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더위처럼, 한미 관계도 숨 고를 틈이 없다. 무역 전선부터 기류가 심상치 않다. 트럼프는 "친구가 적보다 더 나빴다"며, 관세를 내든 합의를 하든 선택하라고 압박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3주 뒤, 관세 폭탄이 한국에 상륙할 수 있다.
'안보 무임승차론'도 다시 꿈틀대고 있다. 최근 트럼프는 한국의 주한미군 주둔 비용 분담이 "너무 적다"며, 100억 달러(약 13조7천억 원)를 다시 언급했다. 지금보다 9배를 더 내라는 것이다. 그다음엔 어쩌면 '주한미군 철수' 카드를 슬쩍 흔들지도 모른다. 사실 방위비는 시작에 불과하다. 한국의 안보 전략을 새로 짜야 할 '안보 청구서'가 곧 북상할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연합뉴스이 열기를 끊어내고 반전의 계기를 마련할 '마중물'이 절실한 시점이다. 한미 정상회담이 열린다면 좋겠지만, 당장은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런 만큼, 이재명 대통령이 추진 중인 특사단 파견이 그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트럼프 2기 백악관의 문턱이 더 높아졌다는 점이다. 자칫하면 "당신에겐 패가 없다"는 면박을 당할 수도 있다. 백악관의 관심을 끌 '메신저'나 '메시지'가 필요하다. 과거 '백악관에서 환영받은 한국인들'을 통해, 이번 특사단의 성공 조건을 찾아보자. 결국 이는 미국을 상대로 한국이 꺼낼 수 있는 유효한 카드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세 가지 사례가 있었다.
첫 번째는 트럼프 1기였던 2018년 3월, 문재인 정부 시절 정의용–서훈 특사단이다. 이들은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메시지를 들고 백악관을 찾았다. "비핵화 의지가 있으며, 핵과 미사일 실험을 중단하겠다. 트럼프 대통령과 직접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고무된 트럼프는 즉석에서 북미 정상회담 개최를 수락했고, 한국 특사단이 이를 직접 발표할 수 있도록 백악관에서 자리까지 마련해주었다. 한국이 북미 정상회담을 중재한 전례 없는 장면이었다. 북핵이라는 공동의 골칫거리를 '톱다운' 방식으로 풀어보자는 접근이었다. 정상 간 직거래와 파격 행보를 선호하는 트럼프 스타일을 정확히 읽어낸 맞춤형 제안이었다. 북미회담은 비록 미완으로 멈췄지만, 당시 고조된 한반도 긴장을 누그러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통령실 정의용 전 국가안보실장이 미국 워싱턴 백악관 웨스트윙 앞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면담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왼쪽은 서훈 전 국정원장. 오른쪽은 조윤제 전 주미대사. 연합뉴스두 번째 사례는 BTS다. 2022년 5월, 바이든 대통령은 아시아계 혐오 범죄 대응을 위한 '아시아계 미국인·하와이 원주민·태평양 제도 주민(AANHPI) 문화유산의 달'을 맞아 BTS를 백악관에 초청했다. BTS는 이 자리에서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일은 아니다"라며, 인종차별과 증오 범죄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코로나19 확산과 함께 아시아계를 겨냥한 증오 범죄가 잇따랐고, 이에 대응하는 특별법이 제정됐다. BTS는 미국 내 흑인 인권운동 '블랙 라이브스 매터'(BLM)와 관련해 약 12억 원을 기부하는 등 선한 영향력을 발휘해왔다. 미국 대통령이 주요 어젠다에 무게를 더하기 위해 한국 아이돌과 함께 '손하트'를 했다. 이런 한국의 소프트 파워는 이제 핵무기급 자산이다.
미국 워싱턴DC 백악관에 아시아인 혐오 범죄에 대한 대응을 논의하기 위해 초청된 방탄소년단(BTS)이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과 기념 촬영하고 있다. 연합뉴스세 번째 사례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다. 지난 3월, 그는 백악관 루스벨트룸을 찾았다. 트럼프가 먼저 악수를 청했다. 정 회장은 210억 달러(약 31조 원) 규모의 대미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입이 귀에 걸린 트럼프는 "아름다운 발표"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트럼프는 미국 제조업의 부흥을 외쳐왔다. 특히 반도체, 배터리, 모빌리티 등은 전략 산업으로 간주되며, 한국 기업이 발군인 분야다. 바이든 대통령 역시 재임 중 한화큐셀로부터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태양광 투자를 유치한 사실을 기회 있을 때마다 자랑해왔다.
백악관서 대미투자 발표하는 정의선 현대차 회장. 연합뉴스 한국은 패가 없지 않다. 문제는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가 된다는 점이다. 어떻게 꿰어야 할까. 국제 정세는 양육강식의 정글과 같고, 트럼프는 최상위 포식자처럼 행동한다. 흐트러진 퍼즐 판 앞에서 동맹들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반드시 정해진 자리에 조각을 올려 놓아야 하는 퍼즐 맞추기는 이제 잊자. 이미 판은 엎어졌다.
지금부터는 레고(Lego) 조립을 해야 한다. 우리가 쥐고 있는 블록 몇 조각을 어디에 끼워 넣을지, 창의적이고 입체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고정된 틀에서 벗어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달라진 미국과 함께 우리는 '집'을 지을 수도 있고, '우주선'을 만들 수도 있다.
이번 특사단은 우리가 가진 이 블록을 백악관이 탐낼 만한 무언가로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어디에 맞춰야 진정한 '윈-윈' 게임이 될지를 탐색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패가 없지 않다.
박형주 칼럼니스트 박형주 칼럼니스트
- 전 미국 VOA 기자, 『트럼프 청구서』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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