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북서쪽 50km, 평양에서는 남으로 162km 지점에 있으며 북위 38˚선 바로 아래에 위치해 6․25전까지는 남한에 속했던 지역으로 남으로는 임진강, 서북으로는 예성강을 끼고 있고, 북으로는 천마산, 수룡산, 대둔산, 화장산 등의 산지와 서남지역엔 풍덕평야, 삼성평야, 신광평야 등 비옥한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음. 개성의 면적은 약1,200㎢이며, 인구는 372,000명(1987년)이다.
행정구역은 개성시와 개풍군, 판문군, 장풍군 등 1시 3군으로 구성돼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철원에서 즉위한지 2년 후 919년 수도를 현재의 개성으로 옮긴 후 개성군과 송악군 2군을 합쳐 개주라 일컫고, 1392년 패망할 때까지 고려 475년 동안 한반도의 중심도시로 성장시켰다. 왕건은 본관이 개성이고, 이곳의 금성태수 왕융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개성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여 왕조의 수도로 이곳을 정했다.
개성의 건물들은 규정에 따라 도시계획에 맞도록 정연하게 건설돼, 대로변의 집들은 처마를 길가로 여섯자씩 뽑아내어 사람들이 눈비를 맞지 않고 다닐 수 있게 하였다.
건물들, ''도시계획'' 규정 따라 정연하게 건설…처마 뽑아 눈비 안맞고 통행 가능조선초기 도읍을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하면서부터 고려왕조의 고도는 쇠퇴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왕조에 대한 주민들의 반감에 대응해 조선초기에 한동안 조정에서는 ''''개성인종신금지령''''을 내려 과거에도 응시 못하게 하고 세금을 박탈해 경제적으로 곤궁에 몰아 넣었다. 그리하여 개성인들은 생업을 위해 각지로 떠돌아 상업에 종사하여 상인으로 생활하였기 때문에 유명한 ''''개성상인'''', ''''송방(松房)''''이란 말이 나왔고, 경제적 내핍생활 때문에 ''''개성깍쟁이''''라는 말이 탄생하였다. 개성사람들이 상업에서 특기를 발휘하여 서양보다 500년이나 앞서 복식부기법을 써왔고 신용과 상호부조로 계(契)가 발전하였다. 이런 전통으로 일제시대 ''''개성상업학교''''는 유명하여 전국의 은행과 회사에서 재정, 상업분야에는 이 학교 출신이 많았다.
개성은 서울에서 50km 정도로 1시간 이내의 거리이고, 평양까지는 180km로 3시간이 걸린다. 도로는 비교적 잘 발달돼 있고 주요도로는 대부분 포장되어 있다. 개성에서 평양까지는 1992년 김일성 80회 생일인 4월 15일에 맞춰 완공한 ''''평양-개성 고속도로''''가 매우 유용한 교통수단이다. 이 도로는 북한 최초의 아스팔트 4차선 도로로 중앙 분리대가 있으며 전장 160km로 노면상태도 양호해 평양까지 승용차는 1시간 30분, 버스로는 두시간 정도 소요된다. 휴게소는 개성북방 70km 지점에 서흥휴게소가 있다.
그밖에 개성일대의 주요관광지로 통하는 포장도로가 있으며, 해주․배천․평천 등 주요도시로 연결되는 도로망이 비교적 잘 발달돼 있다.
<고려박물관>고려박물관>
개성시 방직동에 있는 고려시기의 역사와 경제, 과학문화 의 발전모습을 보여주는 1,000여 점의 유물들이 진열되 어 있는 박물관.
고려성균관의 명륜당, 대성전, 동재 서재, 동무, 서무, 계 성사, 존경각, 향실 등 18동에 해당하는 건물들과 그 주 변에 역사 유물들을 진렬함으로써 이 일대가 관내 및 야외 전시를 겸한 특색 있는 박물관으로 꾸려지게 되었다.
박물관의 기본 진열실은 4개의 관으로 구성되어 있고, 동무에 꾸려진 1관에는 우리나라의 첫 통일국가인 고려의 성립과 그 발전역사를 보여주는 유물자료들이 진열되어 있다. 대성전에 꾸려진 2관에는 고려시기의 과학문화발전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계성사에 자리잡고 있는 3관에는 개성시 박연리 적조사터에서 옮겨운 적조사쇠부처 등이 전시되어 있다.
서무에 자리잡고 있는 4관에는 고려시기의 금속공예, 건축, 조각, 회화의 발전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고려박물관 야외전시구역에는 불일사5층탑(951년), 흥국사탑(1021년), 현화사7층탑(1020년), 현화사비(1022년), 개국사돌등(935년), 원통사부도를 비롯한 고려시기 돌조각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활쏘기터, 그네터, 널뛰기터, 씨름터 등 민족경기와 민속놀이를 할 수 있는 제반시설들이 꾸려져 있다.
북한문화재 사적 제50호로 송악산 동쪽에, 개서 중심부에서는 북동쪽 2km 지점에 있는 고려시대 최고의 교육기관인 성균관이 있다. 성균관은 992년 창설된 국자감의 후신으로 1089년 국자감이 이 자리에 이전하고 1310년에 성균관으로 개칭했는데, 국자학․대학․시문학․율학․서학․산학 등 6개학과가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학으로 그 역사적 가치가 무엇보다도 크다.
고려시대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고(1592년) 현재 건물은 1602~1610년에 지은 것으로 12동의 기본건물과 6동의 부속건물에 70,000㎡의 부지가 있으며 돌담장으로 둘러친 장대한 규모이다. 성균관은 크게 명륜당과 대성전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 명륜당은 강의실이고 대성전은 유학자와 선현들을 제사지내던 곳이다.
박물관의 국보유물로는 청자봉항구름무늬박이대접․청자학꽃무늬박이접시․불일사5층탑 내의 5층과 9층짜리 금동탑․청자접시․청자보시기 등이 있다. 박물관 구역 내에는 12동의 성균관 기본건물, 6동의 부속건물, 3동의 신축건물이 있는데 전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1전시관 : 고려창립과정을 보여주는 유물 ․ 고려시대 개성지도 ․ 만월대모형 ․ 왕궁터의 유물
▷ 제2전시관 : 세계적 자랑거리인 고려유물 ․ 고려청자 ․ 금속활자 ․ 목판 ․ 천문기상자료
▷ 제3,4전시관 : 고려의 건축 ․ 미술품 ․ 공예품 ․ 공민왕릉 벽화(12지신상)
▷ 야외전시장 : 불탑, 민속경기장, 석등, 비석, 불탑 등이 있음
<■ 개국사 석등> 개성 덕암리(동흥동)에 있던 개국산즌 935년 창건된 고려 10대 사찰의 하나였는데 조선시대에 폐사가 되어 거대한 석등만 남게 되었다. 이 석등의 방형 하대석의 한 변 길이만도 1.92m이고 중대석의 기둥돌의 높이가 4m나 된다. 상대석 위에는 네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옥개석을 얹고 꼭대기에는 둥근 보주를 설치한 고려석등의 걸작이다.
<■ 헌화사 7층 석탑> 개풍군 월고리 영추산 밑의 현화사터에 있던 탑으로, 고아로 자란 현종이 즉위한 후 부모를 위해 1020년에 세웠다. 높이 8.64m의 현화사7층탑은 기단과 탑신, 탑머리가 양호한 상태로 세부 조각이 정교한 걸작이다. 국보급문화재 제41호로 지정 되었다.
<■ 헌화사비> 현화사의 내력을 기록한 사적비로 화강석으로 된 귀부와 대리석으로 된 비신, 이수가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2,400여 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음. 조각기법이 섬세하고 예술성이 높은 국보급문화재 제40호.
<■ 흥국사 석탑> 이 탑은 만월대 동남쪽 흥국사에 있던 탑으로 강감찬 장군의 발원에 의해 1021년에 나라의 안녕을 위해 세웠짐. 원래는 5층탑이었으나 현재 3층만 남아있음. 보물문화재 제31호로 지정.
<■ 불일사 5층 석탑> 이 탑은 원래 불일사 금당 앞에 있던 것으로 951년 세워졌으며 1960년에 이곳으로 옮긴 것임. 보존상태가 양호, 체감율이 적당하여 매우 안정되고 간결한 미를 보여주고 있음.
<선죽교>선죽교> 
자남산 남쪽, 숭양서원 아래에 있는 자그마한 돌다리.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방원에 의해 살해된 곳으로 처음 1216년 이전에 다리를 만들었을 때는 선지교라 불렀다 가 사건 후 다리에 핏자국이 없어지지 않고 주위에 충 절을 뜻하는 대나무가 돋아 선죽교로 개칭.
다리의 길이는 6.67m이고 너비는 2.54m인데 원래는 난간이 없었으나, 1780년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둘러 보호하고 옆에다 돌다리를 하나 더 놓았음. 이성계가 정몽주의 의중을 타진하기 위해 이방원을 시켜 저녁식사에 초대한 다음 방원은 정몽주의 의중을 떠본 후 선죽교에서 타살하고 뒤 따라온 정몽주의 녹사 김경조 마저 죽임.
<선인비>선인비> 정몽주의 충절을 기려 1641년에 세워진 선죽교 옆 비각 안에 있는 비석. 항상 비석이 젖어 있어 사람들은 정몽주의 죽음을 슬퍼하여 비석이 울고 있다고 함.
<하마비>하마비> 선죽교와 마주한 길 옆에 있는 비석. ''''하마비''''란 정몽주를 추모하여 이 앞에서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란 뜻.
<■ 표충비> 선죽교와 큰길 사이에 있는 건물 안 두개의 비석, 왼편 것은 1740년 영조때, 오른편은 1872년 고종 때 세움. 비석들은 거북잔등에 세워져 있고 처마돌에는 용틀임 조각이 되어 있어 조각이 매우 아름다움. 비신에는 왕들의 친필이 새겨져 있는데 조선의 왕으로서 고려의 충신을 찬양하기 보다는 백성들에게 보편적 의미의 ''''충성''''을 교화하기 위하여 세운 것임.
<박연폭포>박연폭포> 
개성에서 북으로 24km지점 박연리 대흥산성 안에 위치 하고 있으며 천마산과 성거산 사이를 흐르는 계곡물이 북쪽 계곡을 따라 흐르다가 못을 만들고 그 아래로 37m 높이의 폭포를 이루고 있다. 폭포 위에는 박연이란 연못 이 있고, 폭포 아래에는 직경 40m의 고모담이란 바위연 못이 있음.
이 고모담이란 명칭은 옛날 박가성을 가진 총각이 못 가 운데 바위에 앉아 피리를 불다가 용녀와 만나 사랑하게 되고 용녀를 따라 용궁에 가게된다. 총각의 어머니가 용녀를 따라 물속에 들어가는 아들을 만류하다 슬피울며 못에 빠져 죽었다. 이때부터 어머니가 빠져죽은 못이라 하여 ''''고모담''''이라 부르게 되었다. 북한 천연기념물 지리부문 제388호이다. 폭포 옆에는 법사정이란 정자가 있는데 전망이 매우 좋다
<공민왕릉>공민왕릉> 
개성 중심부에서 서쪽으로 13km 떨어진 개풍군 해선리 봉명산 문선봉 아래에 있는 이 무덤은 쌍분으로 왼편이 고려 31대 공민왕의 현릉이고 오른편은 사랑하는 부인 노국공주의 정릉으로, 풍수지리상 명당에 위치하는 고려 시대의 대표적 능표이다.
이 무덤은 남한에서 주로 보는 조선시대의 왕릉과는 달리 3개의 층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점이 특징이며, 봉분의 높이는 6.5m이고 각 봉분에는 12각의 병풍석을 돌리고 12지신상과 연꽃무늬를 섬세하게 조각하였다.
봉분 앞으로는 첫 번째 단에 한쌍의 상석과 호랑이와 양의 석조각, 한쌍의 망주석이 있고, 두 번째 단에는 두쌍의 문인상과 한쌍의 석등, 세 번째 단에는 두쌍의 무인상이 도열해 있는데 이들 조각상은 한국 능표조각의 걸작이라 하겠다. 그 아래에는 제장자리인데 원래 터만 있었지만 1989년 복원되었고 내부에는 무덤모형과 벽화가 전시되어 있다.
무덤의 구조는 연도와 현실로 이루어진 단실묘인데, 현실의 크기는 약 3m의 사각형이고 높이는 2.29m이다. 현실 내부에는 뛰어난 화가이기도 한 공민왕이 그렸다는 12지신상이 배치되어 있다. 북한 국보급문화재 제39호이다.
<왕건왕릉>왕건왕릉> 
개성시 중심부에서 북쪽으로 6km지점 고속도로 옆 해선 리의 만수산 자락 고속도로 왼편에 있는 고려 건국시조 왕건과 왕비 신혜와 후 무덤은 자신의 뜻대로 검소하게 만들어졌다. 이 왕릉은 1994년 김일성의 지시로 왕건탄 생 1117돐을 기념해 새롭게 단장되었다. 총 넓이는 55,000㎡로 3단축조의 웅장한 무덤과 그 앞에 문무관의 석인상, 호랑이와 양을 비롯한 석조군상으로 위용을 이루고 있으며 능문과 제당도 갖추어져 있다. 능문 앞에는 김일성의 친필로 ''''고려태조왕건왕릉개건비''''가 세워져 있다. 특징은 무덤 안을 직접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으며 능 앞의 넓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점이다. 근래 왕릉에서 청동의 왕건조각상이 출토되어 세인을 놀라게 했는데 우리나라에서 보기드문 등신대의 인물조각상으로 연구의 가치가 높다. 북한 사적 제53호이다.
<영통사>영통사> 
1027년(현종 18) 창건되었으며, 고려 왕실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어서 인종을 비롯한 여러 왕들이 자주 행차하여 분향하였으며, 인연이 있는 왕들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진영각이 있었다. 대각국사 의천(義天)도 이곳에서 교관 (敎觀)을 배웠으며, 입적한 후에는 그의 비가 이곳에 건립 되엇다. 문화재로는 보물급문화재 제36호인 영통사대각국 사비(靈通寺大覺國師碑), 제37호인 영통사당간지주, 제35호인 영통사동삼층석탑, 제38호인 영통사서삼층석탑, 국보급문화재 제 37호인 영통사오층탑이 있고, 보광원, 중각원, 숭복원 등이 있다.
<■ 영통사 각국대비> 1125년에 세워진 고려시대 의천대사의 비. 의천은 불교경전인 ''''속장경''''을 출판하는데 기여한 공로로 왕에게 대각국사란 칭호를 받음. 이 비는 밑에 바닥돌을 한 벌 깔고 그 위에 거북받침을 하였으며 비의 높이는 4.32m.
비문에는 1086년부터 4,769권에 달하는 1,000여 종의 많은 책을 출판하는데 기여한 의천의 경력과 비를 세울 때의 공사관계자들의 이름이 밝혀져 있음. 이 비는 고려시기 출판기술과 건축술, 조각술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 제공.
<영통사 당간지주>영통사> 불교의 장기를 걸어두던 돌지지기둥임. 고려초 영통사를 지을때 세운 것으로서 구조는 간단하나 규모가 크고 견고하여 웅장한 느낌.
<■ 영통사 3층석탑> 영통사에 있는 세 탑 가운데 5층탑의 동서쪽에 각각 있는 3층탑. 탑의 전체 높이는 동삼층탑이 4.42m 이고, 서삼층탑이 4.13m이며 고려 초기 탑의 특징을 보여줌.
<■ 영통사 5층탑> 고려초기의 탑으로 추정되며 영통사동삼층탑과 서삼층탑을 좌우에 두어 가운데 위치함.
모서리 기둥을 돋우새긴 가운데돌과 평평하게 유달리 넓은 갑돌로 이루어짐.
<개성민속 여관>개성민속> 
개성남대문에서 북쪽으로 얼마되지 않은 곳에 위치한 개성민속여관은 단독건물이 아니라 이곳의 조선시대 전통 가옥단지를 여관으로 꾸민 곳이다.
1989년에 외국인들에 게 우리의 전통생활을 체험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설치된 이곳은 1호동에서 19호동까지 19채의 건물에 100여 개의 방이 있는데, 4․6․8․16․19호동에는 1등실과 2등실이 있고 나머지는 3등실로 되어있다.
여관구내는 합각지붕의 단층건물이 실개천을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입구에는 접수실과 기념품상회도 있다. 실내에는 침대는 없고 모두 전통온돌에서 우리의 전통생활방식대로 생활하게 되어 매우 뜻있고 흥미있는 체험을 할 수 있다.
부대시설로는 50여명 수용이 가능한 민속식당과 반상기로 유명한 백송식당이 있는데, 백송식당은 100여명 수용이 가능하다.
<통일관>통일관>

남대문 바로 뒤 자남산 오르는 입구에 있는 대규모의 민 속요리 식당으로 2층 전체에 300명 수용이 가능하며 개 성정식(반상기)․개성보쌈김치․인삼닭곰․개성약밥 등을 맛 볼 수 있다. 주변에는 뒤쪽으로 김일성주석 동상과 좌측 으로 개성백화점, 우측으로는 개성학생소년궁전이 조망 가능하다.
<영통식당>영통식당>2004년 준공된 2층 규모의 현대식 건물, 150~170명 수용가능하며, 주변에 숭양서원 및 선죽교가 위치함. 영통사 개보수에 맞춰 2004년 준공된 신축건물로 개성시내 중심에 있어, 주요 관광지로 이동이 용이하다.
CBS 경제부 이재웅 기자 leejw@cbs.co.kr (자료제공: 현대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