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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가면 뭐합니까?" 조선에 남은 일본인 아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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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일반

    "일본 가면 뭐합니까?" 조선에 남은 일본인 아내들

    • 2005-08-15 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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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인 남편따라 해방뒤 한국에 남은 일본인 아내들의 고단한 삶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지 열흘째되던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 일왕은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성명을 발표했다. 그 뒤 식민지 조선에서 살고 있던 70여만명의 일본인들에게는 총인양(總引揚, 全 일본인들의 귀국조치)명령이 내려졌다.

    일본의 작은 현 인구와 맞먹을 정도로 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에 정착해 살고 있었지만 이같은 명령에 따라 삽시간에 밀물처럼 일본으로 빠져 나갔다.

    하지만 일부 일본인 여성들은 조선인 남성과 결혼해 자식까지 낳았기 때문에 일본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들 재한(在韓) 일본여성들은 한국전쟁과 6,70년대 궁핍의 세월을 온몸으로 겪으며 보통의 한국민들처럼 지난 60년을 고생스럽게 보냈다.

    한국과 일본 어느 곳에도 쉽게 정착할 수 없었던 환경과 여성이라는 또다른 굴레때문에 오히려 여느 한국사람들보다 더 큰 고통을 맛봐야 했다.


    내 이름은 ''이장자(李璋子)'' 또는 ''마쓰모토 아키코(松本璋子)''

    경기도 광주시에 사는 마쓰모토 아키코(81) 할머니는 고향이 평양이다. 일본군이었던 아버지가 조선에서 근무했기 때문이다.

    6살 되던 해 서울로 이사와 용산에 터잡은 아키코 할머니는 ''조선운송회사''에 타자수로 근무하며 같은 직장에 다니던 조선인 박씨와 해방전 결혼했다.

    "똑똑하고 잘생겨서 결혼하려 했지만 집안 반대가 심했어요" 부모님들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앞길에도 지장이 많다''는 이유로 동생들도 조선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

    하지만 남편과 무작정 동거에 들어가 아기까지 낳게되자 부모님들도 할 수 없이 결혼을 허락하게 됐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연락을 주지 않을 정도로 결혼 이후에도 친정식구들은 냉담했다.

    사는 것은 괜찮은 편이었다. 특히 해방뒤 일본친척들이 버리고 간 집이며 집기들을 인수받아 남부럽지 않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북한군에 잡혔을 때 ''죽었구나'' 생각…청각장애인 노릇끝에 풀려나

    북한군의 파죽지세에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하는 바람에 청량리 근처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이제 죽었구나'' 인민군에 의해 사람들이 처형당하는 장면을 직접 보면서 아키코 할머니는 생각했다. 일본인인데다 유산계급이었던만큼 살 확률보다 죽을 확률이 더 커보였기 때문이다.

    그때 ''청각 장애인인 척하라''는 한국 친척의 말이 생각났다. 그 뒤부터 청각장애인 흉내를 냈고 효과가 있었던 탓인지 며칠 뒤 풀려났다.("사실 총소리가 들릴 때마다 움찔거리는 바람에 인민군에게 들통난 적이 있었는데 불쌍해 보였는지 그냥 넘어가더라고")

    전쟁뒤 먹고살 길이 막막했던 아키코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함께 용산 미군부대 근처에 세탁소를 차렸다. 세탁소가 기반을 잡자 할머니는 미용기술을 배워 세탁소 옆에 미용실을 냈다.

    아키코 할머니가 일본을 다시 찾은 것은 한일 국교정상화 뒤인 68년에서였다. 그러나 일본도 아키코 할머니에게는 조국이기보다 낯선 외국일 따름이었다. 조선에서 나고 한국사람과 결혼해 한평생을 한반도에서 살아온 할머니에게 음식부터가 맞지를 않았다.

    "나는 일본 싫어. 음식도 안맞고 친구도 없고"

    한국과 일본 가운데 어느 나라가 좋은지 묻자 아키코 할머니는 서슴지 않고 한국을 선택했다. 그러나 이런 할머니도 일본에게 끌릴 때가 있다고 한다. 스포츠 시합만 있을 때면 겉으로는 한국을 응원하지만 속마음은 일본이 이기기를 바란다고.

    "손자들한테는 ''한국이 이겼으면 좋겠다''고 말해요. 그런데 속마음은 일본에 가있더라구요. 다른 건 다 일본이 싫은데 스포츠만큼은 안그래요. 이상하죠?"


    "한국인 남편 구타 못이겨 도망쳐 나왔어요…자식들도 안찾아 혼자 삽니다"

    일본 삿포로가 고향인 아오키 츠네(靑木ツネ. 78) 할머니.

    츠네 할머니는 45년 해방직후 조선인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다.

    태평양 전쟁말기 일본 남자들은 모두 징용에 나가는 바람에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던터라 집 근처 채석장에서 일하던 조선인을 남편으로 맞았던 것.

    그러나 종주국 일본과 식민지 한국의 사정은 천양지차였다.

    일본 친정집은 목욕탕과 수세식 화장실이 집안에 있던 수준이었다. 하지만 전북 진안의 시댁은 화장실 휴지도 없어 새끼줄로 닦아야 할만큼 ''찢어지게'' 가난했던 한국의 시골집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다.

    여기에 한국전쟁까지 밀어닥쳤고 이 와중에 젖먹이 셋째 아들이 죽었다.

    "먹을 것도 없지 젖도 안나오지. 아침에 일어나보니 막내 아들이 눈을 뜨고 죽어 있더라구요. 그때 심정으로는 큰 아이들도 죽었으면 하는 심정이었어요. 죽으면 배는 곯지 않으니까요"

    여기에 남편의 손찌검까지 도지기 시작했다. 술만 먹으면 주먹을 휘둘렀다. 남편의 구타를 참다못한 츠네 할머니는 결혼 6년만에 아이들을 남겨놓은 채 남편에게서 도망쳐 나왔다.

    전쟁통에 피란민들을 따라다니며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다라이 장수''도 했고 이발소에 취직해 남자들 머리도 감겨주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츠네 할머니는 그 뒤 20년동안 전국을 떠돌며 생활했다.

    지난 70년 일본으로 영주귀국하려 했으나 일본 대사관에서 한국인 남편과 이혼을 해야만 귀국할 수 있다는 말에 이혼도 시도해봤다. 그러나 시댁에서 이혼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한국에 눌러 앉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뒤 뒤늦게 상봉한 둘째 아들과 전라도에서 살며 식당도 해봤지만 아들이 행패를 부리는 바람에 지난 82년 도망치다시피 서울로 다시 올라와 여지껏 혼자 살고 있다.

    츠네 할머니의 수입은 ''재한 일본인 부인회''인 부용회에 나와 잡일을 해주거나 주택가 쓰레기를 줍고 동사무소로부터 받는 10여만원이 고작이다. 한국 국적임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이 있다는 이유로 ''기초생활 수급자''로도 선정되지 못했다.

    ''이렇게 살바에야 일본에 가는 편이 낫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일본가면 뭐할꺼야? 가기 싫어. 김치도 먹고싶고"

    이들은 한국인일까, 일본인일까, 아니면 영원한 이방인일까?

    노컷뉴스 이기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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