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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1935년 경기도 고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미술, 음악, 연극, 문학 등 예술 세계에 심취했고 오드리 헵번 주연의 영화 ''파리의 연인''(FUNNY FACE)을 보고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했다.
1961년 고(故) 최경자씨가 서울 명동에 설립한 국제복장학원 1기생으로 디자이너 수업을 받고 1962년 국내 최초의 남성 디자이너로 앙드레 김 의상실을 열어 50년 가까이 패션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다.
1966년 패션의 본고장인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 패션쇼를 개최했으며 이때부터 44년간 이집트 피라미드,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중국 인민대회당 등 역사와 문화가 숨쉬는 해외 명소에서 패션쇼를 펼쳐 한국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렸다.
1999년 옷로비 파동 때 사건에 직접 연루되지 않았으면서 고가 의류를 만든다고 청문회장에 서는 수모를 당했지만, 전화위복이 됐다. 당시 본명(김봉남)이 널리 알려져 마음고생을 했으나 청문회를 통해 국산 원단을 쓰는 애국자이자 모범 납세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상류층이 선호하는 브랜드로 유명세를 타면서 옷 계약이 밀려들어 40년간 세 들었던 신사동 부티크를 사기도 했다. 또한, 한국과 동양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린 공로로 1982년 이탈리아 대통령 문화공로훈장, 2000년 프랑스정부 예술문학훈장을 받았으며 2007년 제7회 자랑스런 한국인대상 패션디자인부문 수상자로 선정됐다.
앙드레 김은 스스로 "트렌드를 쫓지 않고 한국인의 감수성으로 차별화된 패션 세계를 세계인에게 전파하는 종합 예술인"이라고 강조해왔으며 "지성미와 교양미 넘치면서 연기력까지 갖춘 연예계 스타를 모델로 선호한다"고도 말해왔다.
평생 미혼이었던 그는 1982년 중도씨를 공개 입양했다. 2005년 쌍둥이 손자들을 얻었으며 아들과 손자 손녀가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신문광''으로 매일 오전 5시에 일어나 종합일간지, 경제지, 스포츠지 등 17개 신문을 2시간씩 정독했다.
동서양의 건축, 음악, 미술 등이 디자인 영감의 원천이 돼 국내 80여개국 주한대사들 및 부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 왔다. 지난해 11월 경기도 용인시 기흥에 평생 숙원이던 ''앙드레 김 디자인 아뜰리에''를 열고 ''앙드레 김 베스트 스타어워드'' 시상식을 거행, 한국 대중문화예술 발전에 이바지한 스타들에게 시상하기도 했다.
패션 디자인에만 머물지 않고 화장품, 란제리, 아동복, 가전제품, 골프의류, 주얼리 등 다양한 콜라보레이션과 라이선스 사업을 펼쳐왔다.
후계자가 없는 앙드레 김은 생전 후계자와 관련한 질문에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조르지오 아르마니도 아직 후계자 없이 왕성하게 활동한다. 앞으로 10년은 더 창작활동에 전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