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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독립운동가' 김춘배 의사를 아시나요?



전북

    '잊혀진 독립운동가' 김춘배 의사를 아시나요?

    전북 삼례 출신의 기독인으로 나라를 위해 일생을 바친 독립운동가

    ■ 방송 : 전북CBS 라디오 <찬양, 찬양이="" 있는곳에=""> FM 103.7 (12:05~13:00)
    ■ 진행 : 유연수 아나운서(편성팀장)
    ■ 대담 : 김경근 목사(전주 채움교회)

    - 삼례지역 명문 기독교 가정 출생
    - 일제의 수탈로 온 가족이 만주 연길로 이주
    - 1934년 '함남권총의거'를 일으켜 일본 군·경 2만 명 추격
    - 1943년 안타깝게도 옥중에 소천한 것으로 추정
    1945.5.15. 김춘배가 8년형을 마치고 만주에서 찍은 가족사진. 윗줄 왼쪽부터 김성배 목사(형님), 독립운동가 김춘배, 앞줄 오른쪽이 김종수 장로(아들, 당시 8세)(사진=김경근 목사 제공)

     


    ◇ 유연수>올해는 일제강점기 당시 1919년 3월 1일에 시작돼 전국에 자주국가를 갈망하는 외침이 들불처럼 번졌던 역사적인 사건이죠. 3.1운동이 일어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오늘로부터 정확히 한 달 남았는데요. 우리 전북출신의 기독 인물들이 당시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는 사실. 알고 계시나요? 잘 알려진 사건이나 인물도 많지만 빛도 없이 잊혀져가는 분들이 아마 더 많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번 한 달 동안 찬찬 초대석 시간에서는 기독교를 중심으로 벌어진 독립운동 사건과 인물들에 대해서 조명하는 시간 마련했습니다. 그 첫 번째 시간, 잊혀진 독립운동가 삼례출신의 김춘배 의사에 대해 소개하겠습니다. 제 옆자리에 그 분의 손자 되시는 분 나와계십니다. 전주 채움교회 김경근 목사님. 안녕하세요?

    ◆ 김경근>안녕하세요 김경근입니다.

    ◇ 유연수>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사회 내에서 잊혀져가는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는 활동들이 부쩍 늘어난 것 같은데요 이 시점에서 목사님의 소회부터 듣고싶은데요.

    ◆ 김경근>사실 저희 아버지께서 많이 가슴아파 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 제가 어려서 잘 이해하지 못했었는데요...이제는 (제가)철이 들어서 그런 생각이 나서 더 안타깝습니다. 좀 더 일찍 관심을 가지고 아버지 살아계실 때에 살펴봤어야 했는데 좀 늦은 감이 있어서 아버지께 죄송하기도 하고...그런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 유연수>김춘배 의사께서 친할아버지 되시는데 조부님께서는 삼례 지역에 명망 높은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셨다고 들었는데요.

    ◆ 김경근>예, 우리나라 특별히 호남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난 이후에 선교사들을 통해서 복음이 이땅에 전해졌습니다. 그 때 당시 많은 분들이 기독교로 귀의하게 됐는데요 그 때 저희 고조부와 증조부 5형제께서도 모든 가족과 함께 그 때 예수를 믿고 1903년도에 삼례제일교회를 마로덕 선교사님과 더불어서 함께 개척하는데에 함께하시고 증조할아버지께서는 최초의 삼례제일교회의 영수가 되시기도 하셨고...또 뿐만 아니라 삼례제일교회에서 근대교육기관으로 영어학교를 세웠을 때에 저희 증조부께서는 그 영어학교에 재무를 맡으셨던 걸로 기록이 되어져있는 것들을 보고 알았습니다.

    ◇ 유연수>삼례 지역에 교회와 학교도 개척할 정도로 평온한 삶을 이어가셨는데 별안간 온 가족이 저 멀리 만주지방 간도로 이주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어떤 일이 있었던거죠?

    ◆ 김경근>1910년도에 일제강점이 있고난 이후에 얼마 되지 않아서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일제가 식량의 수탈장소로 삼례를 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삼례에 일본 사람들이 대단위 농장을 만들면서 그 때 삼례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농경지를 일제가 거의 헐값으로 거의 강탈하다시피 하는 그러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조부께서는 그 때 당시 한학을 공부하셔서 삼례에서 한의사로 활동을 하셨고 저희 증조할아버지 오형제 중에서 농사짓는 분도 계셨지만 저희 증조부께서는 당시 삼례에서 포목상을 하셔서 경제적으로는 넉넉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일본의 수탈이 점점 더 극심해지면서 결국은 견디지 못하고 1918년 초겨울에 모든 가족들...한 삼십 대여섯 분들과 더불어서 일부 삼례제일교회 교우들과 함께 만주로 이주하게 되는 그런 상황을 기록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 유연수>수탈을 견디지 못해서 저 멀리 척박한 땅으로 이주를 하게 되는데 1918년 당시 조부(김춘배 의사)께서는 나이가 어떻게 돼셨어요?

    ◆ 김경근>저희 할아버지의 제적등본을 떼어 보니까 1906년생이시더라고요 그래서 이제 삼례제일교회의 기록에 보면 영어학교 4학년까지 마친 것으로 보면 한 12살 정도 되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 유연수>12, 13세 정도의 소년이었겠네요 나라잃은 설움을 온몸으로 뼈저리게 느끼면서 독립에 대한 열망을 이 때 쯤 키우게 되지 않았나 싶은데요.

    ◆ 김경근>미국에 계신 저희 작은아버지의 기록을 보면 만주로 이주하셔서 저희 큰할아버지이신 김성배 목사님과 저희 아버지, 저희 할아버지께서도 명동학교를 조금 다니신걸로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 유연수>명동학교가 어디에...

    ◆ 김경근>만주 연길에 있는 명동학교...그러니까 그 때 당시에 윤동주 시인을 비롯해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되어지게 되는 기독교학교에서 나라에 대한 역사의식을 가지게 되셨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 유연수>그러면 김춘배 의사께서 본격적으로 독립활동을 펼치게 된 시기는 언제부터였는지요.

    ◆ 김경근>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저희 할아버지께서 1927년도에 만주에서 정의부군 활동을 하십니다. 거기에서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시다가 결국은 일경(일본경찰)에 붙잡혀서 옥고를 치르게 되셨는데요 그 때 당시가 저희 아버지께서 막 태어나신 직후였습니다. 그러니까 정의부군 활동 시작 한 것이 아마 1925년에서 26년 경 되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이 되어집니다.

    ◇ 유연수>1906년생이시니까 열 아홉, 스물...청년의 나이에 독립운동을 펼치시게 됐고요...이 시간에 다 소개할 수 없을만큼 수많은 활동들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정점을 찍은 사건이 있었죠. ‘한남권총의거’에 대해서 자세히 소개 해주시겠어요?

    ◆ 김경근>만주에서 정의부군 활동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시다가 붙잡히셔서 6년형을 언도받으시고 복역중에 또 탈옥을 하십니다. 그래서 1년 8개월이 추가되어서 거의 만 8년 만에 출옥을 하게 되십니다. 그 때 연도가 1934년 5월인데요 그 5월에 나오셔서 사실 저희 큰할아버지께서 계셨던 청진쪽에 가셔서 거기에서 생활을 하시다가 그냥 계실수가 없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출옥한 지 한 5개월 여 만에 함경남도 신창에 있는 신창주재소 무기고를 습격해서 그 안에 있던 권총이라든지 장총이라든지 동아일보 당시 기사를 보면 총 8정과 실탄 700발을 탈취하는 그런 큰 사건이어서 그 때 당시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의 경우에는 호회로 2면으로 나뉘어져서 대대적인 기사가 나온 것을 확일할 수가 있었습니다.

    ◇ 유연수>수많은 일본경찰이 할아버지(김춘배 의사)를 잡기 위해서 쫒았다는 기사를 본 것 같은데요.
    김춘배 의사에게 추서한 건국훈장 독립장과 한남권총의거 당시 동아일보 기사(사진=김경근 목사 제공)

     


    ◆ 김경근>그렇습니다. 그 때 당시 기사를 보면 저희 할아버지께서 함남권총사건 이후에 19일 여 동안 도망 다니시는 중에 일본 경찰이 연인원 2만 명 정도가 동원이 되고 그 때 당시에 서울 경성에서부터 전문가들까지 파견이 되어져서 그 때 경비로 해서 약 2만 원이 들었다고 신문기사에 기록이 되고 있는 것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 유연수>추격하는 비용이 2만 원...그 당시 2만 원 지금은 얼마정도로 추산할 수 있나요?

    ◆ 김경근>1990년도에 저희 할아버지의 일로 아버지께서 독립장을 훈장 추서 받으시고 난 다음에 전주 산돌교회에서 간증하신 간증기록문이 있습니다. 그 어렸을 때의 기억으로 보면 그 때 당시(1934년도) 쌀 한가마니의 가격이 8원 정도였다고 하니까 어마어마한 돈이 예산으로 투입되지 않았는가 생각이 되어집니다.

    ◇ 유연수>그만큼 일본군이나 경찰에게는 꼭 잡아야되는 독립운동가 중에 한 분이었군요.

    ◆ 김경근>그렇습니다. 평택에서 일하시는 황수근 선생님을 통해서 확인된 바에 의하면 저희 할아버지의 사건이 1934년 10월 2일부터 3일 새벽에 벌어진 사건인데 신문기사는 동일하게 10월 22일부터 동아일보, 조선일보, 매일신보, 부산일보, 조선중앙...이런 기관지에 일제히 보도가 되고 있어요. 그래서 20여 일의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해서 제가 황수근 선생님께 물어봤더니 황수근 선생님의 연구논문 중에 보면 그 때 당시에 일본이 보고있는 ‘경무휘보’라고 하는 잡지에 그 사건이 너무 큰 사건이었기 때문에 요즘으로 말하면 언론을 통제해놓고 이 사건이 수습되고 난 다음에 일제히 모든 언론에 공개하면서 신문기사가 그렇게 나게 되었다라고 하는 그런 과정을 설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 유연수>그렇군요. 그 당시에 있었던 주요 신문에 다 실릴 정도로 굉장히 큰 사건이었는데 지금 우리들에게는 살짝 잊혀져있는 역사였어요. 그러면 김춘배 의사께서는 잡히시게 되고 다시 감옥에 가시게 된거에요?

    ◆ 김경근>무기징역을 언도 받으셔서 서대문 형무소로 옮겨지고 옥고를 치르게 되셨습니다.

    ◇ 유연수>8년 형을 사시고 나오시자 마자 다시 붙잡혀서 무기징역형을 받으셨고...그 때가 34년도인가요?

    ◆ 김경근>그렇습니다.

    ◇ 유연수>그러면 45년 해방 될 때 까지는 계속 감옥에 계셨고요?

    ◆ 김경근>저희 아버지께서 국가보훈처에 신청서를 내실 때에는 1946년 12월 1일 돌아가신 걸로 기록해 놓으셨어요. 그런데 제가 작년에 관심을 가지고 100년 전에 저희 고조부나 증조부들의 제적등본을 삼례에서 떼어서 확인해보니까 제적등본 기록에는 1942년 7월에 돌아가신 걸로 그렇게 기록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아버지께서는 아마 할아버지께서 옥사 하신 것도 모르시고 그냥 46년 12월 1일로 돌아가신 걸로만 알고 계셨는데 이번에 기록을 찾아보니 결국은 42년도에 옥사하신 걸로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 유연수>안타깝게도 해방 대한민국을 보지 못하시고 소천하셨군요. 평생 독립운동하시고 옥살이를 하시느라 정말 많은 세월을 보내시면서 정작 가정은 돌보지 못하셨어요. 아버지께서 김춘배 의사님을 굉장히 그리워하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아버님 생전에 조부님을 어떻게 기억하시던가요?

    ◆ 김경근>사실 저희 아버지께서 할아버지와 같이 생활하신 것은 불과 5개월 여 밖에 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1927년 1월생이신데 할아버지가 27년 2월에 군자금 모금활동 때문에 붙잡히셔서 옥고를 치르시게 되거든요. 그리고 나서 8년 만에 나왔을 때에 저희 아버지가 8살이셨는데 5월에 출옥하셨다가 그 해 10월에 다시금 붙잡혀서 (감옥에)들어가셨으니까 불과 한 5개월 여 밖에 얼굴을 맞대고 생활하지 못하신 것 같아요. 그래서 평생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를 그리워 하시면서 사셨고, 항상 저희 아버지 8살 때의 기억으로는 학교를 가면 일본 순사가 긴 칼을 옆에 차고 졸래졸래 따라다녔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거든요.

    ◇ 유연수>요주의 인물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마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힘들었다고 하는 말씀만 하시지 할아버지하고의 어떤 기억이나 추억이 거의 없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 유연수>거의 신문에 나온 보도로 아버지를 접하고, 들리는 소문에 의해서만 아버지를 기억하고 이러셨을 것 같은데...김춘배 의사님 뿐만 아니라 아버지를 평생 홀로 키우셨을 할머니는 또 어떤 분이셨나요?

    ◆ 김경근>(아버지께서)할머니에 대한 말씀은 거의 안하셨어요. 왜냐하면 34년도에 함경남도 청진 쪽에서 그 사건이 있고 난 다음에 할머니하고 아버지께서 다시 가족들이 계시는 연길쪽으로 들어가셨는데...할머니에 대한 말씀은 많이 안하셨어요...할머니도 아마 일찍 돌아가신 걸로 지금...예상을 할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할아버지의 ‘함남권총의거 사건’이 있을 때에 숨어 다닐 때에 할머니를 붙잡아다가 일본에서 고문을 많이 하셨거든요. 그래서 아마 그런 후유증 때문에 할머니도 일찍 돌아가시지 않았는가 그렇게 생각을 해봅니다.

    ◇ 유연수>그러시군요. 그러면 모든 가족의 터가 삼례에서 연길로 옮겨갔는데 독립 이후에 다시 이 지역으로 돌아오신거에요?

    ◆ 김경근>이 지역으로 돌아오신 분은 사실 김성배 목사님...저희 큰할아버지신데 이 분만 이쪽으로 넘어오신거고 저희 증조할아버지의 후손들 중에는 대부분 중국에 많이 살아계시고 북한쪽으로 넘어오셔서 북한에서 사시는 분들도 계시는 것으로 전해들었습니다.

    ◇ 유연수>참...이런 이주의 역사, 아픔의 역사를 들으면 한 가정의 아픔이 아니고 우리나라 전체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렇게 생각이 드는데요...그렇게 뒤늦게 정말 늦은 1990년 광복절에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김춘배 의사께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으셨어요. 그 인고의 세월을 훈장 하나로 보상 받을 수는 없겠지만 그 당시 김경근 목사님도 함께 계셨을 것 같은데 목사님께서의 감정은 어떠셨어요...

    ◆ 김경근>많이 기뻤죠. 저희 아버지께서 사실 정부에 신청한 것은 1978년경으로 제가 기억하고 있는데 10년이 훨씬 지난 이후에 정부로부터 훈장을 추서 받았을 때에 사실 저는 결혼하고 신학교에 다닐 때였기 때문에 너무 기뻤습니다. 또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그려지고 있습니다.
    독립운동가 김춘배 의사의 일생을 다룬 서적(사진 = 김경근 목사 제공)

     


    ◇ 유연수>그렇군요. 목사님께서는 뒤늦게라도 김춘배의사의 활동들 잊지 않고 후대에 전하기 위해서 독립운동가 김춘배 라는 책을 펴내셨어요. 자료를 모으는 일들이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자료수집들은 어떻게 하신거에요.

    ◆ 김경근>저희 아버지께서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스크랩 해 놓은 것을 저희에게 남겨주셨는데요. 그 나머지 자료는 사실 작년에 인터넷 검색중에 우연히 삼례에서 활동하시는 이승철 선생님의 칼럼을 찾아서 읽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실 저희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이승철 선생님께서 어떻게 아시고 ‘이런 분을 삼례에서 기억하셔된다’라고 하는 칼럼을 여러차례 쓰신 것을 보면서 여러 자료들을 찾게 된 것이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생각이 되어집니다.

    ◇ 유연수>그렇군요. 학자의 정리에 의해서 우연히 인터넷 검색하다가 “이거 우리 할아버지 이야기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드셔서 자료를 수집하게 되셨고 책까지 내시게 됐는데. 후대에 ‘독립운동가 김춘배 의사’는 어떤 인물로 기억되길 바라시나요.

    ◆ 김경근>얼마전에 전라북도 광복회 회장이신 이강한 회장님을 뵀을 때에 전북에서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분들의 대다수가 일제강점기 이전에 의병활동을 하시다가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신 분들이 많고 그가운데에서는 특별히 ‘기독교신앙으로서 독립운동에 헌신하신 분들은 흔치 않다’ 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 우리 기독교인들이 나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되는지에 대해 한번 우리가 다시 깊이 생각해봐야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폴란드의 비극적인 역사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적혀있는 글을 보면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라고 하는 것처럼 우리 선친들이 나라에 대해서 또 신앙을 가지고 어떻게 생활했는가를 우리 후대가 기억하지 않으면 지금도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에 신앙인들이 그냥 숨는 것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분연히 일어설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 유연수>이런 아픔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꼭 기억해야 된다 이렇게 말씀을 해주셨고요. 마지막으로 잊혀져가고 있는 수많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아직도 많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대표해서 한 말씀 하신다면요.

    ◆ 김경근>신앙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믿는 바를 삶으로 사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이 되어집니다. 성경에도 보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하는 말씀처럼 이제 한국교회가 자꾸 개교회주의 내지는 또 개인구원만 강조하고 있는 이러한 때에 우리 신앙인들이 믿음의 눈을 가지고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 우리가,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를 한번 고민하는 모습이 이런 시점에 필요하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 유연수>기독교신앙인으로서 나라를 위해서 어떻게 행동해야될지 우리 스스로 이런 김춘배 의사 같은 믿음의 선조들을 통해서 우리 스스로를 다짐해보는 그런 시간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독립운동을 하면 삼대가 망하고, 친일을 하면 자손들이 흥한다' 이런 씁쓸한 속설이 무너져버리는 시대가 속히 오길 바라면서 오늘 말씀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 김경근>감사합니다.

    ◇ 유연수>단순히 한 집안 어른의 일대기가 아닌 우리 대한민국의 살아있는 역사를 정리해주셨다는 점에서 자유대한민국 시대에 사는 수많은 이들을 대신해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1930년대 활동했던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김춘배 의사의 친손자, 전주 채움교회 김경근 목사님과 이야기 나눠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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