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전 11시 서울 문호아트홀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서른세 번째 정규 앨범 '아름다운 저녁' 발매 기념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어제가 정경화의 생일이어서 이날 간담회 전 간소한 깜짝 이벤트가 진행됐다. (사진=워너뮤직코리아 제공)
“우연이었죠. 하다보니 여기까지 왔습니다.”
올해로 희수(稀壽, 70)를 맞는 바이올린 여제 정경화에게 평생을 바이올린과 함께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묻자, '우연'이라 말할 정도로 자신도 의아하다는 뉘앙스의 답변이 나왔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서는 매순간 ‘피, 땀, 눈물’을 흘린 정경화의 노력이 인생에 배어 있었다.
정경화는 새 앨범 '아름다운 저녁'(Beau Soir)을 발매했다. 33번째 정규음반이다. 27일 서울 광화문 문호아트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정경화는 “사실 33개나 앨범 녹음을 했다는 건 세어보지도 못했다. 어제 귀띔해줘서 알았다”고 했다.
그는 “33번째 녹음이면 익숙하겠다 싶겠지만, 매번 녹음을 마칠 때마다 죽을 정도로 힘들어서 더는 못하겠다 할 정도로 정성을 다한다”며 “한 프로젝트를 마칠 때마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했었다”고 전했다. 그런 그가 33번째 녹음을 했다는 말을 들으니, ‘하나하나 하다 보면 이렇게 쌓이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바이올리니스트, 특히 여성이 앨범 33장을 발매한 것은 음악사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이례적이다. 63년생인 독일 출신의 안네 소피 무터가 40여 장의 앨범을 냈지만, 그는 지휘자 카라얀의 전폭적인 도움을 받았다. 반면, 정경화는 동양인 출신으로 누군가의 지원 없이 이룬 일이기에 그 의미가 남다르다.
27일 오전 11시 서울 문호아트홀에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의 서른세 번째 정규 앨범 '아름다운 저녁' 발매 기념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사진=워너뮤직코리아 제공)
이번 정규음반 '아름다운 저녁'은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곡가 '포레', '프랑크' 그리고 '드뷔시'의 작품으로 꾸몄다. 그가 프랑스 작곡가들의 곡만 담긴 음반을 발매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첫 음반은 1978년에 로열 필하모닉과 함께 쇼송, 생상, 라벨의 작품을 연주한 것이고, 두 번째 음반은 1980년 드뷔시와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였다.
이번 앨범에는 정경화가 처음으로 녹음한 포레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과 두 번째로 녹음한 프랑크의 바이올린 소나타가 담겼다. 아울러 각 작곡가를 대표하는 유명한 소품인 '자장가'(포레)와 '생명의 양식'(프랑크) 등을 마치 주 메뉴와 디저트처럼 엮어놓았다.
또한 올해로 타계 100주년을 맞는 드뷔시의 작품인 '아마빛 머리의 소녀'와 '아름다운 저녁'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품들을 함께 담았다.
피아노 반주는 정경화의 '영혼의 동반자'로 알려진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가 맡았다. 정경화는 “포레는 할수록 감이 안 잡혔다. 근처에도 못 갔는데, 케빈과 하면서 용기를 냈다”며 감사를 전했다.
케너는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멘토로도 잘 알려졌다. 1990년 쇼팽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 (1위 없는 2위) 출신이다. 2011년부터 정경화와 파트너를 이뤄 호흡을 맞춰왔으며, 이번 음반에선 반주 뿐만 아니라 프랑크의 '생명의 양식'을 바이올린 곡으로 편곡하기도 했다.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와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사진=워너뮤직코리아 제공)
이번 앨범에서 한국판에만 특별한 곡이 담겼다. 바로 엘가의 '사랑의 인사'를 보너스 트랙에 수록했다. 이 곡은 정경화가 1987년 발매한 음반 '콘 아모레'에 수록돼 유명해진 곡이자, 시그니처이기도 하다. 이번 앨범을 위해 32년 만에 새로 녹음했다.
이에 대해 정경화는 “사랑과 평화는 내 인생의 주제이다. 지구에 너무나 필요한 게 평화이고, 평화는 사랑의 시선으로 주변을 바라볼 때 생긴다”며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했다. 그러면서 “과거 ‘사랑의 인사’에는 젊음과 열정이 담겼다. 지금은 나이가 들고 삶이 안정이 되면서 사랑에 대한 많은 변화가 생겼다”며 지금은 좀 더 단순하고 편하게 들린다고 했다.
이번 '아름다운 저녁' 앨범 녹음에 사용한 바이올린은 1702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막시밀리언 요제프’(일명 ‘킹 맥스’)이다. 전체 길이 343㎜로 가장 작은 스트라디바리우스 중 하나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사진=워너뮤직코리아 제공)
앨범을 발매한 정경화는 무대에도 쉼 없이 오른다. 오는 30일 통영국제음악당에서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다. 이어 4월 2일과 6월 3일에는 ‘바이올린 리사이틀’을 통영국제음악당과 롯데콘서트홀에서 각각 진행한다. 케빈 케너가 협연한다. 롯데콘서트홀에 오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편,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6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시작한 그는 곧바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9살 무렵 서울시향과 멘델스존을 협연할 정도로 실력이 불어났으며, 언니인 명소, 명화 등과 전국 순회공연을 나설 정도로 뛰어난 신동이었다.
2005년 갑작스러운 왼쪽 검지 부상으로 인해 은퇴도 고민했으나, 5년 뒤 기적적으로 회복해 2010년 아슈케나지가 이끄는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으로 복귀한 바 있다. 그후 평생 숙원으로 남아 있던 바흐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전곡을 레코딩하고, 전 세계 투어를 하면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