는 분단 60년사에 이들이 유일할 것이다.

    [BestNocut_R]1989년 4월 문익환 목사가 북한방문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안기부 수사 기록으로도 서둘러 돌아온 기색이 역력했다. 나중에 박용길 장로가 그 배경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 때 북한 당국이 문익환 목사에게 ''가보고 싶은 곳 어디든 들러도 되니 이야기하면 안내를 하겠노라''고 했는데 문익환 목사는 여권만기일이 4월 13일이어서 빨리 남쪽으로 가야 한다고 사양했다고 한다. 남쪽으로 돌아간다 해도 바로 감옥행인 걸 알면서 여권기일을 지키려던 대한국민이 문익환 목사였다. 박용길 장로도 문 목사의 뒤를 이어 북한을 방문했을 때 북한당국이 훈장을 수여하려 하자 "내가 민족 문제로 북에 왔지 훈장 타러 온 게 아니라"며 거절했다.

    ◇ 인생은 ''꿈''과 ''덤''

    이 가족을 이끌고 버티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가까운 사람들은 ''꿈''과 ''덤''에 대한 확신이었다고 말한다. 늘 현실을 넘어 큰 꿈을 꾸었고 자신의 삶을 이미 누릴 만큼 누린 뒤 덤으로 받은 축복이라 여기며 아끼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자주독립 - 민족해방 - 민주주의 - 민족평화통일. 꿈에서 꿈으로 이어진 가족사가 지금은 막내아들로 이어져가고 있다. 막내 문성근 씨가 개혁세력의 하나됨과 참된 민주주의 실현이라는 <백만민란> 꿈을 뿌려가고 있는 중이다.

    구순 잔치 때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가 참석해 박용길 장로와 부둥켜안고 찍은 사진을 본다. 서로 얼굴을 부비다가 ''우리 사진 같이 찍자''고 해서 찍은 사진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이소선 여사의 팔순 잔치에서 다시 만나 함께 사진을 남겼다. 사진 속의 두 어머니가 나란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두 어머니''를 취재 현장에서 보며 커나간 젊은 시절이 축복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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