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언베일'-우리가 사랑하는 명품의 비밀(세이코리아)의 저자 이윤정 작가. 사진 백승조, 이 작가 제공에르메스, 샤넬, 루이 비통…
'명품(名品)''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가져보고 싶은 브랜드들이다. 길거리를 지나가면 한 번은 마주칠 수 있는, 이제는 '명품'이 흔해진 시대이지만 그래도 명품은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 베일을 한꺼풀 벗겨주는 책이 나왔다.
제목부터가 '언베일(UNVEIL)'이다. 저자를 보니 이윤정 전 노블레스 편집장.
대한민국 명품 시장의 성장과 변화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지켜봐왔다. 국내 대표적인 명품 잡지 '노블레스'에서 30년간 기자와 편집장으로 활동한 그는 럭셔리 브랜드가 국내에 진출한 초기부터 현재까지 '명품의 모든 것'을 취재하고 분석해 왔다. 수많은 럭셔리 브랜드의 본사를 방문하고 극소수만이 초대되는 VIP 행사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했으며, 이브 카르셀(Yves Carcelle, 1948~2014) 루이 비통 전 회장 등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의 CEO 등을 직접 만나 취재했다.
바로 그 이윤정 전 편집장을 직접 만나 '명품의 모든 것'을 인터뷰했다.
29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명품 매장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숏커트에, 센스있게 그 브랜드의 가방을 메고 나온 그는 책의 내용처럼 핵심을 쉽게 설명해줬다. 과연 35년 대한민국 명품史의 '산증인'다웠다.
이제 돌아보니, 나는 이 분야를 '잘 안다'기보다는 '꾸준히 지켜봐왔다'라고 말하는 편이 적절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럭셔리 브랜드 열풍을 지나 한국은 럭셔리 시장의 중심에 우뚝 올라섰고, 이제는 K-컬처와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가 동반 성장을 이뤄가고 있다. 나의 일은 그 역사의 현장을 목격하고, 기록하며, 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UNVEIL』은 그 가운데서 특히 럭셔리 브랜드의 활동과 제품이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과 어떤 케미스트리를 만들어왔는지,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관해 이야기한 책이다.
_6쪽 "책을 가장 썼던 이유 중에 하나는 제가 30년 동안 이 업(業)을 그래도 계속 바라보면서 이 '럭셔리 브랜드' 산업이 국내에서 어떤 식으로 발전해 왔는지를 좀 기록하고 싶었고 그리고 그들이 발전을 해오면서 우리 사회에 끼친 순기능이 많은데 그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2024 블루 북 컬렉션 '티파니 셀레스테' 봄과 가을 컬렉션 제품_1. 티파니 제공이 전 편집장은 '명품'이란 단어가 적절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는 "사실은 '명품'이라는 단어가 과연 '럭셔리 브랜드'에 적합한지에 대한 개인적인 의구심이 있었다"며 "외국에서 들어온 값비싼 물건인데 뭔가 통칭을 하려니 '럭셔리 브랜드'라고 하기에는 너무 영어라서 어느 순간부터 명품이라고 부르게 됐는데 그 용어가 좀 과하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뭔가 명품 하면 마스터피스(masterpiece, 걸작, 명작), 피카소의 그림 등을 생각하게 되는데, 소비재인데 물론 명품이라고 불릴 만한 훌륭한 것도 있지만 그 안에서도 가격도 다 천차만별이고 브랜드도 여러 가지가 있기 때문에 그냥 럭셔리 브랜드는 모두 명품이다 하는 것은 적합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 이 전 편집장은 "용어 자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지 않나 생각이 좀 들었고 럭셔리 브랜드, 프레스티지 브랜드 제품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에르메스 H 아워_1. 에르메스 제공진정한 명품의 조건은 무엇일까?
이 전 편집장은 먼저 '탁월한 품질', '시간을 뛰어넘는 디자인', '견고한 브랜드', '역사와 유산', '희소성', '장인정신'을 조건으로 든다.
그 예로 전세계 여성들에게서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는 대표적인 명품 스테디셀러인 샤넬 CHANEL 2.55백과 에르메스 Hermes '버킨 백'을 들었다.
"그냥 가방 하나가 아니에요. 이건 버킨이라고요."
에르메스 '버킨 백'©Jack Davison. 에르메스 제공1993년, 나는 홀로 루이 비통의 '타이가 라인' 론칭을 취재하는 출장길에 올랐다. 한국의 모든 매체를 통틀어 오직 나만이 가는 출장이었다. 아직 애송이였던 나는 루이 비통에서 보내준 퍼스트 클래스 티켓과 일정표를 확인하자마자 당황했다. 5박 6일의 일정 중 행사 취재는 단 하루였고, 나머지는 여러 장소를 방문하거나 레스토랑에서 점심과 저녁 식사를 하는 일정이었다.
'이러면 대체 뭘 취재하라는 거지?'
_69쪽브랜드는 왜 매출과 직결되는 제품 대신 특별한 경험을 고객에게 제공하는 것일까? 이는 브랜드가 고객의 취향을 다면적으로 심도 있게 분석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호화로운 경험'은 물론 여전히 VIP 서비스의 기본이지만, 날이 갈수록 높아지는 고객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서는 '독창적인 경험'의 개발이 필요해졌다. 어느 화장품 브랜드의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에는 고객 서비스가 '보상'에 의미를 두다 보니 보상의 감정을 크게 느낄 수 있는 '호화로움'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럭셔리 브랜드의 소비는 VIP와 브랜드의 '지속적인 관계'가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소비자가 공감할 수 있고 기억에 남는 경험이 더욱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_165쪽극소수만이 초대되는 VIP 행사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석했던 경험도 궁금했다. 어떤 고객들이 초청되고 행사는 어떻게 진행될까?
이 전 편집장은 "VIP 서비스라는 게 단순히 '이제 이 사람한테 비싼 거 하나 팔았으면 됐어'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교류를 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그분들한테 뭔가 그 어떤 '울타리' 같은 느낌으로 주고 싶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 판매하는 관계를 '넘어선' 관계라는 이미지를 주고 싶으니 하우스의 안쪽으로 초대하는 느낌 같은 것을 줘서 소속감을 느끼게 해주려는 의도가 훨씬 많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명품 시장의 성장에 따라 한국의 VIP가 또 그만큼 중요해졌다.
VIP 행사에 초대되는 고객들은 탑5 안에 드는 제일 많이 구매했던 고객이나 앞으로 많이 살 고객을 대상으로 한다. 행사에선 새로 나온 하이 주얼리를 제일 먼저 보여주고 선택권도 준다. 하이 주얼리는 여러 점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선택권을 맨 처음에 주고, 그 다음에 브랜드를 느낄 수 있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하게 해 주는 것이다.
2024 블루 북 컬렉션 '티파니 셀레스테' 봄과 가을 컬렉션 제품_2. 티파니 제공주얼리를 만드는 공방을 직접 간다든가, 우리가 이런 걸 이렇게 만든다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기도 하고 CEO 등을 만나 컬렉션 출시 이유를 설명해주고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든가 등등 방법이 굉장히 다양하다.
실제 같이 동행했던 VIP들한테 행사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 재미있어 했다고 이 편집장은 전했다.
또한 실제 사용층들은 제품 자체를 더 예민하게 보고 실제로 사용했을 때 어떨까 이런 부분을 중시한다고 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럭셔리 브랜드의 CEO는 누구였을까?
이 전 편집장은 이브 카르셀 루이비통 전 회장을 꼽았다.
"처음 기자가 됐던 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봤는데 무라카미 다카시와의 협업 등 굉장히 많은 걸 시도하셨어요. 그래서 많은 브랜드가 요새 아티스트하고 많이 하는 협업을 많이 하게 됐어요. 96년에는 모노그램(루이 비통의 앞 글자인 L과 V를 결합해서 만든 로고)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헬무트 랭(HELMUT LANG), 비비안 웨스트우드(Vivienne Westwood), 마놀로 블라닉(Manolo Blahnik) 등 다른 브랜드의 디자이너 6명에게 모노그램을 활용한 작품을 의뢰해 전시하는 행사를 해서 취재를 갔었죠. 그분은 매출을 겨냥해서 한 게 아니라 우리는 이런 것도 할 수 있다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죠. 루이 비통은 굉장히 오래된 브랜드지만 우리는 정체되지 않은 브랜드라는 걸 알려주고 싶다라는 메시지를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루이 비통과 무라카미 다카시의 콜라보 제품_2 ⓒLouis Vuitton Mallertier-Monogram Multicolore est une creation de Takashi Murakami pour Louis Vuitton. 루이 비통 제공우리 명품 시장의 '폭풍 성장', 똑똑한 소비자
명품 시장의 '폭풍 성장'의 이유로는 '똑똑한' 소비자를 꼽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학습 능력이 뛰어나잖아요. 좋은 걸 보면 흡수력도 빠르고 이거보다 더 나은 건 없을까 이런 것도 많고 그러니까 굉장히 다양한 복합적인 요인이 서로 섞여면서 시장도 커지고 관심도 많아지고 그러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요. "2022년 우리나라의 1인당 명품 소비액은 전세계 1위에 올랐다.
이제 시장의 위상이 커지다 보니까 본사에서 우리나라를 대하는 태도 역시 달라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명품 소비 수준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높구나 그러면 이 사람들에게 좀 더 이렇게 섬세한 서비스도 하고 배려하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야 되겠구나 해서 대우가 훨씬 좋아진 거죠. K 컬처도 그렇고 아시아에서 트렌드를 선도하고 스마트한 소비자라는 걸 아는 순간부터 굉장히 더 배려를 많이 해 주는 거죠. 전 세계에서 신제품을 할 때 우리나라에서 제일 처음 론칭을 한다든가 아니면 우리나라 소비자가 좋아할 만한 특별한 거를 하나 만든다든가 이런 식으로 많이 하는 거죠. "
청담동에 쫙 늘어선 럭셔리 브랜드의 플래그십 스토어(Flagship Store)는 그 브랜드의 모든 상품을 파는 '그 브랜드만의 백화점'이다. 이 플래그십 스토어를 설치한다는 것은 본사 입장에서는 굉장한 투자다. 그 나라의 소비자에게 자신들의 상품을 다 보일 만한 의미가 있어야 플래그십을 열게 되는데그만큼 우리나라의 소비자의 수준이나 매출이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설명이다.
"지난 30년간을 이렇게 돌아보면 놀라운 게 단순히 사람들이 럭셔리 브랜드를 좋아한다, 매출이 높다의 개념이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 자체가 정말 드라마틱하게 변했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단순히 럭셔리 브랜드의 도입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이 들죠. " "어떤 한 제품이 들어온다는 게 그 제품의 사용법, 제품이 원래 갖고 있던 백그라운드까지 들어오면서 그게 그 상황에 맞춰서 라이프 스타일로 생활 양식으로 진화를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저는 많이 했어요."일례로 인터뷰가 진행됐던 명품 매장이 운영하는 카페에도 곳곳에 나무와 꽃이 있는 것을 보면서 명품 문화가 우리나라의 꽃 문화에도 영향을 줬다고 했다.
왜 명품을 선택하는가?
"샤넬을 소비하는 이유는 제품도 좋지만 아무래도 샤넬이 가지는 이미지 때문이죠."이 편집장은 "럭셔리 브랜드를 살 때 상징성도 있고 정말 '만듦새'가 좋아서 사는 것도 있다"며 "단순히 오래 쓰는 게 아니라 계속 써도 유행을 타지 않고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예쁘다'라는 강점이 있다. 어떤 럭셔리 브랜드는 정말 광고 문구가 과장이 아니라 대를 이어서 쓰는 것도 있다"고 했다.
"옛날에는 그냥 문구의 하나로만 생각했는데 제가 좀 써보고 오래 이 업(業)을 하다 보니 그게 가능한 브랜드가 있구나, 거짓말은 아니었구나라고 느껴지는 경우가 있죠."명품이 처음 들어오던 90년대에는 4,50대가 판매층의 중심이었다면 이제 연령층이 낮아져 30대 후반이 주축이 된 것도 큰 변화다.
또한 K팝, K뷰티의 성공으로 국내 스타의 명품 엠베서더(Ambassadorㆍ홍보대사)가 늘어난 것도 이 편집장에겐 감회가 남다르다.
'블랙핑크'의 제니는 샤넬의 엠베서더로, '블랙핑크' 리사와 영화배우 정호연은 루이비통, '블랙핑크' 지수는 디올, '블랙핑크' 로제는 생로랑의 엠베서더로 활동하고 있다.
루이 비통과 쿠사마 야요이의 콜라보 제품_2 ⓒLouis Vuitton Malletier. 루이 비통 제공'하이 주얼리'의 인기는 이어질까?
저자의 답변은 "그렇다"이다.
그는 하이엔드 시계와 하이 주얼리는 점점 더 잘될 거라고 전망했다.
"가장 중요한 건 주얼리를 바라보는 시각이 바뀐 것. 원석이 어떤 것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그 주얼리도 하나의 패션이고 내 기호의 하나라는 것도 생겼고, 선택할 수 있는 옵션도 많아졌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분들은 이왕이면 살 수 있게 됐다고 볼 수 있죠."
에르메스 아쏘 타임 서스펜디드. 에르메스 제공"여러가지 의미에서 럭셔리 브랜드를 즐겨 사용하시는 분들은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보다는 나만 할 수 있는 것, 그런 식으로 가고 있어요. 그리고 단순히 내가 입고 차리고 이런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라이프 스타일'로 취향이 다 들어가는 시대가 된 것. 그런 면에서 앞으로도 하이엔드 시계와 하이 주얼리의 인기는 이어질 것으로 봅니다."
이 전 편집장이 30년 간의 노하우를 집대성한 명품의 모든 것을 담은 저서 '언베일'은 세련된 초록색 표지부터 눈에 띄는 편집, 그리고 무엇보다도 쉽게 볼 수 없는 명품들의 귀한 사진도 '볼거리'다. 저자는 90여 점이 넘는 명품 사진을 싣기 위해 직접 각 브랜드사에 일일이 연락해 허락을 구했다.
2024 블루 북 컬렉션 '티파니 셀레스테' 봄과 가을 컬렉션 제품_3. 티파니 제공이윤정 전 편집장은 1993년부터 2023년까지 '노블레스'의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다. 제45회 한국잡지언론상 기자 부문을 수상했고, 럭셔리 브랜드에 관한 다양한 주제로 대학과 기업 등에서 강의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는 브랜드와 관련한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으며 DL㈜의 사외이사로도 활동중이다.
이윤정 작가의 신간 '언베일'-우리가 사랑하는 명품의 비밀. 세이코리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