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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흔적에서 교훈으로]제주 관덕정과 북초등학교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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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흔적에서 교훈으로]제주 관덕정과 북초등학교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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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덕정, 1947년 3.1절 기념대회 발포사건 현장…4.3발발의 도화선
    2021년 3월 6일 제주4.3특별법 전부개정 보고대회 개최 '상징적 장소'
    북초등학교,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 열렸던 장소
    도내 최초의 공립 초등교육기관 1907년 5월 개교
    제주도청과 제주읍사무소, 법원 등이 모여 있는 행정의 중심지

    제주에는 4.3유적지를 비롯해 수많은 다크투어 유적지가 존재한다. 제주는 대한민국의 대표 관광지이지만 제주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제대로 된 기억의 전승이 우선 필요하다. 제주CBS <시사매거진 제주>는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와 함께 제주에 존재하는 다크투어 유적지가 잘 보전되고 정확하게 안내가 되고 있는지 역사적 사건과 함께 짚어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방송은 매주 토요일 오후 5시 5분부터 방송되며, 노컷뉴스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 양성주 대표. 제주다크투어 제공

     

    ■ 방송 : CBS 라디오 <시사매거진 제주> FM 제주시 93.3MHz, 서귀포 90.9MHz (17:05∼18:00)
    ■ 방송일시 : 2021년 3월 6일(토) 오후 5시 5분
    ■ 진행자 : 류도성 아나운서
    ■ 대담자 : (사)제주다크투어 양성주 대표

    ◇류도성> 우선 본인 소개를 해주실까요?

    ◆양성주> 저는 제주4·3을 알리고 기록하는 시민단체 비영리 사단법인 제주다크투어의 대표를 맡고 있는 양성주라고 합니다. 앞으로 매주 토요일마다 4·3을 비롯한 제주도내 다크투어 유적지를 소개하는 <4.3 흔적에서 교훈으로>를 통해 도민 여러분과 만나 뵐 수 있어서 매우 반갑습니다.

    ◇류도성> 최근 다크투어에서 4·3 실태 조사를 하셨던데요. 배경이 따로 있습니까?

    ◆양성주> 제주다크투어는 제주4·3을 알리기 위해 4·3유적지를 조사하기도 하고, 순례단을 모집해서 평화기행을 다니고 있는데요. 유적지를 다니다 보면 안내판이 없기도 하고 심하게 훼손되었기도 하고 내용이 잘못된 경우도 있어서 제대로 조사를 해서 보고서를 낸 것입니다.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는지, 관리는 제대로 되고 있는지, 내용이 정확하게 기술되어 있는지, 외국어 안내는 있는지, 장애인에 대한 편의는 제공이 되는지 등을 조사했습니다.

    ◇류도성> <흔적에서 교훈으로> 오늘 첫 시간인데요. 처음으로 소개할 유적지는 어디인가요?

    ◆양성주> 먼저 유적지를 소개하기 전에 4·3과 관련된 내용은 제주4·3진상보고서와 4·3은 말한다에 나오는 내용을 중심으로 전달하는 것이고요. 현지 유적지 관리실태에 대한 내용은 다크투어에서 조사한 내용임을 미리 밝혀두겠습니다.

    오늘은 얼마 전 기념식이 진행됐던 3·1절과 관련된 제주4·3 이야기와 그에 얽힌 유적지를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바로 관덕정입니다.

    ◇류도성> 관덕정을 처음 4·3유적지로 준비한 이유가 있을까요?

    ◆양성주> 관덕정은 제주의 유명 관광지이기도 하지만 제주4·3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며칠 전에 3.1절이 지나서 시기적으로 적당한 유적지가 아닌가 합니다. 특히 오늘 오전에는 4·3관련단체와 시민사회단체, 제주도청을 비롯한 각 기관들이 모여 제주4·3특별법이 21년 만에 전부 개정된 것에 대해 보고대회를 개최한 것도 바로 이곳 관덕정입니다.

    제주4·3특별법에서 제주4·3의 기점을 관덕정에서 발생한 제28주년 3.1절 발포사건으로 잡고 있거든요. 제주4·3특별법이 2000년에 제정공포 되면서 제주4·3의 시작을 1947년 3월 1일로 앞당긴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이전 50년 동안은 제주4·3은 공산폭동이라고 불리워지고 1948년 4월 3일에만 의미를 부여했었거든요.

    ◇류도성> 관덕정에는 제주4·3의 어떤 이야기가 숨어 있을까요?

    ◆양성주> 관덕정은 제주의 정치, 경제, 역사의 중심에 있던 곳입니다. 그리고 제주4.3을 설명하면서 관덕정을 절대 빼놓을 수 없는데요. 관덕정은 1947년 3월 1일 3·1절 기념대회에서 발포사건이 있었던 현장입니다.

    이날은 북국민학교에서 제28주년 3.1절 기념식을 마친 참가자들이 동서로 나뉘어 가두시위를 전개했고, 서쪽 행렬이 관덕정 앞을 빠져나갈 즈음 어린이가 기마경찰의 말발굽에 치였지만 경찰이 아무런 조치 없이 가버렸습니다. 이에 격분한 군중들의 항의가 이어졌고 이에 대한 경찰의 발포로 6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 결과 사상 초유의 3.10 민관총파업이 일어났고 이는 4.3 발발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또 관덕정 앞에선 1949년 6월 6일 무장대사령관 이덕구가 교전 중 사망하자, 그의 시신을 전시해 주민들에게 관람하도록 했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 제공

     



    ◇류도성> 그렇다면 제주도민들이 3.1절 기념대회에 모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양성주> 해방 후, 여운형 선생님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최초의 건국준비단체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가 만들어지는데요. 이는 이후 ‘인민위원회’로 명칭이 바뀌게 됩니다. 제주도의 경우, 인민위원회의 성격이 강했는데요.

    대표적인 이유로는 일제강점기 때 제주도에는 제주-대판(오사카)의 직항이 있었기 때문에 학문이나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었죠. 새 세상을 보고 돌아온 주민들은 주민자치형태의 위원회가 필요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 당시로 돌아가 생각해본다면, 35년간 일제강점기를 이겨내 해방을 맞고 우리 손으로 새 세상을 만들고 싶었을 염원은 당연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 민주주의 민족전선에서는 건국의 5가지 원칙을 이야기했었는데요.

    1. 기업가와 노동자가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2. 지주와 농민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3. 여자의 권리가 남자의 권리가 같이 되는 나라를 세우자
    4. 청년의 힘으로 움직이는 나라를 세우자
    5. 학생이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지금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건국 5원칙은 당시 사람들의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을 보여줍니다. 해방 전후 제주도의 상황을 살펴보면, 일제강점기에는 제주-대판(오사카)간 정기항로 개설과 5만 명 정도의 노동력이 일본에 진출했기 때문에 생필품 구입은 부산-목포보다 오히려 일본 대판 루트를 이용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군정은 귀환자들의 반입 물품을 제한하고 일본과의 물자교역 자체를 불법화해 경제생활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해방 후 일본 등지로 나가 있던 제주인이 6만 명가량 귀환했고, 해방된 조국에는 이들을 수용할 만한 공장이나 일터가 없어 실업률이 최고조로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여기에 군정경찰 82%가 일제 경찰 출신으로 미군정에 대한 분노가 커질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해방은 했지만 우리 손으로 이뤄낸 자주독립이 아니었고 삶은 더욱 더 힘들어져만 갔기 때문에 해방 후 두 번째 맞는 3.1절에 제주도민들은 새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열망과 저항의 마음을 가지고 거리로 나섰던 것입니다.

    ◇류도성> 3·1절 발포사건 당시를 자세히 얘기해주신다면?

    ◆양성주> 북국민학교에서 ‘제28주년 3·1 기념 제주도대회’가 열렸고, 이날의 군중 수는 대략 2만 5천~3만 명으로 제주도민 10명 중 1명꼴로 참가를 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3·1 혁명정신을 계승해서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려는 도민들의 염원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날 오후 2시쯤에 기념행사가 끝난 후 군정 당국의 반대에도 불구, 허가받지 않은 가두시위가 시작되었고 제주북국민학교를 나온 시위행렬은 두 갈래로 나뉘어 한 대열은 미군정청과 경찰서가 있는 관덕정 광장을 거쳐 서문통으로, 다른 한 대열은 감찰청이 있는 북신작로를 거쳐 동문통으로 이어졌습니다.

    오후 2시 45분쯤 관덕정 앞 광장에서 기마 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말굽에 채였고 기마 경관이 어린이가 채인 사실을 몰랐던지 그대로 가려고 하자 주변에 있던 관중들이 야유를 하며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일부 군중들은 소리치며 돌멩이를 던지며 쫓아갔고 당황한 기마 경관은 쫓기며 동료들이 있던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고, 그 순간 총성이 울렸습니다. 기마 경관을 쫓아 군중들이 몰려오자 경찰서를 습격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일제히 발포한 것입니다. 이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제주다크투어 제공

     



    ◇류도성> 3·1절 발포사건 이후 도민들의 반발이 거셌을 것 같은데, 당시 정세는 어땠었나요?

    ◆양성주> 당시 경찰 당국은 민심 수습보다는 발포의 정당성 강조에 주력했습니다. 같은 날 도립병원 앞에서 두 번째 발포사건이 일어났는데요. 사건 전날 도립병원에는 응원경찰 한 명이 입원해 있었고, 동료 2명이 경호 차 병원에 있었습니다.

    갑자기 관덕정 쪽에서 총성이 울리고 피투성이 된 부상자들이 업혀 들어오자 그들 중 한 명이 공포감을 느껴 소총을 난사, 행인에게 중상을 입혔던 건데요. 도립병원 앞 발포는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관덕정 앞의 발포에 대해서는 치안 유지를 위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군정은 오히려 통행금지령을 내리며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고 도민들은 3.1절 발포사건의 책임을 물어 제주경찰 감찰청장의 사퇴 등 발포에 대한 책임을 묻는 3.10 민관 총파업을 시작했습니다.

    1947년 3월 10일 제주도에서는 관공서뿐만 아니라, 통신기관, 학교, 공장 근로자, 심지어는 미군정청 통역단 등 교사, 학생, 노동자가 참여하는 대규모 파업이었습니다. 당시 제주도는 경제적으로 먹고살기가 많이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도 장사를 그만두었고 작은 가게도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심지어 제주 출신 경찰관 중심으로 현직 경찰관들이 파업에 동참하기도 했는데요. 실제 그 당시 중문지서에서는 지서주임을 포함한 경찰관 6명이 사직서를 제출하고 이런 담화를 썼습니다.

    ‘우리 중문지서 직원일동은 오늘까지 치안확보라는 숭고한 정신으로 봉직하여 왔으나 금번 발포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희생적 정신은 수포로 화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 악독한 명령을 복종할 수 없으므로 직장을 떠난다.’는 내용의 담화를 부착하고 지서를 떠났습니다.

    당시 제주도지사 ‘박경훈’은 발포사건 직후 사표를 제출하고 “관직에 있는 나로서 무어라고 비판을 가할 수는 없으나 발포사건이 일어난 것은 시위행렬이 경찰서 앞을 지난 다음이었던 것과 총탄의 피해자는 시위군중이 아니고 관람 군중이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습니다.

    당시 현직 제주도지사가 사표를 제출하고, 제주도의 치안을 담당하던 경찰관들이 이름표를 내려놓고 지서를 떠나는 상황에서 3.1절 발포사건을 과연 정당방위로 해석할 수 있었을까요?

    미군정은 제주도민들의 아픔을 경청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고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잡아들였습니다.

    ◇류도성> 그렇다면 실제 관덕정에서 4.3과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나요?

    ◆양성주> 저희 제주다크투어에서는 작년 7월부터 9월까지 약 3개월 동안 도내 유적지 100곳의 안내판을 조사했었는데요. 관덕정은 4.3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 일어난 장소이니만큼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곳 중 한 곳입니다. 하지만 안내판에서 4.3과 관련된 내용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또한 안내판에 접근하기 위한 휠체어용 경사로가 마련되어 있지 않아 이동약자의 접근에 어려움이 있고 시각장애인 등을 위한 점자 안내나 음성 변환용 코드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1947년 관덕정에서 일어난 3.1절 발포사건 이야기가 나오면 빼놓을 수 없는 유적지가 또 있습니다. 바로 제주 북초등학교인데요. 당시 제주북국민학교라고 불렸던 이 학교가 어떤 학교였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주북초등학교 전경. 제주다크투어 제공

     



    ◇류도성> 지금은 북초등학교인데 당시에는 초등학교였죠?

    ◆양성주> 제주북초등학교는 제주도내 최초의 공립 초등교육기관입니다. 제주도의 최초의 서양식 학교라는 점에서 제주 근대 교육의 발상지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학교는 100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학교 홈페이지에 가보면 1907년 5월에 '제주관립 보통학교'로 개교했다고 나와 있는데요.

    1907년은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가 재위하던 시절입니다. 실감이 가시나요? 근데 사실 제주북초등학교의 개교 시기는 10년 더 전인 1986년으로 봐도 무방합니다. 1907년은 일제식 교육이 도입된 시기인데 반해, 1985년은 조선 정부의 소학교령이 공포된 시기입니다.

    이 해에 수도권 지역을 중심으로 공립소학교가 생겼고, 이듬해인 1986년에는 전국 각 지역에도 공립소학교가 설치됩니다. 당시 제주목에도 공립소학교가 설치되는데 이 학교를 제주북초등학교의 전신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지방 소학교의 위치를 정한다는 내용이 담긴 <관보>가 국립중앙도서관에 현재까지 사료로 남아 있는데요. 이 기준에 따르면 제주북초등학교의 개교일은 1896년 9월 21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교 내 도서관인 김영수 도서관 내부 벽면에 북국민학교의 약력이 설명되어 있는 공간이 있는데요. 나중에 시간이 되시면 직접 가서 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제주북초등학교는 역사가 오래된 만큼 다른 학교와 비교해 눈에 띄는 점이 있습니다. 학창 시절 기억을 떠올려보시면, 제주도내 학교 교가에는 '한라산'으로 시작되는 교가가 많습니다. 한라산의 푸른 정기를 이어받는다거나 백록담의 기상을 계승한다던가 하는 내용이죠.

    근데 북초등학교의 교가는 백두산으로 시작합니다. 얼핏 이해가 안 가실 수도 있는데요. 학교가 세워질 당시 남북 분단이 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은 백두산, 그리고 그 다음이 한라산이었겠죠.

    그래서 제주북초등학교의 교가 1절은 백두산으로 시작합니다. 한라산은 2절 중간쯤에 나옵니다. 학교의 상징 교표(마크)도 무궁화를 가장자리에 두고 그 안에 팔괘와 태극무늬를 넣는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대한제국의 국기 형태와 비슷한 형태입니다.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면 사뭇 생경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제주북초등학교에 여전히 남아있는 최초의 학교터 비석. 제주다크투어 제공

     



    ◇류도성> 그럼 4·3 당시 제주북국민학교는 어떤 학교였습니까?

    ◆양성주> 4·3 당시 제주북국민학교가 있는 제주읍은 쉽게 말해 제주도의 최고 학군이었습니다. 제주도청과 제주읍사무소를 비롯해 법원, 경찰청(제주경찰감찰청) 등이 모여 있는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상업적으로도 여러 가게들이 모여 있었는데요. 모자점으로 '갑자옥'이 유명했었습니다.

    '옥성정'이라는 술집에서는 4·3 당시 도민들을 학살하도록 명령을 내린 박진경 연대장의 축하연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둘 다 4·3 당시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곳이죠. 이외에도 현재까지 명맥을 이어오는 가게도 있습니다.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책방 우생당 서점(1945년 설립), 피난 시절 실향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함흥면옥(1953년 설립), 그리고 조일약국(1953년)이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도 제주중앙성당과 제주도 개신교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최초 교회인 성내교회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9연대 정보과와 헌병대, 미군 CIC방첩대가 있었습니다. 식산은행과 제주신보사도 이 인근에 위치해 있었죠. 이런 이유 때문인지 북국민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자부심이 남 달랐다고 합니다.

    ◇류도성> 그래서 앞서 설명하신 제28주년 3·1절 기념식이 여기서 열린 거죠?

    ◆양성주> 1947년 3월 1일 오전 11시쯤 제주국북민학교에서 열린 제28주년 3·1절 기념식에는 앞서 관덕정을 설명하면서 말씀드렸듯 제주도민 3만 명 가량이 운집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외친 구호는 "3.1혁명 정신을 계승하여 외세를 물리치고, 조국의 자주통일 민주국가를 세우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앞서 이날 오전 9시쯤에는 오현중학교 옛터에서 학생들이 주도로 열린 3.1절 기념식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이 행사에는 제주농업학교, 오현중, 제주중, 제주고등여학교 등의 학생 2,000여 명이 참여했습니다. 행사는 각 학교 3.1절 기념 준비위원회가 주도한 것이라고 합니다.

    조금 이후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열릴 3.1절 기념식의 사전행사 성격을 띠었다고 합니다. 당시 경찰이 학생들이 모이는 것을 막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이 행사가 합법이었는지 불법이었는지를 놓고 재판이 진행됐다고 하는데, 당시 재판부는 이 행사에 대한 합법. 불법성을 규정하지 않고 “이 혐의에 대해서는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인정”한다고 판시를 했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조일구락부 옛터와 석송여관 옛터, 서북청년단본부 옛터 등 제주시 원도심에는 4·3과 관련한 많은 유적지들이 있습니다.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곳도 많지만, 4·3 당시 이야기를 상상하며 원도심을 걷다보면 어느새 역사의 현장에 한 가운데 자신이 있음을 체감할 수 있습니다.

    ◇류도성> 그럼 4·3에 대한 안내판은 있나요?

    ◆양성주> 학교 주변과 운동장에는 4·3과 관련된 안내판이나 소개의 글은 없었고 영주관(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셔놓고, 왕명을 받들어 오는 관리를 접대하고 묵게 하는 곳) 터 표지판이 있었구요. 학교 운동장 한 구석에 국민교육헌장이 돌탑에 새겨져 아직도 건재하게 있는 게 이채로웠습니다.

    ◇류도성> <흔적에서 교훈으로> 오늘은 첫 시간으로 관덕정과 북국민학교에 대해서 소개를 해주셨는데요. 다음 시간은 어떤 유적지를 알아볼까요?

    ◆양성주> 다음주에는 ‘대정, 꺾이지 않는 항쟁의 정신’을 테마로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유적지에 대해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많이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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