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앞 전태일 동상(사진=서민선 기자)
1970년 11월 13일. 노동자 전태일(22)은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입구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촛불로 산화했다. 그와 함께 불탔던 책에는 '노동자의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한다'라며 만들어진 근로기준법이 쓰여 있었다.
50년이 지난 오늘날은 어떨까. 전체 사업장의 약 60%가 근로기준법에서 제외되는 '5인 미만 사업장'이고, 여기서 일하는 노동자는 350만명이다. 이외에도 사업주와 교섭할 수 없는 노동자는 600만명이며, 산업재해로 사망하는 노동자는 1년에 2천여명에 달한다. 전태일의 외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350만명은 근로기준법 제외…'악용'하는 사업주들"사업주인 원장을 제외하고는 상시근로자가 5명입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1명은 프리랜서로 계약을 했더라고요. 모두 똑같이 일했는데도 말이죠. '5인 미만 사업장'으로 신고돼 있어서 연차수당·야간수당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2018년부터 약 2년 동안 학원에서 근무하다가 그만둔 강사 A씨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이같이 토로했다. 그는 "다른 근로자를 무늬만 프리랜서로 등록하거나, 계약 자체를 하지 않는 방식으로 5인 미만 사업장으로 위장한 경우"라면서 "노동청에 고발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근로기준법' 제11조(적용 범위) 제1항에는 "이 법은 상시 5명 이상의 근로자를 사용하는 모든 사업 또는 사업장에 적용한다"고 나와 있다. 이 때문에 '5인 미만 사업장'은 근로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업주가 노동자에게 연차휴가부터 연장·야간·휴일 수당을 줘야 할 의무가 없다. 일방적으로 해고를 통보하더라도 퇴직금·해고수당만 지급하면 문제가 없다.
근로기준법 사각지대에 놓인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은 평균보다 낮은 임금을 받고 있다. 2016년 한국노동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 중 초과근로수당은 15%, 유급휴가는 23.9%, 상여금은 39%만이 받고 있었다. 모두 절반에 채 못 미치는 비율이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218만원으로 전체 노동자 평균임금인 247만원에서 밑돌고 있다. 이런 노동자만 전국에서 350만명이다.
특히 5인 미만 사업장이 근로기준법상 예외가 되다 보니 이를 악용해 '가짜 5인 미만 사업장'을 만드는 등 불법·편법을 저지르는 사업주들도 있다. 사업장을 여러 개로 '쪼개' 허위로 등록하거나, 5인 이상임에도 4명에게만 4대 보험을 가입시키는 등의 방법을 사용한다.
'권리찾기유니온 권유하다'에 따르면 한 쇼핑몰 업체 'OO프랜드'는 사업장을 서류상으로 3개로 쪼개 직원들에게 연차와 시간외 근로수당 등을 미지급하고, 2주간의 교육기간 동안 19만원의 교육비만 지급하기도 했다. 또 'OO홀딩스'는 개인사업자 2개와 법인사업자 2개로 사업장을 쪼개 직원들을 주 60시간 근무하게 하고, 시간외 근로수당 미지급과 부당해고 등을 일삼기도 했다.
대기업 직영사업장이나 200명 이상이 일하는 대형 쇼핑몰도 예외는 아니었다. 심지어 10개 이상 사업장으로 쪼갠 경우도 있었다. 근로기준법 밖의 '가짜 5인 미만 사업장' 노동자들은 주당 60~70시간을 넘게 일하고도 시간외수당이나 연차수당 등 노동자로서 당연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당해고의 위험에도 항시 노출돼 있다.
2020년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모습.(사진=서민선 기자)
◇"자영업자 힘들다면 정부가 직접 도우면 될 일…왜 노동자를 차별하나"왜 전태일 사후 5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근로기준법을 통해 보호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많은 걸까. 근로기준법에서 5인 미만 사업장이 제외된 이유는 당시 영세자영업자들을 배려한다는 취지가 컸다. 영세자영업자들이 법을 모두 준수하면서 영업을 이어가긴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근로기준법 제정 초기에는 개인영세 자영업자들을 위한다는 취지로 5인 미만 사업장은 예외로 뒀다"며 "하지만 이후 이 제도를 악용해서 사업장을 쪼개는 등 가짜 5인 미만 사업장이 판을 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영세고용이든, 가족고용이든 노동자로서 누려야 될 기본 권리들이 있다"며 "임금·복지·노동시간 등을 사업장 규모에 따라 차별을 두는 것은 애초 법의 취지에도 맞지 않고, 보편적인 노동기본권에도 맞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사업장 규모에 따라 노동자를 차별하는 것은 '보편적 노동권'에 어긋난다는 지적이다. 더군다나 영세자영업자가 힘들다면 이들을 직접 지원해야지, 노동자를 차별하는 방식으로의 접근은 합당하지 않다는 비판도 제기된다.
권유하다의 정진우 집행위원장은 "근로기준법은 연차휴가나 연장근로수당, 휴업수당 등 '노동자로서의 최소한의 근로조건'을 법이 보장하라고 만들어졌다"며 "5인 미만 사업장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법적인 차별을 받는 것은 상당히 불합리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만약 5인 미만이나 영세기업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하면 근로자들에게 필요한 조항들을 차별적으로 적용함으로 인해서 피해자를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기업들이 제대로 운영될 수 있도록 지원책을 만들어야 한다"며 "5인 미만 사업장도 근로기준법에 적용받도록 개정되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영세기업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권유하다는 지난달 28일 '#일하는사람_모두의권리 법률지원단' 발대식을 갖고 5인 미만 사업장을 비롯해 취약한 노동조건에서 차별받는 노동자와 프리랜서, 특수고용 노동자 등의 정당한 권리를 찾기 위한 활동에 돌입했다. 이들은 '가짜 5인 미만 사업장 고발 운동'과 '4대보험 미가입 제보센터' 등 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노동자성' 자체도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들50여년 전 전태일은 동대문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들을 모아 '바보회'를 조직했다. 노동자들을 혹사시켜 자신의 배만 불리는 사업주들에게 대항하려면 '조직적인 목소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정당한 권리를 침해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뭉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모든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특수고용노동자', '플랫폼노동자' 등은 법적으로 '근로자'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노동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이 제한된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종법'(노조법) 제2조(정의)에서는 '근로자'를 '임금·급료 기타 이에 준하는 수입에 의하여 생활하는 자'라고 정의하고 있다. 월급이 아니라 건당 수수료를 받는 화물차 운전자, 퀵서비스, 택배 노동자, 대리운전, 학습지교사, 방문판매원 등 특수고용노동자들은 법상 근로자가 아니다. 이 같은 특수고용노동자가 약 250만명(민주노총 추산, 정부 추산은 약 220만명)에 이른다.
더불어 같은 법에서 '사용자'는 '사업주, 사업의 경영담당자 또는 그 사업의 근로자에 관한 사항에 대하여 사업주를 위하여 행동하는 자'로 정의된다. 사용자는 해당 사업에만 적용이 되기 때문에 원청의 하도급을 받은 용역업체에 고용된 노동자는 원청과 교섭할 수가 없다. 사용자의 인정 범위를 좁게 정의해 간접고용노동자들의 교섭권을 박탈한 셈이다.
민주노총 추산 간접고용노동자만 약 350만명에 이른다. 특수고용노동자와 합하면 약 600만명의 노동자가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3권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전태일 3법, 국제노동기구 핵심협약 비준 요구 기자회견(사진=연합뉴스)
◇매년 산재로 사망하는 노동자 2천여명…"전태일 3법 절실!"지난해 한 해 동안 산업재해로 사망한 근로자의 수는 2020명. 최근 10년 동안 산재로 사망한 근로자는 총 2만2천여명에 달한다. 매년 2천명의 노동자가 일하다 숨진다.
하지만 '산업재해'에 제대로 책임지는 사업주는 적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에 따르면 2017년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처리된 사건 1만3187건 중 구속된 건수는 1건(0.007%)에 불과했다. 정식 재판에 넘어간 사건은 613건(4.64%)에 그쳤고, 대부분이 약식명령 청구(82.91%)로 끝났다. 벌금액 평균은 400만원이었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산재로 인한 사망사고의 경우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솜방망이' 처벌에 그치고 있는 셈이다. 고용노동부가 2013~2017년까지 총 1714건의 산업재해 관련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재범률은 97%에 달했다. 일반 형법 범죄 43%의 2배의 수치다.
특히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범들은 대부분 전과 1범부터 3범이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2017년도에만 전과 4범이 153명, 전과 5범이 96명이며 전과 9범 이상도 105명에 달하는 상황이다. 산업재해가 동일한 기업에서 반복해 발생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중대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 책임자 처벌법 법률안'(중대재해기업처벌법) 도입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해당 법안은 사업장 등에서 안전조치의무나 보건조치의무를 위반해 인명피해가 발생한 경우, 법인을 포함해 사업주·경영책임자와 이를 감독하는 공무원까지 처벌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노동계는 '근로기준법 11조'와 '노조법 2조' 개정, 그리고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등 '전태일 3법'이 올해 안에 통과되길 촉구하고 있다. 이들 법에 적용되는 노동자만 약 천만명에 달할 것으로 보고 있다. 3개 법 모두 국민청원 참여자가 기준인 10만명을 넘어서면서 공은 국회로 넘어간 상황이다.
민주노총은 "전태일 열사 50주기. 열사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민주노총이 올곧게 '전태일 3법'을 만들 것"이라며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나의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열사의 마지막 호소를 온전한 전태일 3법의 쟁취를 통해 완성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는 2020년이 가기 전 온전한 전태일 3법의 쟁취를 위해 조직의 모든 역량과 자산을 투여할 것"이라며 "이것이 전태일 열사의 뜻이다. 전태일 열사 정신의 계승이다"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