ㅇ^
e스포츠와 격투기 중계를 종횡무진 하는 성승헌, 그가 1년 1개월 만에 수퍼액션의 UFC 생중계 캐스터로 돌아왔다. 지난 6월 27일 ''UFC on VERSUS 4''에서 중계진에 복귀한 후 김동현이 출전한 UFC 132 중계까지 마쳤다. 출전선수에 대한 상세한 배경지식과 활기찬 목소리는 여전했다. ''색소폰을 멋드러지게 부는 남자'', ''일요일의 모닝콜 같은 남자'' 성승헌(33)을 만났다.
◈ "김동현 TKO패한 날 낮술 했죠"
"김동현이 카를로스 콘딧에게 TKO패 하던 날 낮술 마셨어요."
지난 3일(일요일) 오후 1시쯤 UFC 132 생중계를 마친 다음 성승헌 캐스터는 곧바로 종로 피맛골로 향했다. 막걸리와 파전을 앞에 두고 지인에게 속상한 마음을 한참 털어놓았다. 중계하는 입장에서 김동현의 TKO패는 너무 가슴 아팠다. 생애 첫 패배를 당한선수를 격려는 못할 망정 악플을 쏟아내는 팬들에 대한 실망감은 더 컸다.
그중 성 캐스터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때린 댓글이 하나 있었다. "콘딧 전 앞두고 ''파이터 김동현을 말하다''라는 특별프로그램 촬영 차 김동현 선수가 운동하는 부산 팀매드를 방문했거든요. 근데 ''시합 전에 부산에서 촬영하고 그러니까 지는거야'' 이런 댓글이 있더라구요. 기계도 쉬어야 하는데, 선수라고 24시간 운동만 할 수 없잖아요? 기분 좋게 갔다가 ''정말 김 선수한테 좋지 않은 영향을 준 게 아닐까'' 싶어서 너무 미안했어요."
공교롭게도 김동현 시합은 이날 중계의 첫 머리였다. 김동현의 패배로 중계 스튜디오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했다. TV 화면 속 성 캐스터와 김대환 해설위원의 표정에서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김 선수 시합 끝나고 멍하니 있었어요. 다른 시합 중계할 때는 거기에 몰두하니까 괜찮은데 광고로 넘어갈 때는 자꾸 TKO패 장면이 연상돼서 힘들었어요."
그러나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는 게 캐스터의 역할이다. "이어진 시합들이 흥미진진해서 금방 잊을 수 있었죠. 특히 동료 선수들 사이에서 퇴물 취급받는 노장 티토 오티즈가 1라운드 KO승을 거두는 순간은 정말 짠했어요. 반더레이 실바의 KO패는 충격적이었지만 도미닉 크루즈와 유라이아 페이버의 밴텀급 경기는 감탄사를 그치지 못할 만큼 멋진 승부였구요."
어느새 격투기 팬으로 돌아간 성 캐스터는 네티즌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격투기 선수들이 겉모습은 강해보이지만 마음은 여리고 섬세해요. 우락부락한 근육만 보지 말고 그 안에 감춰진 감성을 헤아려주세요. 어떤 분야든 절제하고 노력하는 사람은 존경받는데 격투기 선수한테는 지식을 갈고 닦은 사람한테 주는 존경심의 절반도 안주는 것 같아 씁쓸하네요. 우리나라 격투기 선수는 이제 막 자라는 새싹이에요. 질책보단 애정을 주세요."
그는 안와골절 부상을 당한 김동현에게도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동안 얼마나 심한 암박감 속에서 경기를 치렀을까요? 트위터에 김 선수가 올린 글 보고 마음이 짠하더라구요. 하지만 한 번의 패배로 그동안 일군 것들이 없어지는 건 아니에요. 다음에 더 강한 상대 만나서 이번 패배로 인한 억울한 심정 모두 극복하길 바랍니다."
◈ "운동해보면 감정이입 잘되죠"성승헌 캐스터는 2007년 격투기 중계와 인연을 맺었다. UFC 신인 육성프로그램 ''디 얼티밋 파이터(TUF) 시즌 1''을 1인 중계한 것. 그래서 ''TUF 1''에 나왔던 선수들에 대한 애정이 유독 깊다. "네 아이의 아빠인 조 스티븐슨은 심정적으로 정말 잘됐으면 좋겠고, 크리스 리벤은 사고치는 동네친구 같다고 할까요? 포레스트 그리핀이 앤더슨 실바에 졌을 때는 마음이 짠했죠."
이때는 순수하게 격투기를 즐기는 팬에서 격투기 전문가로 변신을 꾀한 시점이기도 하다. "그때부터 격투기 관련 영상, 다큐를 보면서 열심히 공부했죠." ''UFC EXPRESS'' 진행을 맡은 후에는 도장을 다니며 타격과 그라운드 기술을 배웠다. "제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느꼈어요. 조금 알고나면 아예 모를 때보다 궁금한 게 더 많이 생기잖아요. 몸으로 익히면서 역시 ''경험이 최고다''라는 생각이 들었죠."
성 캐스터는 중계할 때 ''감정이입''을 중요시 여긴다. 감정이입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경험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 잠시 들여다본 그의 휴대폰에는 격투기 관련 영상이 빼곡하다. "격투기 중계 준비할 때면 전적이나 파이팅스타일 보다는 출전선수의 뒷배경을 먼저 조사해요. 그 선수가 살아온 역사, 훈련과정을 보고 느끼면 훨씬 감정이입이 잘 되거든요."
직접 종합격투기를 수련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성 캐스터는 현재 ''팀 하이브리드''(관장 김형우)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 "제가 직접 해봤으니까 ''아, 저럴 때는 정말 아픈데…'' 중계할 때 감정이입이 잘돼요. 운동을 배우면 배울수록 선수에 대한 존경심도 커지죠. 하나의 기술을 완성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이 노력해야 하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수련''이라는 표현에는 얼굴까지 빨개지며 손사래다. "에이~ 민망해요. 시청자들에게 경기내용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접근하는 수준인데요. 그리고 캐스터는 숲을 보여줘야 하는데 너무 깊이 들어가면 나무만 보게 돼요. 나무를 보여주는 건 해설자 몫이죠." 요즘 운동을 잠시 쉬고 있다는 성 캐스터는 최근 김동현과의 에피소드도 풀어놓았다. "얼마전 부산팀매드에서 김 선수랑 기술시연을 했거든요. 근데 이상하게 기침만 해도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갈비뼈에 실금이 생겼더라구요. 정말 일반인은 말도 안되는 충격이에요. 여러분도 한 번 붙어보면 ''인체의 신비''를 느끼실 거에요."
UFC 대회는 메인카드와 언더카드까지 합치면 10시합 정도 된다. 언더카드에 출전하는 선수에 대한 정보는 구하기도 만만찮다. 그러나 "열심히 준비하지만 준비안한 듯 자연스러운 중계를 하기 위해" 성 캐스터는 오늘도 열정적으로 배우고 노력한다.
◈
"일요일의 모닝콜 같은 남자 꿈꿔요"
UFC 생중계는 보통 3~4시간 계속된다. 시청자도 집중해서 보기 쉽지 않다. 하물며 중계하는 입장에서는 어떨까. 집중력이 흐트러지지는 않을까. 이에 대해 성 캐스터는 명쾌한 답변을 내놓았다. "중계할 때는 거기에 푹 빠져있어요. 방송하는 사람이 처지면 보는 사람은 얼마나 처지겠어요. 격투기는 언제 한 방이 터질지 몰라서 단 한순간도 방심못해요. 더구나 생중계하는 스튜디오 안이 시끄럽기 때문에 더 집중하게 되죠."
성 캐스터의 화려한 언변이 ''대본'' 덕이 아닐까에 대한 의문도 풀렸다. "멘트는 미리 준비못해요. 애드리브죠. 격투기는 날것 그 자체잖아요. 생동감 넘치는 장면을 보면 자연스럽게 영감을 얻죠. 그래서 가끔 엉뚱한 말을 하는데 파트너인 김대환 해설위원을 믿으니까 맘놓고 얘기해요. 하하"
''캐스터로서 좋아하는 시합''을 묻자 그는 판정까지 가는 시합을 들었다. ''에너지 소모를 줄일 수 있는 KO를 선호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추측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3라운드건 5라운드건 판정가는 경기가 좋아요. ''더 열심히 중계하자''는 마음가짐을 갖게 하거든요. 결과만 보면 ''에이~ 판정이야'' 그럴 수 있지만 탐색전만 하다 끝났다고 경기내용이 꼭 지루한 건 아니잖아요. 언뜻 보면 재미없는 시합을 시청자가 흥미진진하게 느끼게끔 중계하고 싶어요."[BestNocut_R]
성 캐스터의 트레이드 마크는 시원시원한 말투와 생기넘치는 목소리다. 그는 감성적인 중계를 지향한다고 강조했다. "기존 스포츠 캐스터는 정확함과 냉정함이 중요했지만 격투기는 새롭고 젊은 컨텐츠잖아요. ''시끄럽다''고 하실 수도 있지만 관심 가져주시면 상관없어요." UFC 생중계는 대부분 일요일 아침에 방송된다. 그는 "편하게 누워서 보던 시청자가 허리를 15도 정도 일으켜 세우면 성공이다. 일요일의 모닝콜 같은 캐스터, 불편한 캐스터가 되고 싶다"며 웃었다.
그렇다면 그가 그리는 이상적인 캐스터 상은 뭘까. "일전에 미국 야구장에 갔을 때 지역중계방송 하는 걸 봤어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편안하고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중계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죠. 지금은 캐스터로서 ''나만의 선''을 그리는 과정에 있지만 훗날 그 할아버지처럼 팬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 나이들어가고 싶어요. 저는 이 일을 너무 좋아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