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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기, 별이 된 완벽주의자

[이응진PD의 노컷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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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탤런트들이 정말 그 많은 대사를 모두 외우는지. 진실을 말하자면 모두 외운다. 외우지 않으면 연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커닝을 하는 배우들이 더러 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원로배우 H 여사다. 그녀는 주위의 모든 소품에 대사를 깨알처럼 써놓는 걸로 호가 났다. 부채나 그릇 안에 대사를 적어놓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옷고름 안쪽에 붙여놓고 요령껏 보면서 연기를 한다.

덕분에 함께 연기하는 후배들이 곤욕을 치렀다. 연기란 서로 감정을 주고받는 일이며 눈을 마주쳐야 한다. 그런데 커닝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칠 수 있겠는가? 당황해서 NG를 내는 쪽은 늘 후배들이었고 PD에게 혼나는 쪽도 늘 후배들이었다. 물론 장본인이 혼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대사를 못 외워 늘 포졸이 단골이었던 한 탤런트는 대사를 육모방망이 여섯 면에 깨알같이 써놓고 읊조렸다. 포졸이야 사또 안전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게 예의인지라 방망이를 내려다보며 읽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 바람에 그의 동료들이 고통스러웠다. 육모 방망이를 요리조리 돌리며 대사를 읽는 우스꽝스런 모습에 본인 대사를 잊어버려 NG를 낼수 밖에 없었다.

동료들이 대사를 외우느라 골몰하는 동안 그는 연습실 한쪽에서 낮잠만 즐겼다. 어느 날은 심하게 코까지 골자 약이 오른 동료가 방망이를 슬쩍 바꿔놓았다.[BestNocut_R]

"포졸! 스탠바이!" 조감독 고함에 놀라 스튜디오로 달려간 사내, 서슬 퍼런 원님의 명령을 받잡는데 본인 차례가 되었다.

대사를 하려고 육모방망이를 내려다 본 사내, 아뿔싸! 눈앞이 깜깜해졌다. 깨알같이 적어놓은 대사가 없었다.

당황한 포졸, 아는 대사라고는 늘 하는 "아뢰옵기는! " 밖에 없는 터라 계속 외치는 말이 "아뢰옵기는!.. 아뢰옵기는! .. 아뢰옵기는! ... 그날 그는 감독에게 혼쭐이 났고, 그 후 그의 별호는 ''아뢰옵기 리(Lee)''가 되었다.

얼마 전 대사 잘 외우기로 명이 난 배우 김흥기 선생이 세상을 떴다. 그는 사극연기의 대가였으며 장인 중의 참 장인이었다.

몇 년 전엔 선생의 아들이 KBS 드라마 PD가 되어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그런데 5년 전 연극을 하다가 쓰러져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다가 결국 타계했다.

2

 

그의 떠남이 유난히 가슴 아픈 것은 마지막 소망 하나를 끝내 이루지 못하고 떠난 까닭이다. 배우로서의 그의 마지막 소망은 아들 작품에 출연하는 것이었다. 아들이 연출하고 자신이 연기를 하는 것이었다.

주위의 모든 배우들도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드라마를 만드는 날이 오기를 고대했었다. 그러나 드라마 역사에 첫 기록이 될 그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비록 그는 떠났지만 우리는 그의 정신을 기억할 것이다 - 배우로서 그가 보여주었던 완벽주의와 뜨거운 예술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응진 KBS 드라마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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