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허스토리'에서 관부재판 원고단 단장 문정숙 역을 연기한 배우 김희애. (사진=YG엔터테인먼트 제공)
"처음에는 그렇게 할 게 많은 걸 생각도 못하고 그저 좋아했어요. 겁이 없었죠."
영화 '허스토리'의 문정숙은 어찌보면 그간의 전형적인 중년 여성 캐릭터들과 상당히 다른 지점에 서있다. 실제로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많은 캐릭터들과 달리, 그는 사회의 핍박이나 압박에 대한 도전을 정면으로 받고, 자신의 두 발로 꼿꼿이 선 채 세상을 견뎌낸다. 눈빛은 굳은 의지로 단단하고, 입에서는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의 표현들이 쏟아져 나온다. 분명히 한 아이의 어머니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삶을 욕망하고, 결국엔 딸마저도 어머니의 행동을 지지해준다.
스크린과 브라운관 속 김희애와 문정숙은 많은 부분에서 다르게 보이겠지만 스스로에 대한 도전을 끈기있게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닮았다.
"하다 보니 벽이 너무 높았어요. 내가 가지고 있던 기존의 것들을 보이면 안될 것 같아서 다 지우고 처음부터 시작했어요. 내가 갖고 있는 것에 만족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게 '꼰대'라고 생각했고요. 나도 한 번 뛰어넘어보자, 어떤 것도 할 용의가 돼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끝까지 해 본 작품이라 후회는 없습니다."
김희애를 어떤 사람이라고 판단하기 전에 우리는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된다. '허스토리'의 원고단 단장부터 시작해 '미세스 캅'의 형사, '밀회'의 위험한 로맨스까지, 김희애는 언제나 자신을 들끓게 하는 역할을 선택해왔다.
"전 결혼한 배우이지만 누구의 어머니나 이모 역할은 잘 맡지 않고 한 사람의 주체로 혹은 사회적 파장이 있는 역할을 많이 맡았었던 것 같아요. 이번에도 처음보는 캐릭터였기 때문에 하고 싶고 욕심이 났죠. 그만큼 힘들었어요. 사투리는 한다고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운동선수가 본인 경기를 계속 보면서 단점을 고쳐 나가듯이 저 역시 제 사투리를 녹음해서 듣고 다니면서 계속 연습했어요. 사실 제가 목소리가 좀 작고 약해요. 문정숙을 하려면 그런 것들을 다 벗어던지는 노력이 필요했어요."
영화 '허스토리'에서 관부재판 원고단 단장 문정숙 역을 연기한 배우 김희애. (사진=YG엔터테인먼트 제공)
김희애가 처음부터 '위안부'와 정신대 피해 여성들을 다룬 이 영화에 묵직한 사명감을 가지고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할머니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분노하는 문정숙 역을 준비하면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아마 이 영화가 보통 영화였으면 사투리 문제도 그냥 망신당하고 말지 이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런데 하면서 점점 큰일났다 싶은 게, 개인적인 커리어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그분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안되는 문제였거든요. 그래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딱 들었어요. 뒤늦게 영화를 찍고 나서 참 부끄러웠습니다. 난 뭘해야 되나 싶더라고요. 진심을 다해서, 마음을 함께하자는 생각이 들었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그런 범죄를 저지른 건데, 사실 직면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한 일이잖아요. 하지만 진심을 다한 연기가 이런 일들을 알리는데 작게나마 도움이 된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관부재판에 대한 역사 또한 몰랐지만 이렇게 알게 돼 다행이고, 또 알지 못했음에 부끄럽네요."
함께 호흡을 맞춘 김해숙, 예수정, 이용녀, 문숙 등의 배우들은 그야말로 백전노장들이다. 김희애는 어떤 장면에서든 떨리는 마음으로 임하는 그들을 보며 배우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에 대해 많은 것을 느꼈다.
"조용히 수줍게 오셔서 연기하고 가시고 그랬어요. 정말 존경스러웠어요. 본인 장면을 어떻게 하면 피해주지 않게 할 수 있을지 고민 많이 하셨고 저희끼리 아주 한 마음이 됐죠. 그분들이 해내시는 걸 보고 역시나 싶었어요. 사실 그 정도 경력이면 그 동안 해왔던 연기로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다들 긴장하시고 떨려하시는 모습을 보니까 정말 저런 마음을 잃지 않는 게 '초심'을 잃지 않는 배우가 되는 거구나 싶었습니다."
영화 전반을 차지하고 있는 법정 장면에서는 서로 말없이도 통하는 기류가 흘렀다고 한다. 김희애는 당시를 '프로들만의 무엇인가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합을 맞춰 본 건 아니었는데 저 사람은 이런 색깔로 장단을 맞추겠구나 하는 프로들만의 뭔가가 있거든요. 그게 다 합이 맞았어요. 한 방향을 보고 있으니까 그 순간만큼은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던 거죠.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었어요. 거의 다 재일동포 배우들이었고, 검사 역 한 분이 정말 일본인이셨거든요. 제가 할머니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그분에게 심한 욕을 하는 장면을 찍었는데 나중에 본인이 잘못한 것 같아서 정말 너무 반성이 됐다고 그러시더라고요. 마지막 강연회 장면에서는 재일동포 배우들에게도 너무 감사했고, 실제 당시 후원회 분들도 일본인들임에도 같은 민족이 잘못한 것을 사과하라는 입장이었잖아요. 정의는 살아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감동적이었어요."
영화 '허스토리' 스틸컷. (사진=NEW 제공)
극중 친구로 등장하는 김선영과의 돌발적인 스킨십 장면은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 묻는 질문이 나왔다. 김희애가 그 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생각한 애드리브였단다.
"김선영 씨를 설득하는 그 장면이 정말 최대의 난관이었는데 잠도 편히 못 잤어요. 김선영 씨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은 상황에서 일단 감독님에게는 당부를 했어요. '진하게 할 거냐'고 묻길래 '어떻게 될 지 모르겠다'고 했죠. 혹여라도 이 영화의 색을 흐리게 하면 안되니까 잘 봐서 편집해달라고 했던 거 같아요. 그 당시 감정이 너무 간절했고, 저를 가장 옆에서 도와준, 배포가 큰 동생이니까 어떤 것도 받아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아니나다를까 연기 잘하는 김선영 씨가 리액션을 너무 잘하면서 받아주더라고요. 브로맨스, 브로맨스하는데 여자만의 의리랄까 이런 게 있었던 장면 같아요."
문정숙 역은 명확히 모델이 된 실존 인물이 있다. 아흔이 넘은 현재까지도 한국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김문숙 씨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실제로 그는 피해 할머니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수년에 걸쳐 부산과 일본을 오가며 관부재판의 원고단 단장으로 활동했었다.
"처음에 보면 사회적인 지탄을 받기도 하고, 오해도 받으셨잖아요. 그럼에도 꿋꿋하게 자기 할 일을 해내는 모습이 공감이 갔어요. 영웅적인 그런 게 아니라 보통의 한 사람이 변화하는 모습도 공감이 갔고요. 아마 김문숙 회장님은 처음부터 공적인 도리로, 자연스럽게 그 일을 시작하게 되신 것 같아요. 90년대 여성 사업가로서 살아가는 삶이 쉽지는 않으셨겠죠. 사업도 힘들어지고, 집도 줄여가면서 할머니들을 도운 것이 좋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서 할머니들을 만나서 가랑비 젖듯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변화돼 나간 거죠."
여성영화 제작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이 때, 김희애와 노장 여성 배우들을 중심으로 한 '허스토리'는 좀 더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준다. 영화는 제목에도 '여성들이 그려낸 연대와 투쟁의 역사'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남성 관객들의 공감 가능성을 묻자 김희애는 '허스토리'가 성별을 떠나 누구나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처음에 여성과 남성 이런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거든요. 인터뷰하면서 여성영화 관련 이야기를 들어서 뒤늦게 인식이 된다고 해야 하나요. 사실 정말 보편적인 인간승리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을 해요. 어쨌든 제게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원동력이 된 것 같아 좋은 영화입니다."
영화 '허스토리'에서 관부재판 원고단 단장 문정숙 역을 연기한 배우 김희애. (사진=YG엔터테인먼트 제공)
김희애는 선배든 후배든 끊임없이 함께 일하는 배우들을 보며 자극받는 삶을 살길 원한다. 일이 힘들어 그만두고 싶었던 20대 시절을 지나왔지만 오히려 젊은 배우들이 스스로를 끊임없이 연마하는 모습을 보며 자극을 느낀다고. 그에게 연기란 아직도 자신의 삶에서 끝나지 않은, 도전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좋은 자극이든 나쁜 자극이든 그런 걸 받고 싶어요. 최근에 어떤 영화를 보고 역할이 너무 매력적이라 나도 더 열심히 해서 저런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그런 것들이 제가 현역으로 일할 수 있게 하는 것 같아요. 20대는 너무 힘들었어요. 예전에는 주먹구구로 일하고 그랬으니까 너무 하기 싫었거든요. 그런데 아이돌 그룹 출신 배우만 봐도 너무 성실하고, 전문적이고 열심히 해요. 그들이 그렇게 하면 저도 당연히 열심히 해야죠."
배우로서의 김희애와 인간 김희애의 균형. 김희애는 작품을 하지 않을 때 오히려 분주한 삶을 살아간다. 당대를 호령했고, 지금도 엄연한 탑스타이지만 김희애는 오랜 세월 동안 평범한 생활을 잃지 않으려는 균형잡기를 내면화해왔다. 예를 들어 영어 공부 등은 그가 일상에서 가장 흔하게 보내는 일과 중 하나다.
"장기 목표를 세우면 하루에 할 것들이 있어요. 마치 숙제를 하듯이 사는 거죠. 그게 한 달이 되고, 또 모여서 10년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제 인생이 있고, 배우의 인생이 또 다른 지점에 있어요.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배우인데 그런 균형을 맞추면서 살다보니 기회가 왔고, 제 연기생활에 있어서도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가장 평범하게 내 일상을 살아가다 일이 주어지면 해내고, 또 다시 제 일상과 삶을 살고…. 배우로서의 수명연장도 그렇게 되는 것 같고, 일종의 건강비법이죠. 저를 되게 우아하게 보실 수도 있는데 사실 굉장히 평범하고 단순해요."
남들보다 대사를 외우기가 어려워 3~4배 노력하는 배우. 나문희처럼 70대에도 희노애락을 주는 배우. '끝날 때까지 끝이 아니라'는 영화 속 문정숙의 대사처럼 김희애는 자신만의 속도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완전히 툭 치면 대사가 나올 정도로 남들보다 3~4배 노력해요. 잘 외우지 못하기도 하고, 그래서 자신감이 없어지거든요. 스스로 좋지 않은 생각을 하거나 그러면 좋을 게 하나도 없더라고요. 일부러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을 갖고,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해요. 사실 어떤 작품을 촬영할 때는 이게 얼마나 귀한 작품이었는지 불행히도 100%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요. 나이가 들수록 일에 대한 소중함을 느끼는 거 같고요. 제가 이 일을 이렇게 오래할 줄은 몰랐거든요. 나문희 선배님을 보면서 얼마든지 가능하고, 나도 이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내 나이 또래 배우들이 현역으로 뛰는 게 반갑잖아요. 또래가 사라진다는 건 큰 슬픔이죠. 이 작품이 제 필모그래피에서도 오래 기억되는 작품이 됐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