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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탈취·단가 후려치기에 냉가슴 앓는 중소기업



기업/산업

    기술탈취·단가 후려치기에 냉가슴 앓는 중소기업

    하청 중소기업, 대기업과 분쟁 벌이면 '주인 손 무는 개' 낙인
    대형 로펌 앞세운 대기업, 중재보다 소송 선호
    재판부는 기술 탈취 인정하면서도 솜방망이 판결

    지난해 8월 26일 오후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2019년 중소기업 기술보호 콘퍼런스'에서 김학도 중소벤처기업부 차관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1. 삼영기계는 선박이나 발전소 엔진의 핵심부품인 피스톤과 실린더헤드 등을 만드는 중소기업이다. 지난 1975년 설립된 이후 1983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최근에는 정부의 '소재부품장비 강소기업100'에 선정됐다. 세계 무대에서도 독일의 말레, 콜벤슈미트와 함께 피스톤 제조 3대 메이커에 들 정도로 기술력이 탄탄한 기업이다.

    이 회사를 현대중공업(현 한국조선해양)이 부랴부랴 찾았다. 1990년대 초반 무렵이었다. 새로 개발된 엔진에 필요한 부품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유일한 국내 기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삼영기계는 2004년 엔진의 핵심부품을 국산화하는데 성공해 그 이후 현대중공업으로부터 수차례 공로패를 받기도 했다. 또한 삼영기계가 만든 피스톤 등은 국가핵심기술로도 지정됐다.

    하지만 삼영기계와 현대중공업의 관계는 2012년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현대중공업이 삼영기계에게 기술자료를 달라고 요구하면서부터다. 제품 제작시 작업 조건과 작업 방법 등이 포함된 작업표준서, 제조 Q.C공정도 등을 '불량 검수' 등을 이유로 요구한 것.

    한국현 삼영기계 대표는 "꺼림칙했지만 거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술 자료를) 줄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현대중공업은 삼영기계에 기술자료를 요구하며 보낸 이메일에서 "회신이 없으면 '양산승인 취소가 될 수 있다'"고 압박했다.

    그리고 이렇게 보낸 기술자료는 현대중공업이 거래하던 또다른 하청업체 'J'사에게 건네졌다. 현대중공업은 삼영기계의 기술자료가 아닌 자체 자료라고 부인했지만 'J'사가 작성한 기술자료에서는 삼영기계 기술자료의 오타 부분이 똑같은 위치로 발견됐다.

    기술자료를 건네받은 현대중공업은 이후 납품단가를 인하하라고 삼영기계에 요구하기 시작했다. 기존 가격에서 10% 인하된 단가로 납품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현대중공업은 급기야 거래 중단까지 통보했다. 삼영기계는 "현대중공업이 삼영의 기술자료를 J사에게 빼돌려 하청업체를 이원화한 뒤 납품단가를 후려치고, 결국에는 거래까지 끊었다"고 주장한다.

    이같은 주장을 공정거래위원회도 인정했다. 공정위는 지난 27일 현대중공업의 행위를 '기술자료 유용행위'로 판단해 역대 최대 규모인 9억 7천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공정위는 "현대중공업이 삼영기계에 '이원화' 진행사실을 전혀 알리지 않았으며 이원화 완료 이후 삼영기계에 단가 인하 압력을 가했고, 이원화 이후 1년 내에 삼영기계와 거래를 단절했다"고 밝혔다.

    #2.삼성중공업의 하청업체 가운데 하나인 TSS-GT(이하 TSS)는 지난 4월부터 '깜깜이 공사'를 했다. 공사 대금은 물론이고 공사 물량조차 제대로 설명받지 못한 채 공사부터 시작하라는 삼성중공업의 재촉에 인력들을 끌어모아 현장에 투입했다.

    정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은 인력 투입 뒤였다. 공사 대금은 삼성중공업의 요구에 맞춰졌다는게 TSS의 얘기다. 견적서를 내라고 해서 TSS가 견적을 보내면 '결재를 얻기 힘든 가격'이라거나 별다른 설명 없이 몇 차례 되돌려 보내는 방식으로 하도급 대금을 낮추는 방식이었다. 김동주 TSS 대표는 "일감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삼성중공업이 원하는 수준으로 견적 가격을 써내야 했다"며 "견적 가격을 맟추면 공사가 한참 진행된 이후에야 공사 계약서를 소급 작성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삼성중공업이 일방적으로 하도급 대금을 삭감하는 것은 물론 관철작업(급박한 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연장근로 또는 휴일근로를 하는 것) 대금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며 "그 액수가 무려 20여억 원"이라고 주장했다.

    급한대로 자금을 융통해 자체적으로 임금을 지급하던 김 대표는 자금 부족으로 임금을 줄 수 없게 됐고, 현재는 근로자들로부터 임금체불로 고소당해 재판을 받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공사를 하다보면 예상할 수 없는 수정작업 등이 이뤄질 수 밖에 없는데, 바로 이런 경우"라고 밝혔다.

    ◇ 대기업 '법정 가자' … 소송에 지치는 중소기업

    앞서 소개한 현대중공업의 기술유용 건은 현재 형사재판이 진행중이다. 검찰이 현대중공업의 혐의를 인정해 약식기소했지만, 현대중공업이 불복해 정식 재판을 청구했기 때문이다.

    공정위가 역대 최대의 과징금을 부과한 것에 대해서도 현대중공업은 불복하고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방침을 시사하고 있다. 한국조선해양 관계자는 "삼영기계가 주장하는 내용과 우리의 입장이 다르기 때문에 대응할 방침"이라며 "공정위 의결서를 받는대로 대응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삼성중공업은 'TSS와 (문제해결을 위해) 협의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 역시도 소송으로 갈 가능성이 커 보인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TSS가 주장하는 금액과 우리가 추산하는 금액 사이에 차이가 크다"며 "해결이 안되면 법정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삼성중공업은 TSS 대표 개인에 대한 형사고소를 이미 걸어 놓고 있다. 삼성중공업은 최근 김 대표에 대해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했고 경찰이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대기업은 이처럼 하청업체와 분쟁이 생기면 조정이나 중재보다는 소송을 선호한다.

    현대중공업은 또다른 하청업체 테크마레와 분쟁을 겪자 당시 중소기업청의 조정을 거부하고 특허무효 심판을 제기했다.

    두산인프라코어는 하도급업체 이노코퍼레이션의 기술을 유용한 행위와 관련해 공정위로부터 지난 2018년 3억 7900만 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자 바로 불복해 과징금을 취소해달라는 재판을 청구했다.

    이처럼 대기업들이 조정이나 중재보다는 소송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려는 이유는 중소기업의 소송 대응 능력이 떨어지고 재판 결과 역시 대기업에 우호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두산인프라코어가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가 부당하다며 낸 소송에서 재판부는 최근 두산인프라코어의 기술유용 행위는 인정하면서도 과징금 부과는 취소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사법부가 대기업의 기술탈취 행위에 대해 내리는 판결이 솜방망이라는 것은 손해배상 판결액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한국의 특허 손해배상액 중앙값은 6천만 원으로, 미국의 65억 7천만 원의 1/110 수준에 불과하다. 한국 회사인 SK와 한화가 배터리 기술 모방 소송을 한국이 아닌 미국 법원에 가져간 이유다.

    또한 기술탈취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지난 2012년 도입됐지만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최대 한도인 '3배'를 채운 판결은 나오지 않고 있다.

    소송이 시작되면 대기업은 대형 로펌 변호사들을 선임해 장기전을 펼친다. 법률 지식도 부족하고 고액 변호사를 선임할 자금도 부족한 중소기업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릴 수 밖에 없다. 결국 중소기업 입장에서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한 채 소송의 끝은 '폐업'이나 '국내사업 정리'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밥 주는 주인의 손을 무는 개'

    하청 중소기업에게 대기업은 '주인'이다. 한 중소기업 관계자는 "중소기업이 대기업과 분쟁을 벌이면 '밥 주는 주인의 손을 무는 개'로 낙인 찍힌다"고 말한다. 주인의 손을 한번 물면 '밥줄'이 끊긴다.

    사정이 이러니 중소기업은 부당한 요구를 받아도 대기업의 뜻에 따른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2018년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대기업의 기술자료 요구를 부당하거나 불안하게 느낀다'고 응답한 중소기업 비율이 89%에 이르지만 76.5%가 기술자료를 그냥 제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술유출 피해가 발생해도 고소고발(26.5%)하거나 소송(17.6%)을 걸기 보다는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32.4%)는 응답이 더 높게 나타났다.

    중소기업의 소극적인 모습은 설문조사 자체에서도 나타난다. 지난 2017년 중기중앙회가 기술유용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117개 하도급업체를 대상으로 심층조사를 진행했지만 단 9곳만이 인터뷰에 응했고, 이 마저도 자세한 설명은 거부했다.

    반면 일부 대기업은 '일감을 준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라'는 사고방식이다. 불공정 하도급 문제를 현장조사하는 공정위 관계자는 "단가 후려치기 의혹으로 현장 조사를 나가보면 일부 원청업체 관계자들은 '그동안 거래한 것 자체가 하청업체들에게는 이익'이라고 대놓고 말하기도 한다"며 "마치 교통경찰을 앞에 두고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들을 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공정위가 불공정거래 피해를 입은 중소기업의 명단을 중기중앙회에 요구해도 중기중앙회 역시 정보 교류를 꺼리고 있다고 이 관계자는 덧붙였다.

    ◇ 기술탈취, '단가 후려치기', 국제 경쟁력 저하로 이어져

    대기업이 하청 중소기업의 기술을 탈취하고 하청 단가를 일방적으로 깎는 관행은 국제 경쟁력 저하로 이어진다. 중소기업으로서는 기술을 개발할 유인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낮은 하청 단가로 연명하는 중소기업은 부도나 폐업을 할 수 밖에 없고, 이는 근로자들의 일자리 문제, 노동시장 양극화와도 맞닿는다.

    대기업으로서도 기술 경쟁력 보다는 가격 경쟁력으로 승부할 경우 국제 무대에 뒤쳐질 수 밖에 없다. 중국,동남아에 비해 가격 경쟁력은 떨어지고 미국과 독일, 일본에 비해서는 기술 경쟁력이 떨어지는 애매한 위치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중소기업이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대기업이 기술교류나 M&A 등 합법적인 방식으로 이를 수용해 국제 경쟁력을 유지하는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기술유용이나 탈취행위에 대한 엄정한 처벌과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김남근 변호사는 "기술탈취 소송의 경우 현재는 입증책임을 피해자인 중소기업에게 지우고 있으나 이를 대기업으로 전환해야 한다"며 "이것이 어렵다면 영미의 증거개시제도(디스커버리제도)를 기술분쟁 사건에 제한적으로 도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제도는 재판부가 증거개시 명령을 내렸는데 이에 응하지 않거나 허위 증거를 내면 형사처벌을 받거나 패소 판결을 받는 제도다.

    또한 고의적인 기술탈취 행위에 대해서는 징벌적 손해배상 한도를 현재의 3배에서 10배로 대폭 올려야 한다는 요구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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