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이 20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중소기업인과의 대화에서 참석자 발언을 듣으며 자료를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이재명 대통령이 '고용 유연성'과 '사회안전망' 확충을 맞교환하는 방식의 노동시장 구조 개편 구상을 제시하며 사회적 대타협에 시동을 걸었다.
노사 간 오랜 불신을 덜고 선순환 구조를 만들자는 취지지만, 노동계와 학계에서는 국내 현실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두터운 복지 체계와 높은 단체협약 적용률 등 사회적 보호막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북유럽식 '고용 유연안정성' 모델을 섣불리 도입할 경우, 열악한 일부 노동자들의 고용 불안만 가중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유연성은 기업에, 안정성은 노동자에"…李, 사회적 타협 제안
이재명 대통령이 19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제1기 출범을 맞아 청와대에서 열린 노동정책 토론회를 마친 뒤 노사정 공동선언문을 든 김지형 경사노위 위원장을 비롯한 참석자들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지난 19일 청와대에서 열린 새 정부 경제사회노동위원회 1기 출범식 및 노동정책 토론회. 이 대통령은 노사 간의 오랜 불신을 짚으며, 기업이 원하는 고용 유연성을 일정 부분 수용하는 대신 튼튼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이 대통령은 "기업 입장에서는 정규직으로 뽑아놓으면 꼼짝 못 하고 유연하게 상황에 대응하기가 어려운 상황을 겪게 된다. 그래서 정규직으로 아예 안 뽑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노동계가 고용 유연성을 일부 양보하는 대신 사회안전망을 튼튼하게 갖추고, 그 비용은 고용 유연화로 혜택을 보는 기업이 부담하는 방식으로 선순환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일방적 추진에는 선을 그었다. 이 대통령은 "누군가의 일방적 희생, 누군가의 손실로 가지 않게 하는 게 바람직하다"며 사회적 타협을 통한 접근을 강조했다.
사실 이 대통령의 이른바 '고용 유연화' 발언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9월 양대 노총 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같은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이 대통령이 가진 일종의 신념으로도 읽히는 대목이다.
100년 신뢰로 쌓은 '황금삼각형'…덴마크 모델의 작동 방식
이 대통령의 구상은 북유럽 국가들이 채택하고 있는 '고용 유연안정성(Flexicurity)' 모델로 귀결된다. 유연안정성 모델은 기업의 고용 유연성 요구와 노동의 소득 및 고용 안정성 요구를 동시에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대표적인 국가인 덴마크의 경우 유연한 노동시장, 관대한 사회보장체계, 효율적인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이라는 3요소가 결합한 이른바 '황금삼각형(golden triangle)'을 구축해 긍정적인 노동시장 성과를 내고 있다.
기업의 쉬운 해고, 즉 높은 고용 유연성을 보장하는 대신 실업급여의 소득대체율이 최고 90%로 높고, 최장 2년간 이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한다. 그나마 줄어든 게 이 정도다.
그렇기에 덴마크 노동자들에게 '해고가 곧 죽음'이 아니다. 오히려 '해고는 새로운 출발의 기회'로 여겨지기도 한다. 저소득층의 경우 높은 소득대체율을 국가가 보장하고, 교육을 통한 직업 전환의 기회 또한 적극적으로 주어진다.
"한국선 고용 잃으면 전부 잃어"…현실과의 간극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 일자리정보 게시판의 모습. 연합뉴스과연 우리도 덴마크처럼 될 수 있을까. 문제는 이러한 모델이 작동하기 위한 전제가 한국에는 충분히 갖춰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덴마크의 유연안정성 모델은 1899년 9월 대타협 이후 100년이 넘는 오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며 노사 간 상호 신뢰를 기반으로 형성된 산물이다. 이전 소득의 최고 90%가 보장되는 막대한 실업급여 재원과 높은 노조 조직률, 단체협약 중심의 보호 체계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단순한 도입은 섣부르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쉽게 말해 조세 저항이 강한 한국에서 막대한 재원을 마련할 수 있겠느냐는 문제와 함께, 노조를 혐오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될 수 있을지, 노사가 대립을 멈추고 사회적 대타협을 이룰 수 있을지 등 선행돼야 할 조건의 벽이 여전히 높다는 얘기다.
당장 토론회 현장에서도 현실의 장벽을 짚는 비판이 직접적으로 터져 나왔다. 한국노총 김동명 위원장은 이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고용이 유연한 노동자는 모든 것을 잃는다"고 우려를 표했다.
그는 "지금은 엄격한 해고 요건을 규정하고 있는 것 같지만, 현실에서는 정리해고가 굉장히 쉽게 일어난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아주 압도적인 대기업이 아닌 중소기업 이런 데서는 인사 압박이나 이런 것들을 통해서 구조조정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다"라며 현장의 유연성이 결코 낮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어 "사회안전망을 우리가 아무리 빨리 구축한다 하더라도 노동시장 내에서 정규직 일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의 수준만큼 만족시킬 때는 많은 세월이 걸릴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미 대거 외주화된 기형적 구조… 2차 시장 보호막부터 세워야"
위 기사와 직접적인 관련 없음. 연합뉴스이날 토론회에서 발제를 맡았던 한국노동연구원 박명준 선임연구위원 역시 CBS 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한국은 이미 기형적인 '한국식 유연안정성'이 정착돼 있다고 진단했다.
박 연구위원은 "우리의 유연성은 대대적인 외주화로 볼 수 있다"라며 "최대한 비정규직을 쓰고, 최대한 사내 하청을 쓰는 방식으로 간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당장 시급한 것은 소수의 대기업 정규직들에 대한 유연화가 아니라, 이미 대거 유연화시킨 사람들에 대한 안정성 등을 업그레이드해 주는 것"이라며 "지금 상태에서 해고를 쉽게 하자라는 식으로 논의가 흐르는 것은 과한 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대안으로 박 연구위원은 기업 단위로 파편화된 노조 체계를 지양하고 업종·직종·지역 중심의 초기업 노조로 교섭 단위를 넓혀야 한다고 제언했다.
아울러 최저임금 수준에 수렴해버린 2차 노동시장에 직무와 숙련, 경력이 반영되는 포괄적인 표준 임금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당장 민간 기업에 이를 강제하기 어려운 만큼, 정부가 공공부문에서부터 모범적인 노사관계와 임금체계 모델을 선도적으로 만들어 민간으로 유도해 나가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문제연구소 '해방' 오민규 연구실장 또한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는 노동조합 조직률이 높다는 것이 핵심적인 특징"이라며 "단체협약 적용을 받는 노동자가 대부분이니 최저임금법을 별도로 둘 필요도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노조 조직률이 낮은 한국의 현실을 거론하며 "제대로 된 단체협약의 보호라는 보장도 없는 상태에서 안전망만 조금 보완해 준다고 해고의 자유와 맞교환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2차 노동시장부터 보호"…선행 과제 강조
결국 이 대통령이 강조한 북유럽의 유연안정성 모델은 우리 사회가 장기적으로 나아가야 할 이정표일 수는 있지만, 당장의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섣부른 유연화 교환에 앞서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취약계층 노동자들을 위한 실질적인 방어막 구축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박 연구위원은 "좋은 일자리를 뜻하는 1차 노동시장의 온기를 줄이자는 논의보다는, 삭풍이 부는 시베리아가 돼 가고 있는 2차 노동시장을 어떻게 미지근하게라도 해줄 수 있느냐를 고민하는 게 우선"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