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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드' 향한 시선…'섹슈얼'한 여성, '숭고'한 남성



문화 일반

    '누드' 향한 시선…'섹슈얼'한 여성, '숭고'한 남성

    사회적협동조합 두잉 '연속특강_보는 여성, 보이는 여성'
    2강 '누드화와 제국주의'_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1486)

     

    각종 미디어에서 여성은 '재현(再現)'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재현'이란 '사물이나 현상 따위가 다시 나타남'을 의미한다. 매스미디어 등장 이전, '보이는' 매체로서의 미술작품에도 그 시대 사람들이 여성을 재현하는 시선이 담겨 있다. 사회적협동조합 두잉이 마련한 '2020년 2월 연속특강-보는 여성, 보이는 여성'을 통해 미술사를 중심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응시의 권력'에 관해 알아본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18세기 초상화, 21세기 미디어…'응시 권력 속 여성"
    ② '누드' 향한 시선…'섹슈얼'한 여성, '숭고'한 남성"
    (계속)


    "아주 그냥 죽여줘요. 누구나 사랑하는 매력적인 내가 한 여자를 찍었지. 아름다운 그녀 모습, 너무나 섹시해. 얼굴도 샤방샤방. 몸매도 샤방샤방. 모든 것이 샤방샤방. 얼굴은 브이(V)라인, 몸매는 에스(S)라인. 아주 그냥, 죽여줘요." _노래 '샤방샤방' 가사 중 일부

    트로트 노래 '샤방샤방' 가사 중 일부다. 노래는 '매력적인 여자'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매력적인 여성의 모습은 여성을 '보는' 주체, 즉 남성의 시선으로 재현된 것이다. 이처럼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시선은 19세기 여성 누드화에서도 발견된다.

    지난 10일 저녁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서 열린 두잉 사회적협동조합 '2020년 2월 연속특강_보는 여성, 보이는 여성' 2강의 주제는 '누드화와 제국주의'였다.

    지난 10일 저녁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서 열린 두잉 사회적협동조합 '2020년 2월 연속특강_보는 여성, 보이는 여성'에서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가 '누드화와 제국주의'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최영주 기자)

     

    강연자인 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는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1486)을 예로 들며 "S라인을 강조하며 여성의 몸을 곡선으로 만들고, 시선을 살짝 내린 모습 등 여성의 몸을 재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특징은 여성을 취약해 보이게끔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너스의 탄생'은 '보는 사람'인 남성이 이상적인 '미(美)'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여성의 모습이 재현된 작품이다. 여성이 '보는 대상'이 됐을 때의 문제는 이처럼 여성의 아름다움 역시 여성의 '실제 모습'과 무관하게 남성의 시선으로 정의된다는 것이다.

    '비너스의 탄생'에서도 봤듯이 여성의 아름다움은 '섹슈얼리티'와 동일시된다. 섹슈얼리티란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이뤄지는 사회 역사적 구성물이며, 불평등한 권력 관계의 산물인 성에 관련된 행위·태도·감정·욕망·실천·정체성 따위를 포괄해 이르는 말이다.

    틴토레토의 '수산나와 장로들'(1555)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수산나와 장로들'(1610)

     


    똑같은 이야기도 남성의 시선에서 재현하는 것과 여성의 시선에서 재현하는 것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대표적인 게 '수산나와 장로들'이다.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수산나와 장로들'(1610)에서 수산나는 굉장히 짜증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자신의 벗은 몸을 훔쳐보는 남성의 시선이 불쾌한 것이다. 반면 남성인 틴토레토가 그린 '수산나와 장로들'(1555)에서 수산나는 남성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다. 틴토레토의 수산나는 당시 여성이 처한 상황을 보여준다.

    여성 누드화를 보면 여성은 수동적이고, 성적 대상화되며, 자신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나타내지 못하는 존재였다. 여성의 몸 자체는 인간의 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남성의 시선과 재현이 여성을 성적 대상화된 존재 내지 음란한 존재로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연구자는 "틴토레토 작품에는 수산나의 입장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 젠틸레스키가 수산나의 입장을 그렸다면, 틴토레토는 보는 사람(남성)의 입장을 그린 것"이라며 "틴토레토의 재현을 통해 관객 역시 수산나의 '몸'만 집중적으로 보게 된다. 장로들의 훔쳐보기에 관객도 동참하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1793)

     

    남성 누드화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남성의 누드는 여성과 다른 방식으로 재현된다. 프랑스 조각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1880)을 보면 남성의 몸은 여성처럼 성적 대상화한 몸이 아니라 '생각하는 몸'으로 재현된다. 혹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1793)에서 남성의 누드는 숭고함 내지 영웅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장치가 된다.

    이 연구자는 "여성이 아름다움이라는 '이미지'로 소비된다면, 남성은 생각하는 존재나 영웅적인 몸으로 나온다. 남성은 여성과 달리 성적 대상화된 몸으로 나오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초상화에서 여성은 젊고 날씬하고 아름다움을 유지해야 했다. 이는 여성 누드화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재현을 벗어나는 작업이야말로 응시의 권력을 깨나가는 작업이다.

    기존 누드화가 여성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했다면 YBA(Young British Artist·영국의 젊은 작가들) 그룹의 대표작가인 제니 사빌(1970~)은 기존 사회에서 혐오하는 몸인 거대한 여성의 몸을 누드화에 끌어들였다. 미국의 대표적인 인물화가 엘리스 닐의 '자화상'(1980)은 여성은 왜 늘 젊은 여성이어야 하는지에 반기를 든다. 나이 든 여성의 몸을 그리며 여성의 몸을 대상으로 한 미의 기준을 바꾼 것이다.

    이라영 연구자는 "사회적 약자의 역사는 '재발견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그렇다. 100년 전 한국 근대문학에서 여성 문학을 찾아내고, 여성 예술가와 여성 노동운동가를 계속 찾아내고 있다"며 "여성의 '몸'이 어떤 식으로 재현돼 왔고, 누가 여성의 몸을 성적으로 대상화해서 바라봤는지 살펴야 한다. 또 여성들이 자신의 몸을 대상화하는 작업에 대해 어떻게 대항해 왔는지 살펴보고, 그러한 작업의 재발견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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