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20년 폴란드 바도비체에서 재봉사 아버지와 학교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俗名은 카롤 요제프 보이티야.
엄격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던 요한 바오로 2세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지난 1946년 사제서품을 받고 성직자의 길로 들어섰다.
폴란드가 공산화된 이후에도 남아 신학대학 교수로 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67년 추기경으로 임명된 뒤 1978년 심장마비로 34일만에 임기를 마친 요한 바오로 1세의 뒤를 이어 교황 선거회(Conclave)투표에 의해 58세의 나이로 교황으로 선출됐다.
455년 로마 교황청 역사상 최초로 非 이탈리아인이 교황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교황에 즉위한 요한 바오로 2세는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고국인 폴란드를 방문해 바웬사의 자유노조 운동을 지원하는가 하면 칠레 피노체트, 필리핀의 마르코스등 독재정권을 비난하는등 세속의 문제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81년에는 구 소련 KGB의 사주를 받은 것으로 알려진 터키인 메흐메트 알리 아흐카에 의해 복부에 총격을 당해 수술을 받기도 했다.
지난 86년에는 교황으로서는 처음으로 유대인 회당을 방문해 가톨릭과 유대교간의 구원을 풀기도 하는 등, 요한 바오로 2세는 지난 99년까지 남극을 제외한 모든 대륙 118개국을 방문하는 왕성한 활동력을 보였다.
우리나라에는 지난 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에 맞춰 처음 방문해 김대건 신부등 한국 천주교 순교자 103인에 대한 시성식을 집전했으며 지난 89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 성체대회에 대회장 자격으로 두번째 방한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선교활동을 하면서 매주 라디오 방송을 하고 정기적으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을 하는 등 선교활동에 자유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상당히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다.
낙태와 여성 사제에 대해서는 반대입장을 견지해왔는데, 특히 여성 사제에 대해서는 지난 94년 ''''예수가 오직 남자만을 사제로 받아들였다''''며 반대입장을 밝혀 지지자들로부터도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다.
노컷뉴스 이기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