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계엄군의 진압에 의해 숨진 희생자들.(사진=광주광역시교육청 제공)
광주광역시교육청(교육감 장휘국)이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사이에 실종된 유아‧학생‧청소년 20여 명 찾기에 나섰다.
광주시교육청이 파악하고 있는 5월 당시 계엄군에 희생된 초‧중‧고등학생 희생자는 18명이지만 이들 실종자들은 아직 시신과 사인조차 확인이 안 되고 있다.
광주 양동초등학교 1학년 이창현(남, 당시 7살) 학생은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군용 트럭이 줄줄이 전남대 정문으로 몰려들었던 5월18일 다음날인 5월19일 양동시장 인근에 위치한 집을 나선 후 행방불명됐다.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 1학년 임옥환(남, 당시 17살) 학생은 고흥 출신으로 광주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21일 시민을 향한 집중사격이 있은 후 22일 조선대 뒷산으로 계엄군을 피해 피신(귀향)하던 중 실종됐다.
당시 조선대 뒷산에서 군인 발포가 있었다는 증언만 남아있다.
문미숙(여, 당시 10살)양은 21일 학동 삼거리에서 실종됐다.
21일은 '부처님 오신날'이었고 오후 1시 '애국가'가 울린 후 전남도청에서는 세 방향 도로를 향해 집단 발포가 있었다.
문 양의 최후 목격자인 엄마는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있던 문 양을 찾아헤매다 1981년 5월 29일 충격으로 사망했다.
또 1980년 5월 23일 화정동 인근 도로서 계엄군들에게 가족이 체포되는 과정에 행방불명된 백 모(여, 당 5살) 유아를 포함해 조기 취업 학생, 취직을 위해 광주에 왔던 청소년(여), 가사 노동자 청소년, 직물제조공장 청소년 노동자 등 5세에서 19세 유아·청소년 20여 명이 5.18 이후 10일 사이에 실종됐다.
그러나 20년 넘게 실종됐다가 가족을 만난 학생도 있다.
집중 사격이 있었던 1980년 5월 21일 총상으로 사망해 시립공원 묘지 3묘역 무명열사 묘에 안장돼 있던 송원고등학교 2학년 김기운 학생은 22년만인 2001년 10월 유전자 감식을 통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김기운 학생은 두부 총상을 입고 당시 도청 인근에서 희생됐으며 할머니는 충격을 받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 군 '실종' 5년 후인 1985년 그의 고등학교 선생님도 소환돼서 조사를 받는 등 지인들도 어려움을 겪었다.
5월 20일 실종된 김준동(남, 당시 17살) 목공사, 22일 금남로에서 실종된 김남석(남, 당시 19살) 직업훈련원생, 27일 도청 최후항쟁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후 실종된 권호영(남, 당시 18살) 학생 등도 무명열사 묘지에 묻혀 있다가 이때 함께 유전자 감식을 받아 가족을 만났다.
국립 5·18 민주묘지 4묘역 무명열사 묘지에는 약 4세 남자 아이부터 40대 성인 남자까지 5명이 아직 가족을 찾지 못하고 누워있다.
80년 5월 당시 계엄군에 희생된 초‧중‧고등학생 희생자는 18명이지만 80년 5월 19일 서구 화정동에서 실종돼 5개월여 만에 발견된 후 81년 1월 후유증으로 사망한 호남삼육고 강성원(남, 당시 17살), 구타 후유증으로 사망한 인성고 3학년 정창만(남, 당시 18살), 전신타박상으로 사망한 수피아여고 2학년 이요승(여, 당시 18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 신흥고 서강일(남, 당시 18살),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염행열(남, 금오공고 1학년), 고입 재수생 등을 포함하면 그 수가 더 늘어난다.
한편 80년 5월 24일 마을 동산에서 흉부 관통과 후대퇴부 총상으로 사망한 초등 4학년 전재수 학생이 다녔던 효덕초등학교는 매년 교내에 전재수 추모 공간 만들기와 민주화운동 계기수업 등을 실시하고 있다.
이밖에 당시 학생 희생자들이 다녔던 서광중, 동신중, 무등중, 숭의중, 전남중, 조대부중, 대동고, 동성고, 살레시오고, 송원여상, 송원고, 숭의고, 조대부고도 다양한 추모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