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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학술

    김승회의 건축 에세이 '시간을 짓는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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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을 짓는 공간>에서 건축가 김승회는 건축가의 공간 두 곳을 소개한다. 첫 번 째 공간인 여주 강천에 있는 ‘소운’은 서재에 침실이 덧붙여진 ‘머무는 집’이다. 두 번 째 공간인 서울 후암동에 있는 ‘소율’은 설계 작업실에 다섯 평 거주 공간이 붙어 있는 ‘일하는 집’이다. 두 집 모두 건축가가 일하고 거주하는 ‘건축가의 집’이다. 저자는 ‘나의 집만큼 나의 모습을 확실하게 증명하는 것은 없다’고 말하며 두 공간을 설계한 과정, 그 ‘집’을 누려온 경험을 나누기 위해 감추어두었던 자신 안의 풍경을 열어서 드러낸다. 건축가에게 집은 어떤 의미인지, 어떤 계기로 집을 짓게 되었고, 어떤 소망을 집에 담으려 했고, 어떤 방식으로 공간을 만들며, 어떻게 공간을 향유하는 걸까? 내면의 이야기들을 차곡차곡 끄집어내며 구상과 설계 과정부터 조밀하게 파고들어간다.

    이 책에서 건축가의 집은 공간이라는 물리적 의미를 넘어 시간의 결 속에서 ‘성찰’의 시간, ‘자신이 한 일을 되돌아보는’ 시간으로 정리되었다.

    소운은 서재를 꿈꾸던 저자의 작은 소망에서 시작되었다. 열다섯 평 서재를 만들려고 했던 소박한 꿈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커져서, 서재 + 집을 원하게 되었다. 홀로 열중하는 작업과 독서가 중심이 되는 공간이지만, 그곳에 머물며 살고, 때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제자들과 어울려 배우고 익히는 장소를 만들고 싶어졌다. 마침내 저자는 15년의 시간을 통해 그 소망을 이루었다.

    남산 아래 용산 후암동에 자리한 소율은 빨간 색의 철골 구조로 상징성을 나타낸다. 저자에게는 최초의 상징이었다. 모든 공간은 시간을 품고 있다. 도시에 박혀 있는 길과 건물은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를 증거한다. 도시는 수많은 시대, 다양한 시간이 별과 같이 채워진 성좌이다. 소율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

    저자는 “건축가는 개인의 삶을 이해해야 하며, 사회에 담겨 있는 문화와 체계를 통찰해야 한다. 그리고 건축을 환경 속에 구현하기 위한 기술을 연마하고, 아름다운 공간을 꿈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름다운 남산의 풍광 아래로 펼쳐지는 골목길과 빼곡한 집들, 그 숭고한 일상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우리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의 삶이다. 다른 어떤 유형의 건축보다 주택은 삶과 건축의 거리가 가까워야 한다는 생각에 건축과 삶의 형식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가치관을 소율을 통해 완성시킨다. 소율의 기억을 통해 집이 세워지는 과정, 그리고 그 공간에서 머물며 사는 시간에 대한 탐구 그리고 정지의 미에 대한 성찰을 담았다.

    책 속으로

    주택의 형식이 ‘공간’이라면, 집의 형식은 공간 안에 담긴 ‘시간’이다. 그러므로 집에 대한 나의 고백은 그 시간에 관한 것이다. 집에 대한 소망을 키우고, 집이 놓일 대지를 찾고, 대지에 놓일 공간을 설계하고, 건물을 짓고, 마당을 가꾸고, 집에 정주하여 살아가는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집의 시간은 순차적으로 일어났던 사건만을 간직한 것이 아니라, 기억과 소망, 감동과 성찰을 내포하고 있다. 희랍인들은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로 구별했다. 크로노스는 일반적인 시간으로 시계를 따라 흐르는 시간이라면, 카이로스는 의미가 응축된 시간이다. -9페이지

    카프카는 집을 나와 호텔에 있을 때 가장 행복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집에 있는 방은 통로를 겸하고 있어서 수시로 가족이 지나다니고, 그들과 원하지 않는 대화를 해야 하기 때문에 집중하여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작가로 살기 위해서는 일 년에 500파운드의 돈과 더불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방해하는 이 없이 홀로 머물 수 있는 방은 모든 작가의 첫 번째 소망이다. 어떻게 보면 내가 때로 집과 사무실을 떠나 콘도를 전전하며 작업을 한 것도 카프카나 버지니아 울프와 비슷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집이든 사무실이든 ‘자신만의 방’이 없었기에, 홀로 집중하여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13페이지

    집 안에 들어서면, 비로소 집은 우주의 중심이 된다. 내 몸을 중심으로 동심원이 펼쳐진다. 우주 밖에 우주, 그 밖에 또 우주가 있다. 우주에 대한 원초적인 도형은 중세의 그림을 닮았을 것이다. 세계를 표현한 그림에서는 우주와 우주의 경계는 원주의 둘레로 표현된다. 우주의 경계는 내부와 외부를 규정하는 틀을 만들어준다. 이 경계가 없다면 우리는 우주를 인식할 수 없다. 혼돈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우주의 조직과 질서이다. -60페이지

    집의 형태는 설계 과정의 결과로서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설계의 시작부터 떠올린 모습이기도 하다. 대지와 프로그램, 재료의 느낌과 디테일 등, 집의 형태를 결정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처음부터 인식하면서 설계하기 때문이다. 집을 만드는 전 과정에 깔려 있는 바탕이 되는 생각은 ‘집에 대한 소망’일 것이다. 집의 형태는 건축의 목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과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저절로 ‘드러난다’. -123페이지

    삶이 담겨지는 곳, ‘집’의 중요한 속성은 변하지 않음. 영속성이다. 그렇지만 영속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변하는 공간이 필요하며 기후와 환경에 따라, 공간을 향유하는 방식에 따라서 공간이 변할 수 있을 때, 지속가능한 집이 될 수 있다. -139페이지

    주택이라는 공간이 집이라는 장소가 되는 것은 오직 머무는 시간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주, 바로 여기에 머물러 사는 것이 집의 본질이었다. 머물러 지내는 시간은 주택이라는 건축물을 집이라는 의미로 변화시켰다. 집은 건축가의 작품이 아니라 머물러 사는 이의 시간이 담겨지는 장소라는 것을 배웠다. -147페이지

    지금 잠드는 곳이 당신의 집이고 우주의 중심이다. 당신이 오늘의 당신을 사랑하듯이 오늘의 집, 우주의 중심을 사랑하기를 바란다. 그 사랑으로부터 당신과 우리가, 집과 마을과 도시가, 온 우주가, 생명을 얻고 아름답게 자라날 것이다. -29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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