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 기술연구원 황종연(오른쪽 다섯 번째) 그룹장이 23일 포항시 냉천 부지에서 태풍 힌남노 여파로 범람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김승모 기자경북 포항에 있는 포항제철소 3고로(용광로) 종합상황실에는 벽면 가득히 빼곡하게 자리 잡은 그래프와 숫자가 각종 설비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한쪽에는 고로에 연결된 풍구(바람길)의 모습이 디지털 화면으로 나타났다.
사무실이 아닌 3고로 현장에서는 출선구에서 눈부시도록 시뻘건 쇳물이 불꽃과 함께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분당 3톤에 달하는 1515도의 쇳물은 취재진이 서 있는 아래 '쇳물길'을 통해 다음 공정으로 이동했다. 발아래 깔려 있는 철판 사이의 작은 구멍으로 시뻘건 쇳물이 언뜻언뜻 보였고 내뿜는 열기도 그대로 전해졌다.
24일 포항제철소는 지난 9월 태풍 '힌남노'의 여파로 침수 피해를 입은 지 꼭 80일이 됐다. 전날 기자가 찾은 포항제철소는 차츰 일상을, 침수 이전의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포스코 관계자들은 이렇게 짧은 기간에 다시 가동하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포항제철소 3고로 출선 모습. 포스코 제공허춘열 압연부소장은 "30년 이상 근무했는데 이 공장이 내가 퇴직하기 전까지 살아날 수 있을까라고 생각했다"며 당시 심경을 전했다. 그만큼 피해 상황이 컸다.
일부 공정을 중심으로 차츰 정상 가동이 이뤄지고 있지만, 피해가 가장 컸던 압연 공장 일대는 당시 침수 상황을 알 수 있는 흔적들이 여전히 곳곳에 남아 있다. 특히 취재진이 찾은 2열연공장은 포항제철소가 연간 1350만톤을 생산하는 열연 제품 중 500만톤을 담당할 만큼 대표 생산 시설이지만, 아직 복구가 한창이다. 포스코는 다음 달까지 2열연공장을 비롯해 2선재, 2냉연 등 8개 공장을 추가 복구해 연내 15개 압연공장을 재가동한다는 계획이다.
2열연공장은 냉천이 범람하면서 가장 큰 피해를 봤다. 건물 내외부에 지상 1.5m 정도로 남아있는 '물때' 흔적은 당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특히 이 공장에는 길이 450m, 높이 8m 규모의 지하 1, 2층에 전기시설과 유압시설이 들어서 있는데 이 시설들은 흙탕물에 그대로 잠기고 말았다.
취재진이 둘러본 23일에도 진흙을 퍼내고 닦는 데 사용하는 작업 도구들이 한 곳에 가지런히 있었고 바닥에는 여전히 물이 흥건했다. 직원들을 통해 들은 당시 피해 복구 상황은 말 그대로 '사투'였다. 전기시설은 물론 화장실도 사용할 수 없어 물이나 음식을 최소량만 먹고 복구 작업에 나섰다고 한다. 일일이 장비와 전선 등에 묻은 진흙을 퍼내고 물기를 닦으며 말리는 작업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포항제철소 1열연공장 제품 생산 모습. 포스코 제공직원들은 처음에는 헤어드라이기와 온풍기로 전기설비 등을 말리다가 의류 건조기, 농가에서 쓰는 고추 건조기도 활용했다.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전기차 배터리에 소형 펌프를 연결해 물을 빼내기도 했다.
2열연공장에는 아직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폴리스 라인'처럼 '진입금지' 줄이 쳐 있다. 정상 가동까지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포항제철소 공장 곳곳에는 '복구 작업의 시작과 끝은 안전입니다', '설비 수리 전 에너지원(특히, 잔압) 제거 확인', '빠르게 보다는 안전하게' 등과 같은 현수막이 걸려 있다. 복구가 한창인 현장에서 혹시나 일어날 수도 있는 2차 안전사고를 방지하자는 의지다.
포항제철소 관계자들은 창사 이래 유례없는 피해를 입었지만, 복구하는 과정에서 많은 희망을 봤고 역량도 확인했다고 전했다.
포항제철소는 쇳물 생산을 멈출 만큼 초유의 사태를 맞았지만, 고로 휴풍 4일 만에 다시 3고로 출선을 성공적으로 해내며 큰 고비를 넘겼다. 이어 엿새 뒤에는 2고로와 4고로도 재가동시켰다.
포항제철소 1열연공장 제품 생산 모습. 포스코 제공간혹 불거졌던 직원 간 세대 갈등은 복구 과정에서 하나로 뭉쳐졌다. 20~30대 이른바 MZ세대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냈고, 고참 선배들은 그간 쌓아온 노하우를 전수하며 뜻을 모았다.
1열연공장 김지호 사원은 "물을 퍼내는 게 첫 번째 과제였는데 전기도 안 들어와서 각종 펌프류를 사용할 수 없었고 갑작스러운 풍수재해다 보니 자재 지원도 어려웠다"며 "물을 어느 정도 퍼내고 전기가 들어온 이후에는 저근속 직원들이 양수기나 수중펌프 작동 방법을 공장에 오래 계셨던 선배님의 노하우를 전수받으며 물 퍼내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최대 170톤에 달하는 압연기용 메인 모터를 수리하겠다고 나선 포스코 제1호 명장 손병락 상무보는 "건전한 실패를 용인해 주는 경영진과 자신을 믿고 지옥이든 천당이든 믿고 함께 걸어갈 동료들이 있어 자신이 있었다"고 말했다.
압연기용 메인 모터는 워낙 거대하기 때문에 분리해서 수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지만, 손 명장은 새로 제작하기보다는 수리하는 '심폐소생술'을 택했다.
포항제철소 2열연공장 복구 작업 모습. 포스코 제공결과는 현재까지 성공적이다. 압연기용 메인 모터 성능 복원 작업은 1열연을 시작으로 3후판, 2후판, 강편공장을 완료하고 지금 2열연공장에서 진행 중이다. 총 47대중 33대를 분해·세척·조립해 복구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나머지 모터 복구작업도 공장 재가동 일정에 맞춰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손 명장은 "침수 당시 전원만 확실히 차단돼 있었다면 설비를 살릴 희망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경영진이 (태풍에 대비해) 어떻게 생산을 전면 중단하는 전원 차단이라는 초유의 결정을 했을까? 나라면 그런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를 되뇌며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갔다"며 "이런 특단의 조치는 다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롭다"고까지 말했다.
포항제철소 2열연공장 복구 작업 모습. 포스코 제공김진보 선강부소장도 "공장 가동 중단이라는 경영진 지시에 나와 같은 '고로쟁이(고로장이)'들은 오버한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며 "지난 50여년 동안 한 번도 중단됐던 일이 없었던 고로 중지 결정이 (고로를 신속히 재가동하는데) '신의 한 수'가 됐다"고 설명했다.
그는 "30년 동안 쇳물만 보고 살아왔다"며 "자식과 같은 고로를 중지한 게 결과적으로 '제(내) 새끼를 살린 결정'이었다"고 덧붙였다.
한편 포스코는 국내 고객사 피해 최소화 및 시장 안정을 위해서도 적극 나서고 있다.
포스코는 포항제철소 제품을 구매하는 473개 고객사를 대상으로 수급 이상 유무에 대한 전수 조사를 실시하고, 수급 문제 발생 우려가 있는 81개 고객사에 대해 광양제철소 전환생산, 해외 사업장 활용, 타 철강사 협업 공급 등 일대일 맞춤형 대응계획을 수립하고 시행해 수급불안을 해소에 노력하고 있다.
포항제철소 2열연공장 복구 작업 모습. 포스코 제공또한 원료·설비·자재 공급사에 대한 지원책도 적극 시행 중이다. 9월 말부터 404개사를 대상으로 피해 현황 및 애로사항을 전수 조사한 후 37개사의 애로사항 및 유형별 지원 방안을 도출하고 신속히 조치하는 한편, 상시적으로 제철소 복구 일정 및 구매 계획을 공급사와 공유하고 있다.
특히 포항제철소 관계자들은 이번 복구에 힘을 쏟아준 많은 민·관·군 관계자를 비롯해 협력사와 고객사 등에도 거듭 감사의 뜻을 밝혔다. 24시간 복구 체계를 유지하며 작업에 나서고 있는 포스코에는 각지에서 연인원 100만명, 일평균 1만5천명의 인력이 복구 작업에 동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