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네 인생을 흔히 한번 왔다가 지나가는 ''나그네''에 비유하곤 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이 세상의 주인인 양 행세하는 인간의 오만함에 비유하기도 하지요. 사실 세상의 진정한 주인은 산천이나 문화재처럼 늘 변함없이 이 땅을 지키는 유무형의 자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늘의 주제를 끄집어 내려다보니 얘기가 길어졌습니다. 오늘은 서울의 문화재 가운데 ''비석''에 관한 얘기를 해 볼까 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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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高宗卽位四十年稱慶紀念碑)조선시대 600년 도읍지인 서울은 발길 닿는 곳 마다 역사의 숨결이 녹아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겁니다.
그 중에서도 경복궁과 육조거리가 있었던 세종로 일대는 말 할 것도 없겠지요. 오늘 처음 소개하는 비석이 바로 세종로 네거리에 있습니다.
교보빌딩 앞 멋드러진 정자 속에 감춰져 있는 ''고종즉위40년칭경기념비(高宗卽位四十年稱慶紀念碑)''가 첫번째 주인공입니다.
1969년 사적171호로 지정된 곳이죠. 이 비석은 조선시대 26대 왕인 고종의 즉위 40주년이 되는 1902년에 세워졌는데, 당시 51세의 고종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기념한 비입니다.
기로소는 정2품 이상의 문관 가운데 70세 이상의 원로를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인데, 대부분의 왕이 장수를 하지못해 조선시대를 통틀어 기로소에 들어간 왕은 태조와 숙종, 영조, 고종 이렇게 네 분 뿐이라고 합니다.
이 비석은 또 1897년에 고종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의 칭호를 사용했던 것을 기념하는 뜻도 담겨 있답니다.
화강암으로 된 비석 상단에는 봉황과 조선황실의 문양인 이화문장(李花紋章)이 새겨져 있고 비신 네 면 상단을 둘러 새긴 ''대한제국황제 보령육순 어극사십년 칭경기념비(大韓帝國皇帝寶齡六旬御極四十年稱慶記念碑)''라는 비의 제목은 황태자 순종의 글씨입니다.
정자 형태로 추녀가 밖으로 시원하게 뻗친 비전(碑殿)은 조선시대 말기의 대표적인 목조 건축물로도 손꼽힙니다.
비전을 떠받치는 돌난간과 동서남북 각 방위에 따라 사신(四神)과 십시지신(十二支神)을 새긴 동자기둥 등은 당대 최고의 조각기술이 빚어낸 예술작으로 통합니다.
세종로 사거리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이 비석은 빌딩 숲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다니는 목 좋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도 누구 하나 쉽게 눈길 한번 주지 않습니다. 늘 그곳에 있었는데 말입니다.
두 자매가 저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청하더군요. 사진을 찍어주고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자매의 얼굴이 발그스레 물드는 것을 보고 금방 후회했습니다.
사실 저도 숱하게 이 길을 다니면서도 이 비석의 존재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거든요. 특히 비석과 비전 보호를 위한 것이겠지만 주변을 철제 보호시설로 막고 있어 좀 더 가까이에서 비석을 볼 수 없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두번째 비석을 보기 위해 모처럼 종로거리를 걸었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서울에는 이처럼 걸어서 둘러 볼 수 있는 문화재가 참 많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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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로 소개할 비석은 종로 2가 탑골공원에 있는 ''대원각사비''입니다. 보물 제3호로 지정된 비입니다. 공원 안으로 들어서니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 방문객을 반깁니다.
이곳은 3·1 독립선언서가 낭독된 곳으로 더 잘 알려진 곳이지요. 하지만 이곳이 세조 때 창건된 사찰인 ''원각사''의 일부이라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 같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원각사 이전에 고려시대부터 흥복사(興福寺)가 있던 곳이었는데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사찰로서의 명맥이 단절됐다가 불심이 돈독했던 세조와 세종의 둘째 형 효령대군에 의해 ''원각사''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왕위에 오르기 위해 조카인 단종을 사지로 내몬 세조는 어쩌면 종교를 통해 자신의 죄를 구원받고자 했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세조 10년인 1464년에 원각사가 창건되고 세조 13년에 사리를 봉안할 13층 석탑이 완성됩니다. 원각사 창건에서부터 13층 사리탑을 세우기까지의 전 과정을 기록한 것이 ''대원각사비''입니다.
비문의 글씨를 새기기 위해 당대의 문장가와 문필가들이 참여했는데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대원각사지비(大圓覺寺之碑)''라는 비의 제목은 조선 초기 문인 강희맹의 글씨랍니다.
또 비석 앞면의 글은 김수온이 짓고 성임이 썼으며, 뒷면은 서거정이 글을 짓고 정난종이 썼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오랜 세월을 견디어 오면서 대리석에 새겨진 비석의 글씨는 사라졌지만 동문선에 비문의 내용이 실려 전해내려오고 있다니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석을 받치고 있는 돌거북이 눈길을 끕니다. 목 부분이 없이 머리가 수평으로 돌출돼 있고 등무늬도 육각형의 귀갑문(龜甲文)이 아니라 직사각형에 가까운 사다리꼴의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꼬리를 짧게 세개로 표현한 것도 인상적인데, 전체적으로 사실적 표현에는 미숙한 면이 있지만 조선시대 비석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는 평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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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오늘 마지막으로 소개할 비석은 국보 제3호인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입니다. 너무나 유명해서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없겠지만 실은 그 유명세 때문에 무심코 지나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비는 아시는 것처럼 신라시대 진흥왕이 한강 하류지역을 새로운 영토로 편입시킨 뒤 이를 기념해 북한산 문수봉 아래쪽 비봉(碑峰)에 세운 것입니다.
한동안 이 비석은 조선 초기의 스님인 무학대사의 비로 알려졌으나 추사 김정희 선생에 의해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임이 밝혀집니다.
추사 선생은 비봉에 올라 비문을 판독하고 이같은 사실을 비의 좌측면에 새겨 놓았습니다.
현재 비봉에 있는 비석은 모조품입니다. 진품은 비의 보존을 위해 1972년 경복궁 근정전으로 옮겼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지요.
비의 받침은 자연석을 깎아서 괴었고 비석 상단의 구조를 보면 지붕틀을 끼울 수 있게끔 되어 있는데, 안타깝게도 이 지붕틀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진흥왕순수비 역시 오랜 세월동안 표면이 심하게 마멸되면서 비문의 반 이상이 판독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대략 진흥왕의 영토확장을 찬양하고 이 일대를 둘러본 사실과 당시의 지명, 신라의 관직명 정도가 새겨져 있다는 정돕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신라 진흥왕의 영토확장 사실을 밝혀주는 석문(石文)으로서 신라사 연구의 귀중한 기초사료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