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인공지능(AI) 지각변동이 점점 더 거세지는 판도에서 규제에 앞장섰던 유럽이 한발 후퇴했다. 파리 AI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은 규제·안전보다 투자·진흥을 내세웠다. 이같은 상황을 내다보지 못하고 각종 규제가 담긴 AI 기본법을 마련했던 한국 정부는 갈림길에 선 모양새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 "미친 규제 없애자"…위기감 고조
이번 파리 정상회의를 기점으로 'AI 규제'의 선봉장에 섰던 유럽이규제 완화 기조로 돌아섰다는 평가가 나온다.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파리 정상회의에서 "우리는 AI 규제를 단순화할 것이다. 유럽은 세계 다른 나라들과 다시 보조를 맞춰야만 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진 언론 인터뷰에서도 "일부 미친 규제를 없애고, 이를 둘러싼 환경을 단순화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며 규제 완화에 대한 입장을 확고하게 드러냈다.
앞서 유럽은 AI 규제를 줄곧 주장하며 전 세계 최초로 AI 규제 법안을 만들었다. 유럽연합 인공지능법(EU AI Act)가 AI를 위험 심각성과 발생가능성에 따라 4가지로 분류해 규제하는 게 골자다. 해당 법안의 전문에는 "인공지능 기술은 사람의 편의를 증진하는 도구인 동시에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이 크다"고 AI의 위험성을 전제하고 있다.
최근 AI 산업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위기감을 느낀 유럽이 '규제 지우기'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유럽은 2000년대 당시 인터넷 보급에 한 발 늦어지면서 유럽 전체의 산업경쟁력이 크게 위축된 뼈아픈 경험을 했다. 딥시크 출현으로 후발주자들도 충분히 AI 개발에 성공할 수 있다는 활로가 열린 것도 이번 변화에 한 몫했다는 분석이다.
유럽마저 규제 완화에 방점을 찍으면서, 안전이 중심이 됐던 AI 정상회의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취임하자마자 AI 안전과 관련한 행정명령을 폐기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 이어, JD 밴스 미국 부통령은 정상회의 선언문에 서명을 거부했다. JD 밴스 부통령은 정상회의 기조연설에서 "AI 부문에 대한 과도한 규제가 혁신적인 산업을 죽일 수 있다고 믿는다"라고 밝혔다.
한국은 규제 나섰지만, 시행령 마련 두고 '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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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AI 기본법을 만든 한국은 규제를 두고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이다. AI 기본법은 산업을 진흥하는 목적으로 제정 논의가 시작됐지만, 숱한 논의 과정 끝에 국회에 통과된 법안에는 결국 규제가 담기고 말았다. '딥시크 쇼크'로 AI 경쟁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시행령을 통해서라도 규제가 완화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고영향 AI'에 대한 조항이 대표적인 규제로 꼽힌다. AI 기본법은 크게 △국가 차원의 거버넌스 체계 정립 △인공지능 사업 체계적 육성 △인공지능으로 발생할 수 있는 위험 사전 예방 등으로 구성됐다. 이 중에서 사람의 생명과 안전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AI를 '고영향 AI'로 규정했다. 고영향 AI 모델을 개발한 사업자는 투명성을 입증해야 하는 등 높은 수준의 책무가 주어진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해당 조항이 AI 개발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IT 업계 관계자는 "고영향 AI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 더 과학적인 기준이 필요하다는 업계의 우려는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다"면서 "급작스럽게 딥시크 출현으로 진흥쪽으로 여론이 돌아서고 있어 시행령을 지켜봐야겠지만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내년 1월 법안 시행을 앞두고 담당 부처인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연구반을 운영해 시행령을 마련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기본법에 적시된 규제 조항을 지우긴 어렵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영규 한국인터넷협회 정책실장은 "시행령 연구반 안에 사업자를 대표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어 의견이 잘 전달될지 우려스럽다"며 "시행령에서 규제에 대한 기준을 마련한다고 해도 이미 기본 법령 안에서 규제의 틀이 생긴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