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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에서 온 일기장 "5.18 참상 증언 시작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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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일반

    80년 광주에서 온 일기장 "5.18 참상 증언 시작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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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도청 취사반 여고생이 기록한 5.18 참상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
    39년 흘렀지만.. 5월만 되면 아프고 부끄러워
    철저한 반공교육 받고, 유신찬양도 했었는데
    군인이 북한이 아니라 왜 우리를 치나 혼란
    억울한 마음에 5.18의 참상 손글씨로 기록
    부모님도 남편도 모르게 평생을 숨겨왔지만
    진실 왜곡되지 않게 하기 위해 기록 공개
    전두환 회고록, 후안무치함에 증언 불 당겨
    나만 살았다는 죄책감, 말해야 치유되지 않을까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 1 (18:15~18:55)

    ■ 방송일 : 2019년 5월 17일 (금요일)
    ■ 진 행 : 정관용 (국민대 특임교수)
    ■ 출 연 : 주소연 (서울시교육청 장학관)


    ◇ 정관용> 바로 내일이 5. 18 민주화운동 39주년 되는 날이죠. 그래서 오늘도 저희가 특별한 분을 모셔봤는데요. 5. 18민주화운동 당시에 그 현장을 세세하게 기록한 한 여고생의 일기가 지난 201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었죠. 19살 그 어린 나이에 처참했던 현장을 마주하며 손글씨로 꾹꾹 눌러 쓴 5. 18여고생일기. 바로 그 일기를 쓰신 분. 지금은 서울시교육청 장학관으로 계십니다. 주소연 장학관을 오늘 스튜디오에 초대했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 주소연> 안녕하세요.


    ◇ 정관용> 5. 18. 5월달 되면 기분이 다르세요? 어떠세요?

    ◆ 주소연> 5. 18 되면 아프죠.

    ◇ 정관용> 아프세요?

    ◆ 주소연> 아픕니다.

    ◇ 정관용> 아프세요? 어디가 아프세요?

    ◆ 주소연> 마음이 아프고 가슴이 아프고. 아픕니다.

    ◇ 정관용> 39년 흘렀는데. 그렇죠?

    ◆ 주소연> 그게 아픔이 치유가 안 되는 것 같아요.

    ◇ 정관용> 치유가 안 되고 있다.

    ◆ 주소연> 네. 계속 그냥 눌러져 있었고 어느 순간 외부의 반응에 대해서 그대로 다시 올라오고 그리고 사실은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감옥 가신 분들도 있고 너무 많은데 나만 피해서 잘 살고 있다는 그런 어떤 미안함, 죄스러움 그런 것들이 항상 한으로 다시 올라오고, 다시 올라오고 그러는 것 같아요, 부끄럽고.

    ◇ 정관용> 네.. 그때 고3?

    ◆ 주소연> 고3이었습니다.

    ◇ 정관용> 어느 고등학교?

    ◆ 주소연> 광주여고.

    ◇ 정관용> 위치가 어떻게 돼요?

    ◆ 주소연> 그러니까 광주여고는 도청에서 좀 가깝습니다. 그래서 시위대가 돌아가는 것을 창밖으로 이렇게 멀리 볼 수가 있고요. 그리고 거기에서 구호를 외치거나 뭐 하면 다 들을 수가 있었어요.

    ◇ 정관용> 전남도청 가깝게.

    ◆ 주소연> 네. 지금은 이전해서.

    ◇ 정관용> 그러니까 그 당시에는.

    ◆ 주소연> 그 당시에는.

    ◇ 정관용> 일기가 아니라 보니까.

    ◆ 주소연> 기록입니다.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현장을 기록한 '5.18여고생일기' (사진=5.18 민주화운동 기록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등재추진 위원회 제공)


    ◇ 정관용> 시사노트라고 제목을 딱 써놓으셨네. 그렇죠? 그런데 이게 매일매일 기록을 하신 거죠?

    ◆ 주소연> 아니, 그런 건 아니고요. 제가 이제 5월 22일부터 도청에 들어가서 활동을 해서 취사반 활동을 했었는데 그 취사반 활동 끝나고 이제 5월 27일날 피해서 도망을 나왔죠. 그리고 나서 5월 27일날 집에 가서 그때 한꺼번에 기록한 겁니다. 그때부터 시작해서 그다음에 또 한 번 또 쓰고 억울하면 또 한 번 또 쓰고 이렇게 해서 기억에 의존해서 쓴 겁니다. 그래서 그때그때 도청에 있으면서 기록한 건 아니고요. 도청에 취사반 활동을 할 때는 거의..

    ◇ 정관용> 바빠서 글 쓸 시간도 없으셨을 텐데.

    ◆ 주소연> 그렇죠, 잠을 못 잤으니까. 22일부터 들어갔을 때 맨 처음에는 도청 앞에서 동국대 대학생이었어요, 취사반 담당하는 대학생이었었는데 오빠죠, 그때 당시에는. 대학생 오빠가 취사반 모집을 했고 제가 거기에 나서서 가서. 맨 처음에 시작할 때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도청을 시민군이 점거하고 있고.

    ◇ 정관용> 점거한 게 22일부터죠?

    ◆ 주소연> 그렇죠.

    ◇ 정관용> 점거하면서부터 취사반을 모집을 한 거고.

    ◆ 주소연> 그렇죠.

    ◇ 정관용> 그런데 그냥 우연히 그 앞을 지나다가 취사반 모집을 보신 거예요? 어떻게 된 거예요?

    ◆ 주소연> 그건 아니고요.

    ◇ 정관용> 같이 시위대에 있다가?

    ◆ 주소연> 그렇죠. 저희가 5월 17일이 아마 그 토요일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그때가 학교에서 하교하고 집에 돌아갈 때는 이미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었고 5월 18일 저희 친정집이 도청하고 좀 가깝습니다.

    ◇ 정관용> 학교에서 또 도청쪽으로 더 가야 집이군요.

    ◆ 주소연> 아니요, 방향이 다르게.

    ◇ 정관용> 좀 다르게?

    ◆ 주소연> 그러니까 이제 도청, 학동 쪽으로 해서 남광주 시장이 있거든요. 거기 남광주 역이 있었고 거기 공터가 있고 그 큰 길이 있는데 거기 건너편이 저희 집이니까 학동 쪽에서 도청을 가려면 저희 집 앞을 통과해서 가야 되는 큰길가. 그랬기 때문에 그거를 좀 많이 볼 수가 있었죠, 시위대도 볼 수 있었고 그게 아마 영향을 또 많이 미쳤을 것 같고. 또 저희 부모님, 아버님이 좀 그런 쪽에 관심이 많으신 분이었고 그래서 그런 영향을 받았고 또 고등학교 때 철학선생님이 굉장히 좀 정의가 무엇인지 이런 거에 대해서 말씀을 좀 해 주신 영향이 좀 있었지 않나. 이게 저희는 제가 62년생이니까 철저한 반공교육 세대이고 멸공교육 세대예요. 그다음에 유신교육을 뼈저리게, 깊이 있게 받았던 그런 세대인데 1부터 10까지 숫자 붙여서 유신 찬양도 하고 그랬어요.

    ◇ 정관용> 그런데 아버님이나 선생님 등등의 영향으로. 그리고 또 광주의 그 현장을 보시게 되니까.

    ◆ 주소연> 그러니까 그것만 가지고 아마 참가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현장을 보고 있었고 저희 집이 가게, 조그만 가게를 했었는데 17일인가 18일인가 그때 이제 시위대가 학동 쪽에서 이렇게 도청 쪽으로 쭉 가는 것이 있었어요. 저희가 계속 집에서 보고 있었고, 밖에를. 보고 있었는데 순간 이렇게 시위대가 막 도망을 가더라고요. 뒤돌아서 도망을 가는데 장갑차가 순식간에 갔어요.

    ◇ 정관용> 장갑차가?

    ◆ 주소연> 네. 장갑차가 정말 빠르게 순식간에 오더니 남광주 거기 공터에 차를 세우고 그때 저녁이었거든요. 한 7시쯤이었는데 거기서 정말 공수부대 사람들이 정말 순식간에 다 튀어나오더니 사람들을 다 붙잡았어요.

    ◇ 정관용> 붙잡고?

    ◆ 주소연> 붙잡고 패고.

    ◇ 정관용> 곤봉으로 때리고.

    ◆ 주소연> 곤봉으로 때리고 그리고 그중에서 한 2명은 우리 집 가게로 들어와서 후다닥 뒷문으로.

    ◇ 정관용> 피신을 했고.

    ◆ 주소연> 피신을 했고. 그러니까 거기 문을 확 열고 와서. . .

    ◇ 정관용> 공수부대가?

    ◆ 주소연> 공수부대가 와서 어디야 이렇게 어디 갔어 이렇게. 그래서 우리는 순간 너무 놀라서 기겁을 하고. 그리고 나서 다시 장갑차에 타고 순식간에 가더라고요.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게 한 10분도 안 돼요. 그러니까 그게 게릴라전인지 모르겠어요. 순식간에 와서 다 치고 패고 데리고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그리고 도망간 사람들 끝까지 골목까지 쫓아가고. 저희 집도 끝까지 쫓아가야 할 텐데 뒷문으로 나가서 그래서..

    ◇ 정관용> 그게 이제 5월 18일부터 19일, 20일 계속 된 거 아닙니까. 그렇죠?

    ◆ 주소연> 그렇죠. 이제 저희 집이 가게를 했으니까, 막걸리를 잔으로 파는 그런 집이었어요. 열악한 데니까 사람들이 매일 많이 오잖아요. 그러면 소문을 물고 오는 거예요. 그래서 소문을 물고 오는데.

    ◇ 정관용> 어디서 무슨 일 있었다더라, 무슨 일 있었다더라.

    ◆ 주소연> 그러니까 오늘은 도청 앞에서 총을 쐈다, 임산부가 죽었다. 뭐 아이가 죽었다, 어디로 끌고 가는 걸 봤다. 막 그런 소문이 막 돌았었고. 그리고 방송에서는 끊임없이 이제껏 있지 않았던 우리와 정말 상황이 다른 이야기들을 계속 보도를 하고.

    ◇ 정관용> 보도 통제로.

    ◆ 주소연> 그런데 사실 제가 5월 17일 이전까지 학교에서 내다봤을 때 그 상황은 평화로운 시위였어요.

    ◇ 정관용> 그렇죠.

    ◆ 주소연> 폭력도 없었고. 돌도 없었고 그랬는데 공수부대 투입되고 나서 굉장히 폭압적으로.

    ◇ 정관용> 진압을 하니까.

    ◆ 주소연> 국가가 시민을 국가권력이죠. 저는 정부라고 그때는 표현을 했는데 국가권력이 시민을. 그러니까 군인이, 그때 당시 저희는 반공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저는 군인은 북한을 쳐야 된다고 생각을 했어요.

    ◇ 정관용> 당연한 얘기죠.

    ◆ 주소연> 그런데 그 군인이 우리를 치는 거예요. 저는 그때 정체성의 혼란은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렇게 반공교육을 철저하게 받았었는데.

    ◇ 정관용> 그런 현장 속에서 며칠이 지나며 결국은 시위대 합류하게 되고 도청에까지 가시게 됐다. 그렇죠?

    ◆ 주소연> 그러니까 거기 탈환되고 나서부터는 그 전까지는 계속 관망하고 도청 앞에 가서 한번 보고 들어오고 무슨 일인지 한번 보고 오고 이 정도였는데 이제 22일 되고 나서는 도청 앞에 아예 가기 시작한 거죠.

    ◇ 정관용> 그렇죠. 그리고 취사반 모집하니까 내가 뭐라도 도와야겠다.

    ◆ 주소연> 그렇죠.

    ◇ 정관용> 그래서 아예 거기서 그냥 도청 안에 계속 계셨던 거죠. 27일 새벽에 아마 진압을 했을 텐데.

    ◆ 주소연> 그렇죠.

    ◇ 정관용> 그러면 언제 빠져나오셨던 거예요?

    ◆ 주소연> 그러니까 거기가 맨 처음에 22일부터는 굉장히 정리가 안 돼 있었어요. 정리가 안 돼 있어서, 맨 처음에는 먹을 것이 없잖아요. 먹을 것이 없으니까 우리가 2명 정도 조를 짜서 식량을 구하러 갔어요.

    ◇ 정관용> 어디로 구하러 간 거예요?

    ◆ 주소연> 저희는 다른 남자 분 한 분하고 양림동 쪽으로 갔어요. 다른 지역 정해서 자기 영역으로 갔는데.

    ◇ 정관용> 노선 정해서. 시민들한테 식량을 달라고 하는 거죠.

    ◆ 주소연> 벨 눌러서 식량하고 김치하고 이런 거 있으면 달라고 했는데.

    ◇ 정관용> 집집마다?

    ◆ 주소연> 그런데 순식간에 줬어요.

    ◇ 정관용> 다 준다 이거죠?

    ◆ 주소연> 그게 저는 그때부터는 광주가 통제됐기 때문에 그랬는데 정말 다 거절 안 하고 다 줬어요. 그래서 순식간에 쌀하고 김치를 얻어서 도청으로 돌아왔고. 그리고 그거 가지고 그때 그날 저녁에 그걸 했으니까 밤부터는 김밥을 말았죠. 밤에는 김밥을 말아서 시민군 외곽에 있는 분, 시민군한테 가져다주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23일 그쯤부터는 시민군이 조금 체계화됐어요. 그래서 외부에 있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이렇게 교대하면서 와서 거기에서 밥을 먹었어요. 그러면 도청 본관이 이렇게 있으면 이쪽 옆에가 이제 별관인데 무슨 회의장 비슷하게 이렇게 돼 있었고 계단이 이렇게 올라가면 여기가 식당으로 썼고 그 밑에는 밥을 할 수 있고 밖에 수도를 빼서 저희는 거기서 설거지하고 여기서 서빙을 하고 했는데 그 앞에 본관 앞에도 그때 당시 22일에 시체가 있었어요.

    ◇ 정관용> 시체가.

    ◆ 주소연> 왜냐하면 관을 했는데, 주인을 가족을 찾지 못한 시체는 사실 어깨까지 열어놨었어요. 관이 서너 개가 있었고. 상무관에 쭉 이렇게 줄을 세워서 쭉 배치를 했는데 저희가 아침 9시가 되면 이제 취사반 담당하는 그 대학생 오빠하고 같이 상무관을 가요. 그래서 상무관 가서 한 바퀴를 돌면서 묵념을 하고 그리고 다시 와서.

    ◇ 정관용> 일을 시작하고.

    ◆ 주소연> 그렇게 했는데 그때 가서 보면 태극기가 다 관 위에 덮여 있어요. 덮여 있는데 이만큼 열려 있는 시신이 있어요.

    ◇ 정관용> 아직 가족을 찾지 못한.

    ◆ 주소연> 아직 가족을 찾지 못한 시신들. 그리고 정말 끝없이 많이 바닥에 끝까지 깔려 있었고 22일, 23일도 이제 거기 앞에서 22일날 그날은 정말 감동적이었던 것이, 그때 피가 부족하다고 다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전대병원, 기독병원, 적십자병원이 아마 주 병원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피가 부족하다고 하니까 너무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 정관용> 헌혈한다고.

    ◆ 주소연> 그래서 피를, 저도 갔는데 저는 어리다고 거절당해서 못했고.

    ◇ 정관용> 거절할 수 있을 만큼 많은 분들이 왔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 주소연> 저는 전대병원에 저희 집하고 전대병원 지나고 도청 이렇게 이 정도 사이거든요. 거기 갔는데 저는 거절당해서 헌혈도 못 했어요. 그리고 관을 짜야 되는데 관이 부족하다 이렇게 또 이야기를 하면 순식간에 거기서 모금이 다 됐어요. 한 그때 당시 돈으로 순식간에 한 80 몇 만원. 그래서 관을 짜는 데 돈이 부족함이 없었고 그리고 그 전에는 다 보호가 됐었는데 그때 당시에 불난 곳이 두 군데가 있어요, 세무서하고 아마 방송국 하나가 불이 났을 거예요. 분노였어요, 그건. 우리 세금 걷어서 그렇게 한다는 분노였고 그 보도가 너무 엉터리로 돼서 그래서 그때 17일인가 18일 아무튼 그 즈음에 19, 20일 아무튼 그 즈음에 한번 불이 났어요. 그 외에 은행이 털리거나 사재기도 없었어요.

    ◇ 정관용> 사재기도 없었고.

    ◆ 주소연> 저는 그게.

    ◇ 정관용> 약탈이나 이런 것도 전혀 없었고.

    ◆ 주소연> 시민군들이 다 지켰고, 스스로 다 지켰어요.

    ◇ 정관용> 바로 그렇게 현장을 목도하신 내용을 27일 진압 직전에 빠져나오셔서 집에 가서 내가 이걸 기록해야 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시게 된 거죠?

    ◆ 주소연> 억울해서.

    ◇ 정관용> 억울해서?

    ◆ 주소연> 그러니까 거기에서 취사반을 하고 26일 날은 고등학생하고 여자를 나가라 그랬어요. 왜냐하면 이미.

    ◇ 정관용> 위험해진다.

    ◆ 주소연> 위험해지니까 판단이 군대가 정규군이 들어왔잖아요. 정규군이 들어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 정관용> 그래서 고등학생, 여자들 나가라고 했는데.

    ◆ 주소연> 그래서 나왔죠. 못 있었죠, 거기에서 2시쯤 나가라고 해서 억지로 쫓겨 나왔어요. 그런데 집에를 가서 있는데 그때부터는 엄마, 아빠가 못 들어가게 지키고 있었죠.

    주소연 서울시교육청 장학관(5.18당시 도청 항쟁 참가자/5.18여고생 일기 작성) (사진=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제작진 제공)

    ◇ 정관용> 집에서 못 나가게.

    ◆ 주소연> 나가면 죽을 수 있으니까. 그랬는데 도저히 못 견디겠는 거예요. 계속 눈물이 너무 나와서 거기서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그냥 계속 펑펑 울다가 잠깐 엄마, 아빠가 안 계신 사이에 다시 빠져서 도청으로 다시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런데 도청에 들어가서 보니까 그때가 한 7시쯤 됐을 거 같은데 거기 정적이 흐르더라고요. 정적이 흐르고 다시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때 한 24일인가 25일쯤에 우리가 이제 들어가서 했던 사람이 10명 조금 더 됐는데 너무 지쳐서 있으니까 가톨릭노동자회 그 언니들이 한 10여 명이 왔어요. 그런데 그 언니들도 다시 들어왔더라고요.

    ◇ 정관용>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 주소연> 예. 그래서 그때 같이 취사반했던 남학생하고 몇 명 같이 해서 한 12~13명 그 정도가 다시 모인 거예요. 그랬더니 저희한테 부지사실, 본관 2층인가 3층에 부지사실이 있어요. 거기에 가서 있으라고 하더라고요. 거기 가서 있었는데 계속 취사반 담당하시는 대학생 오빠가 우리한테 계속 모든 소식을 전해 주죠. 그런데 한 12시가 좀 넘어가고 하니까 졸지 말고 깨어 있으라고 하더라고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깨어 있으라고. 그래서 이제 바닥에 그냥 누워서 이렇게 기대고 있기도 하고 누워 있기도 하고 이러는데 2시가 좀 더 지났던가.

    ◇ 정관용> 새벽 2시.

    ◆ 주소연> 그쯤 됐던가 아마 그쯤 됐을 거예요. 그러니까 대학생 오빠가 와서 나가야 된다. 지금 여기 있으면 다 죽는다, 나가야 된다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때 억지로 또 같이 끌려나왔죠. 그때 유서 쓰고 다 같이 있었거든요.

    ◇ 정관용> 유서까지 쓰고 계셨는데.

    ◆ 주소연> 그래서 다 같이 나왔는데 두 줄로 줄을 서서 옆에 한 줄 벽을 타고 쭉 가서 저희 학교 광주여고 쪽으로 가면 동명교회가 있어요. 거기 동명교회로 피신을 했죠. 아마 거기로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동명교회 들어가면 동명교회 지나서 통과해서 가면 거기 뒤에 유치원이 있어요. 거기 유치원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이제 있으라고 하더라고요. 거기에 있었는데 한 4시쯤 되니까.

    ◇ 정관용>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죠?

    ◆ 주소연> 네. 모든 전화가 다 차단이 돼서 연락두절. 아무하고도 연락이 안 되고 총소리 들리고 헬기 소리 들리고 투항하라 소리 들리고 막 그랬죠. 그리고서 6시 좀 넘으니까 계속 헬기 도는 소리만 들렸어요. 그러니까 이미 끝났다는 소리잖아요. 투항하라, 투항하라 이런 소리만 계속 들리니까 끝났다는 소리인데 7시 조금 넘어가니까 한 7시 반쯤, 7시 반쯤 되니까 동명교회 측에서 연락이 왔어요. 가택수색 있으니까 나가야 된다고.

    ◇ 정관용> 교회도 이제 수색할 거다.

    ◆ 주소연> 그래서 수색을 하니까 나가야 된다 그래서 동네를 또 짜서 2명씩, 2명씩 해서 한 8시쯤 그쯤에 2명씩 나온 것 같아요. 그런데 그때 제가 이렇게 노출이 된 이유는 가톨릭노동자회 김순희 언니라고 있는데 그 언니가 방림동에 살았어요. 저는 학동에 살고. 그러니까 거기에서 가려면 걸어서 가야 되니까 그때는 차도 안 다녔으니까 저희 집을 찍고 이렇게 가는 노선이었고 저희 집에다 저를 데려다 주고 가신 거예요. 그래서 이제 나중에 제가 거기 있었다는 것을 그분을 통해서, 거기 노동자였으니까 다 연락이 되는 사람들이고 그래서 저를 알게 됐고 이제 그리고 저희 부모님은 그날 딸이 나갔다는 걸 알았는데 그 앞에 정규군이 큰 대로변이니까 어마어마하게 열을 지어서 들어갔다는 거예요. 장갑차만 열 몇 대가 지나가고 이렇게 지나가니까 이제 딸 죽었다고 시체를 찾으러 가야 된다고 엄마하고 아빠하고 울면서 엄청 싸우고 계시는 그런 상태에서 제가 들어갔죠. 엄마는 막 펑펑 우시고 저도 펑펑 울고 아버지도 울고 막 난리가 났죠, 뭐. 그런데 그때부터 그 뒤가 더 힘들었어요.

    ◇ 정관용> 지금까지도.

    ◆ 주소연> 네. 그런데 그 뒤는... 거기에 있었다는 것이 들통이 나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잖아요. 그리고 저는 살아왔잖아요. 다른 사람들 죽거나 다 잡혔는데 그 오빠는 다시 들어갔어요. 저희 데려다주고.

    ◇ 정관용> 그 대학생 오빠는 그래서 결국 희생됐군요.

    ◆ 주소연> 그렇죠. 나중에 알았죠, 죽었다는 걸.

    ◇ 정관용> 그래서 그 억울한 마음을 글로라도 남길 수밖에 없었다.

    ◆ 주소연> 그런데 이걸 쓸 때 사실은 두려웠어요.

    ◇ 정관용> 그렇죠.

    ◆ 주소연> 그래서 제가 지금 이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말을 한 거를 쓸 수가 없었어요. 나중에 이 노트가 누군가에게 들통이 났을 때. 그러니까 제가 참 비겁했죠. 들통이 났을 때 내가 어떻게 될 건가 하는 두려움이 더 컸어요. 그래서 굉장히 그 포괄적으로 신문 스크랩을 그래서 하고 거기가 아니다라고 쓰고 했던 이유가 그래서...

    ◇ 정관용> 신문 스크랩하고 이건 아니다. 진짜는 이건데 그건 내가 차마 못 쓴다. 그 마음이 다 들어있군요.

    ◆ 주소연> 그렇죠. 그래서 빨간색으로 긋고 거기에다가 수정을 하고 그리고 울분을 토하면서 사인펜으로 썼었죠. 그런데 정말로 이거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거예요.

    ◇ 정관용> 그렇죠.

    ◆ 주소연> 그리고 정말로 질서정연했어요. 맨 처음에 5월 17일, 18일, 17일은 그 정도는 아닌데 18일, 19일, 20일, 21일 이때는 전쟁이었어요, 사실은. 전쟁이었기 때문에 다 폐허, 도로에 모든 것이 다 깨지고 부서지고 난리가 났는데 22일부터는 시민들이 스스로 알아서 다 청소를 했어요.

    ◇ 정관용> 청소도 하고 질서도 잡고.

    ◆ 주소연> 질서도 잡고 그리고 광장에 거기 분수 광장에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항상 모였는데 그때 모이고 나면 스스로 다 청소를 했어요. 항상 깨끗했어요.

    ◇ 정관용> 그게 바로 해방구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 주소연> 맞습니다. 그래서 해방구라고 했습니다, 저희가.

    ◇ 정관용> 그런 분들한테 장갑차로 헬기로 정규군이 밀고 들어온 것이 광주의 진상입니다.

    ◆ 주소연> 그런데 아마 저는 정상적으로 대학도 갔고 사실 대학도 안 가려고 했어요. 너무 충격이 커서. 그런데 어찌됐든 정상적으로 대학을 갔고 그리고 졸업을 했고 저를 아무도 신고하지 않아서. 정상적으로 생활을 할 수 있었잖아요. 그런데 물론.

    ◇ 정관용> 교사생활을 쭉 해 오셨죠?

    ◆ 주소연> 그렇죠. 마음은 제가 속으로는 곪아터져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게 그리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했고 이 노트가 있는 것은 우리 남편도 몰랐었고.

    ◇ 정관용> 혼자만 간직하고 있었고.

    ◆ 주소연> 간직하고 있었죠. 아무도 몰랐죠. 저희 부모님도 몰랐고. 이걸 내놨을 때 다들 놀랐죠.

    ◇ 정관용> 이걸 언제 공개하게 된 겁니까? 2011년 유네스코기록유산으로 가기까지. 언제 그러면 이걸 타인들에게 보여주기 시작한 겁니까?

    ◆ 주소연> 한 번도 안 내놨었는데 사실은 주로미 씨라는 분이 있어요. 주로미. 그분이 단편영화를 만드시는 분인데 그때 5.18 내용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었는데) 내용이 참 좋았어요.

    ◇ 정관용> 영화의 내용이?

    ◆ 주소연> 영화의 내용이... 저희한테 취지를 설명을 하는데 민초들 있잖아요. 그러니까 뒤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의 삶과 그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 그걸 취재해서 영화화하겠다고 해서 제가 사실은 드러내기가 참 어려워요. 공무원이고 사람들에게 노출이 되는 공직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말 잘못하면 그게 또 여러 가지의 파장이 있을 수도 있고 그리고 그 주변에 시달리는 것도 저는 너무 싫었고 저는 비겁하죠. 그래서 다 숨기고 있었는데 그분이 저를 이렇게 데려다줬던 그분을 통해서.

    ◇ 정관용> 가톨릭노동자회 언니를 통해서.

    ◆ 주소연> 통해서 이제 연락을 해서 저를 찾아왔고 그 취지를 들으니까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취재를 해서 영화 한 편을 다큐멘터리 영화니까 찍고 싶다 했는데 제가 얼굴은 안 된다고 해서 뒷면만 찍는 것으로 하고 이제 취재에 응했었는데.

    ◇ 정관용> 인터뷰도 하시고.

    ◆ 주소연> 인터뷰도 하고 했는데 뒷면만. 그래서 저를 밝히지 않고 하는 걸로 하고 그렇게 해서 5월에 일부 조금 나갔어요. 그때 갈 때 (노트를) 가져갔어요.

    ◇ 정관용> 그게 몇 년도입니까?

    ◆ 주소연> 그게 아마 그 바로 직전이었을 거예요. 문화유산 등재되기 전 해.

    ◇ 정관용> 2010년?

    ◆ 주소연> 그 해에 겨울쯤에 제가 만났고.

    ◇ 정관용> 그 인터뷰 하러 가시면서 노트를 가져가셨고.

    ◆ 주소연> 처음으로 가져간 거예요.

    ◇ 정관용> 다큐멘터리 감독이 이걸 봤고.

    ◆ 주소연> 네. 그래서 그때 다 사진을 찍었고 그래서 그걸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제 세계 기록유산에 등재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팀한테 알려드린 것 같아요, 이런 게 있다고. 모든 자료를 찾고 다녔으니까.

    ◇ 정관용> 그렇죠.

    ◆ 주소연> 그래서 그때 당시에 국가인권회에 계시는 안 국장님, 그분이 직접 오셨어요. 그래서 지금 유네스코에 등재를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데 지금 굉장히 어려움에 처해 있다 반대하는 쪽이 있고 못하게 방해하는 쪽도 있고 그래서 이걸 굉장히 비밀리에 추진을 하고 있고 자료를 이렇게 모으고 있다. 이 자료를 주면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래서 그때 건넨 거예요. 그래서 이제 오픈이 되기 시작했고.

    ◇ 정관용> 지금은 그 일기가.. 모든 사람이 가서 볼 수 있죠?

    ◆ 주소연> 볼 수 있죠.

    ◇ 정관용> 광주에 있죠?

    ◆ 주소연> 광주 기록유산 보관소에 있습니다. 누구나 볼 수 있죠.


    ◇ 정관용> 오랜 세월 노트도 혼자 꽁꽁 가슴 속에 묻고 혼자 가지고 계시다가 이제는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바로 얼마 전 또 집담회에 처음 사실 직접 모습을 드러내고 증언하시기 시작하신 거 아니겠습니까?

    ◆ 주소연> 그렇죠. 제 이야기를 처음 꺼내기 시작한 게 구체적으로 공개적인 자리에는. 그렇게 한 것은.

    ◇ 정관용> 그렇게 하시게 된 계기는 또 뭡니까?

    ◆ 주소연> 사실은 이때 말고 예전에 5.18민주화운동으로 이게 명명됐을 때 한번 KBS인가 MBC인가에서 취재를 한번 한 적은 있어요. 그때 취사반 내용을 한번 말을 해 달라고 해서 간단하게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는 한 번도 안 했거든요. 그다음에 이거 노트가 이제 등재되고 나서 언론에서 많이 찾아왔어요. 왜냐하면 서울시교육청, 그때는 장학사였죠. 그때는 제가 안 한다고 아예 그냥 다 커트를 했었고. 그리고 나서 또 꽤 많은 시간이 흘렀잖아요. 그런데 이거 했을 때 아마 작년에 전두환 회고록이 불을 당긴 것 같아요.

    ◇ 정관용> 아...

    5·18기념재단과 5·18 3단체(민주유공자유족회·민주화운동부상자회·구속부상자회) 소속 유가족들이 2017년 20일 오후 서울 연희동 전두환 전 대통령 자택 앞에서 ‘전두환 회고록 규탄 항의 도중 회고록 폐기를 주장하며 오열하고 있다. 전 전 대통령은 최근 발간한 회고록에 "나는 광주사태 치유 위한 씻김굿의 제물"이다거나 "발포 명령은 없었다" 심지어 5·18 당시 165명이 숨지고 81명이 행방불명됐는데도 "당시 광주에서 국군의 살상행위 및 양민학살은 없었다"고 표현했다. (사진=황진환 기자)


    ◆ 주소연> 너무나 무례하고 너무나 뻔뻔하고 후안무치하고. 사실은 진정어린 사과를 해야 되는 사람이잖아요. 진정어린 사과는, 제가 생각하는 진정어린 사과란 자기의 잘못을 충분히 인정을 하고 상대방의 아픔을 충분히 공감을 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라는 다짐을 해 주는 것이 진정한 사과거든요. 그런데 그거를 덮으려고 그걸.. 아.. 어떻게 그렇게 표현을 할 수 있는지. 저는 그 신문 기사를 보고 이럴 수도 있는 건가 하는, 이럴 수 있나? 다시 한 번 생채기가 올라왔어요. 그런데 그 이후로, 그 이후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왜곡하고 계속 생채기를 내잖아요.

    ◇ 정관용> 그래서 이제는 나라도 이야기해야 되겠다. 내가 본 현실을, 진실을.

    ◆ 주소연> 이거를 쓸 때의 마음하고 똑같은 마음인 것 같아요. 그때 쓸 때 그런 생각이었거든요. 이거를 써서 보관하고 몇 십 년이 지나든 어떻든 이게 사람들이 이게 그때 폭동이 아니었고 폭도가 아니었고 간첩의 저러한 게 아니었다, 북한군이 한 게 아니었다고 한 것이 드러나면 그때 15년 정도를 저희가 폭도로 살았잖아요. 가슴을 졸이면서 폭도로 살았었는데 그때가 되면 진실을 밝힐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후손들은 알아야 되지 않을까 그런 마음으로 썼거든요.

    ◇ 정관용> 그런데 지금도 또 여전히 그게 진실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 주소연> 예.. 미치겠어요.

    ◇ 정관용> 똑같은 마음으로, 이게 진실입니다.

    ◆ 주소연> 그러고 싶어서 집담회를 처음으로 갔어요. 그런데 집담회 가면 광주에서 해서 소문이 안 날 줄 알았어요, 사실은. 그런데 소문이 나서...

    ◇ 정관용> 처음 제가 5월만 되면 어떤 생각이 드냐, 아프다고 하셨고 그런데 이런 말씀을 좀 쭉 털어놓고 말씀하시고 나면 더 아파지십니까? 조금은 좀 덜 아파지십니까?

    ◆ 주소연> 한 번씩 이렇게 털어놓거나 말을 하거나 이러면 사실은 한 일주일 정도는 아픕니다.

    ◇ 정관용> 더 아파요.

    ◆ 주소연> 그런데 생각을 바꾼 것이 이 아픈 것을 겪어내면 밖으로 드러내기 시작하면 나도 좀 치유가 되지 않을까.. 사실은 5.18 묘역도 못 가 보고

    ◇ 정관용> 아직도.

    ◆ 주소연> 사실은 <화려한 휴가>도 못 봤었거든요. 두려워서 못 봤었는데 이번에 <택시운전사>는 봤어요. <택시운전사>를 볼 수 있던 거는 조금 그래도 나아졌다라는 생각이 들고. 내가 여기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면 앞으로 영원히 못 빠져나올 것 같은 거예요. 그 죄스러움과 미안함과 자책과 그런 것에서 제가 못 빠져나올 것 같아서 이제는 조금 해도 되지 않을까, 말을 하면서 나도 좀 치유를 받아야 되지 않을까. 아닌 건 아니라고 말을 해야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용기를 내서 집담회하러 갔었고. 또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는 굉장히 제가 좋아하는 프로그램 중에 또 하나예요. 그래서 전화가 왔기에 그냥 많이 고민하다가...

    ◇ 정관용> 감사합니다.

    ◆ 주소연> 그렇게... 한 번은 아무도 모르게 진짜로 아무도 모르게... 5.18 묘역에 가서 취사반 했던 그 오빠한테 꽃도 헌화하고 미안하다고 하고.... 그때 고통 받는 사람들, 죽었던 사람들, 후유증으로 힘든 사람들에게 정말 나만 피해서, 나만 잘 살아서 미안하다 그때 다 같이 했었는데.. 나는 살아서 정상으로 생활하고 있고.. 그런데 보면 고문당한 사람들이나 경찰에 잡혀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정상적인 생활을 거의 못하고 있거든요.

    ◇ 정관용> 그렇죠.

    ◆ 주소연> 그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그래서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분들도 많고. 제가 이번에 집담회 가서 이야기했을 때 거기 도청에서 활동했던 사람 중에서 가장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저라고 이렇게 표현을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큰일을 겪으면 가족 한 명이 옆에서 죽거나 자살을 해도 그때 그 어떤 치유 지원을 하지 않고 트라우마를 치유하지 않으면 정상적인 삶이 어렵거든요. 가정이 붕괴가 되잖아요. 저희 주변에서 그걸 많이 보잖아요. 그런데.. 광주는 그걸 단체로 겪었거든요. 단체로 겪었고 그 이후에 바로 어떤 정신적인 치유를 받는 게 아니라.. 간첩으로 폭도로 15년 이상을 살았고 숨어서 살았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고. 5.18 유공자를 받은 것이 꼭 어떤 큰 죄를 지은 것처럼 부끄럽게... 사실은 한번 제가 5.18 유공자도 안 받았었어요. 그런데 5. 18 여성단체에서 연락이 왔더라고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조사를 해서 할 건데.. 제가 다 같이 있는데 왜 내가 유공자를 받아야 되느냐 그랬더니 그때 취사반하고 뒤에서 그렇게 지지하고 했던 사람들이 유공자 신청을 안 하면 기록이 묻혀버린다. 그게 없어지면.

    ◇ 정관용> 남겨놔야 된다.

    ◆ 주소연> 그래서 그러면 하겠다라고 그래서 했거든요. 그랬는데 제가 그래서 저는 기타를 받았어요. 최하위 기타죠. 물론 상처가 좀 나기는 해서 했지만 저는 그걸 가지고 한 건 아니니까.

    ◇ 정관용> 부상이나 그런 건 아니니까.

    ◆ 주소연> 그래서 한번 어디를 갔는데 주차요금을 할인해 준다는 게 있더라고요.

    ◇ 정관용> 유공자 할인.

    ◆ 주소연> 그래서 당당하게 내놨죠, 그걸.

    ◇ 정관용> 유공자증.

    ◆ 주소연> 네. 그랬더니 거기 어떤 영감님이 계셨어요. 저한테 빨갱이가 와서 5.18 유공자라고, 5.18도 유공자냐고. 나라를 구했냐부터 시작해서. 그런 제가 폭언을 들었어요. 그 뒤부터는 주차요금 (낼 때 유공자증)을 안 내놓습니다.

    ◇ 정관용> 아니요. 더 내셔야죠, 더 내셔야죠.

    ◆ 주소연> 왜 우리가 그런 취급을 받고 살아야 되는지.

    ◇ 정관용> 제가 선생님께 아까 이렇게 좀 한 번씩 말씀하시고 나면 어떠시냐 여쭤봤더니 한 일주일 더 아프다고..

    ◆ 주소연> 아픕니다.

    ◇ 정관용> 하지만 계속 더 말해야 되겠다. 나도 좀 치유 받아야 되겠다는 말씀도 하셨지 않습니까? 그리고 사실 저도 좀 감정이 울컥 해서 그다음 질문을 드리지 못했는데 질문이라기보다는 여전히 그런 분들이 있고, 전두환 회고록 같은 이런 말도 안 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더 말씀을 하셔야 되고 또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우리 같이 어깨동무하고 같이 치유 받는, 앞으로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주소연> 그런데 지금 이렇게 왜곡된 역사를 지금 만들기 시작하고 다시 재생산하는 것을 보면서 언제 다시 또 되돌아갈지 모르겠구나 하는 두려움이 생긴 거예요.

    ◇ 정관용> 그러니까 우리 주소연 선생님이 계속 말씀해 주셔야 되돌아가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

    ◆ 주소연> 문 대통령이 해 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조희연 교육감님도 광주MBC하고 인터뷰하면서 하셨던 말씀이 5. 18을 교육을 전국화하겠다. 모든 사람이 진실을 알았을 때 역사는 더 이상 왜곡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 정관용> 알겠습니다.

    ◆ 주소연>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 정관용> 오늘 5. 18 여고생 일기를 쓰신 서울시교육청 주소연 장학관 귀한 말씀 함께 들었습니다. 오늘 감사합니다.

    ◆ 주소연>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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