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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락 살락 일만"…고난 속 꿋꿋이 살아낸 4·3밀항인



제주

    "죽을락 살락 일만"…고난 속 꿋꿋이 살아낸 4·3밀항인

    편집자 주

    제주4·3 당시 군경의 총칼 앞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만 3만여 명. 도민들은 살기 위해 고향 땅을 떠나 일본으로 밀항했다. 먼 타국에서도 차별과 혐오에 맞서 꿋꿋이 삶을 살아냈다. 제주CBS는 일본 오사카 현지에서 70여 년 세월 '유령 같은 존재'였던 그들을 추적했다. 22일은 세 번째로 일본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최하층 일본인조차 꺼려하던 일을 했던 제주인을 보도한다.

    [4·3, 경계를 넘어서③]안주의 땅
    '일본 속 작은 제주' 오사카 이카이노
    최하층 일본인조차 꺼려하던 일 도맡아
    밀주 만들어 팔거나 16시간 중노동
    '외국인 등록증' 없어 숨어 지내기도
    고되고 위태롭지만…꿋꿋이 지켜낸 삶


    오사카 이쿠노구 코리아타운 인근 히라노운하. 재일제주인들은 운하 주변에 모여 살았다. 고상현 기자오사카 이쿠노구 코리아타운 인근 히라노운하. 재일제주인들은 운하 주변에 모여 살았다. 고상현 기자
    ▶ 글 싣는 순서
    ①살아남기 위해 일본으로…제주4·3 디아스포라의 비극
    ②4·3 피해 목숨 건 일본 밀항…적발되면 공포의 수용소로
    ③"죽을락 살락 일만"…고난 속 꿋꿋이 살아낸 4·3밀항인
    (계속)

    "여기서는 편하게 제주말 써도 된다."
     
    4·3 직후인 1950년대 황폐화된 제주를 떠나 일본으로 밀항한 강양자(82·여)씨가 오사카 이쿠노구에 도착하자 일행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이전까지 밀항인 신분이 발각될까봐 한국말을 쓰지 못했던 강씨는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강씨는 우여곡절 끝에 '안주(安住)'의 땅에 도착했다.
     

    일본 경찰만 보면 숨고 고된 일


    과거 이카이노(猪飼野)라 불렸던 오사카시 이쿠노구 코리아타운. 지금은 지도상에서 지명은 사라졌지만 이카이노는 '돼지를 기르는 들판'을 의미했다. 이름대로 오사카에서도 하층민이 사는 곳이었다. 일제강점기부터 4·3 이후까지 제주 출신 재일동포들이 모여 사는 '일본 속 작은 제주'다.
     
    재일제주인 김시종 시인은 '보이지 않는 동네'라는 시를 통해 이카이노를 이렇게 표현했다. '거기엔 늘 무언가 넘쳐나 / 넘치지 않으면 시들고 마는 / 일벌이기 좋아하는 조선 동네. / 한번 시작했다 하면 / 사흘 낮밤. / 징소리 북소리 요란한 동네. / 지금도 무당이 날뛰는 / 원색의 동네.'
     
    이카이노 거리에서 오물 수거 손수레를 끌고 가는 청소부 모습. 故 조지현 작가 사진집이카이노 거리에서 오물 수거 손수레를 끌고 가는 청소부 모습. 故 조지현 작가 사진집
    4·3 이후 생존을 위해 찾은 이곳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손이 늘 부족해 섬유‧고무‧유리 공장에서 일이라도 할 수 있었지만, 일제 패망 후에는 일본인조차 일거리가 없는 와중에도 제주 출신 재일동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최하층 일본인조차 꺼려하던 것이었다.
     
    고정자 오사카 한인 역사 자료관장은 "일제 패망 후 대륙에 있던 일본인이 대거 들어오면서 일거리가 부족했다. 일본인이 자처해 이전에 조선인이 해오던 험한 일을 맡았지만 제주인은 그것조차도 밀려나 화장실 똥을 푸거나 밀주를 만들어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설명했다.
     
    특히 밀항으로 일본에 온 터라 '외국인 등록증'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숨어 지내야 했다. 까딱하다가는 가족 전원이 공포의 오무라수용소에 수용됐다가 강제 추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4·3 당시 외삼촌 둘을 잃어 도피자 가족으로 몰리고 밀항을 택한 고춘자(82·여)씨는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 결국 일본 당국에 자수하고 체류 자격을 얻었다. 고씨는 자수 전까지 상황에 대해 "경찰만 보면 심장이 쿵쾅댔죠. 인도 한가운데로 걷지도 못하고 구석으로만 다녔어요"라고 기억했다.
     
    재일제주인 고춘자 씨. 고상현 기자재일제주인 고춘자 씨. 고상현 기자

    꿋꿋이 삶 살아낸 재일제주인

     
    낯선 일본 땅에서 고되고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제주인은 꿋꿋이 삶을 살아냈다. 일본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아왔지만, 사실상 일본 경제의 밑기둥을 지탱하는 노동력이었다.
     
    2011년 89세의 나이에 타계한 재일제주인 故 김춘해 씨는 80세까지 일본에서 미싱(바느질을 하는 기계) 일을 하며 자녀를 키워냈다. 서귀포시 중문리에서 태어난 김씨는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살다 해방 직전 제주로 돌아왔다. 고향 땅에서 4·3을 겪은 뒤 다시 일본으로 밀항했다.
     
    김씨는 생전에 '재일제주인의 생활사를 기록하는 모임'과 한 인터뷰에서 "남편은 기술자라 유리공장에서 일하고 나는 미싱가게에 가서 미싱 배워서 헵푸(샌들) 만드는 일을 했어. 아침부터 일해서 보통 일 마치면 새벽 2시야. 남편이 죽고 나서도 일했는데, 수십 년을 일했지"라고 회고했다.
     
    오사카 이쿠노구 '사랑방'에서 만난 김용례 씨. 고상현 기자오사카 이쿠노구 '사랑방'에서 만난 김용례 씨. 고상현 기자
    일본에서 태어나 제주로 온 뒤 해방 직후 다시 일본에 건너온 김용례(87·여)씨는 "그때는 일본도 먹을 게 없을 때라 다니면서 고철 주워다 팔았지. 나중에는 양복 시다바리(일 거들어 주는 사람) 일을 했는데 아침 8시에 가서 밤 12시까지 일해도 일당으로 150엔밖에 못 받았어"라고 했다.
     
    4·3 직후 어린 자녀와 함께 밀항한 박승자 씨(1922년생)는 제주4·3연구소에서 펴낸 '4·3과 여성 그 살아낸 날들의 기록'에서 "한복 만들어 장사해서 돈 벌었지. 일만 했지. 아이들 생일이나 수학여행 갈 때도 아무것도 못 해줬어. 허허 죽을락 살락 일을 해도…"라며 고된 과거를 떠올렸다.
     

    평생 일만 하느라…늦깎이 글공부


    지난 10월 16일 오사카시 이쿠노구 '사랑방'. 지금은 백발이 된 재일제주인 1세대들의 글공부가 한창이었다. 대부분 80대 이상의 할머니 20명 남짓이 모여 교사 안내에 따라 일본어로 적힌 십이간지 동물을 읽고 있었다. 한 할머니는 "내 띠는 우사기(토끼)야"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민간 교육시설이자 노인돌봄시설인 사랑방은 평생 일만 하느라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재일동포를 위해 2010년 문을 열었다. 방문자 대부분이 제주 출신 1세대들이다. 사랑방 곳곳에는 돌하르방이나 제주해녀들의 물질 도구인 '테왁' 등 제주를 떠올리게 하는 물품이 있다.
     
    사랑방 모습. 정귀미 소장(사진 가운데)이 할머니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다. 고상현 기자사랑방 모습. 정귀미 소장(사진 가운데)이 할머니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있다. 고상현 기자
    사랑방 정귀미 소장은 "어르신들이 과거 일본에 오셔서 어릴 때부터 일을 하셨다. 학교도 못 간 터라 일본말을 못해서 많은 고생을 하시고 차별도 받으셨다. 글자는 몰라도 사람으로서 존경해야 하는 훌륭하신 분들이다. 트라우마 치유와 자각을 위해 글공부를 가르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야학을 졸업한 어르신들이 계속해서 공부하고 싶다고 해서 사랑방 문을 연 거다. 이게 우리가 할 수 있는 효도이기 때문이다. 어르신들이 마지막까지 행복하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사랑방 입구 게시판에는 재일제주인을 기억하기 위해 제주에서 온 사람들의 글들이 적혀 있다. '어렸을 때 왜 일본에 친척이 있는지, 왜 그분들은 제주에 돌아오시지 않았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지금이야 이해가 됩니다. 재일제주인의 역사를 언제나 가슴 속에 간직하겠습니다.'

    사랑방 입구 게시판. 제주에서 온 도민이 쓴 글에는 '모든 재일제주인 선생님들께 감사드리고 재일제주인의 역사를 언제나 가슴 속에 간직하겠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고상현 기자사랑방 입구 게시판. 제주에서 온 도민이 쓴 글에는 '모든 재일제주인 선생님들께 감사드리고 재일제주인의 역사를 언제나 가슴 속에 간직하겠습니다'라고 적혀 있다. 고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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