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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래 보던 드라마속 나라로 탈출했지만 웃음이 사라졌다



통일/북한

    몰래 보던 드라마속 나라로 탈출했지만 웃음이 사라졌다

    [탈북 청년들의 남한 적응기] ①

    (사진=우리온 제공)

     

    나는 국경과 인접한 함경북도 무산에서 살았다. 부모님은 장사를 하셨고, 집은 여유로운 편이었다. 오빠는 평양의 명문대학으로 손꼽히는 평양의 한 종합대학을 다녔다. 나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이후의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무렵, 한국의 이모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당시 우리는 중국 폰을 구입해서 한국과 통화가 가능했고, 먼저 탈북해 한국에 살고 계시던 이모와 간간이 통화를 하곤 했다. 이모는 한국으로 오라고 했다.

    특별히 부족한 것은 없는 생활이었기에 우리 가족은 한국으로 넘어가지 않기로 했다. 처음에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단짝 친구와 함께 몰래 보던 한국드라마에서의 삶이 조금씩 멋있어 보이기 시작했다. 넓은 2층집과, 화려한 패션, 거리에 가득한 자동차. 나는 잘 살고 싶었다. 이모와의 비밀 통화 끝에 나는 가족들 몰래 북한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이모가 브로커를 보내기로 했다. 북한 쪽 브로커는 나를 두만강까지 데려다 주고 떠났다. 새벽 세 시, 두만강을 건넌 나는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중국 쪽 브로커가 날 데리러 올 때까지 공안에게 들키지 않고 숨어있어야 했다.

    그런데 날이 밝으면 오겠다던 브로커가, 오후 3시가 넘었는데도 오지 않았다. 이대로 잡히면 죽게 될 것이다. 나는 불안에 떨었다. 떠나온 것을 후회했다.

    (사진=우리온 제공)

     

    "다시 돌아가야 해…"

    해가 저물고 주변이 어두워지면, 이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리라 결심했다. 그렇게 산속에 숨어 어두워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오후 5시쯤 차 한 대가 조용히 멈춰서더니 나를 찾았다. 브로커가 왔다.

    나를 태운 차는 화룡에 잠깐 들렀다가, 연길로 이동했고, 나는 세 번째 브로커에게 넘겨졌다. 연길에서는 사흘을 머물렀고, 인천으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단동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단동에서 배를 탄 지 16시간 만에, 마침내 인천항에 도착했다. 내 고향 무산을 떠나온 지 11일 만이었다.

    한국은 과연 북한과는 다른 세상이었다. 배에서 내리는 내 눈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감히 내딛을 수 없을 만큼 반짝반짝 빛나는 바닥, 으리으리한 건물들,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예쁜 언니들과 노랑 염색머리에 선글라스 차림으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

    드라마에서 보던 그 풍경이다. 내가 정말로 한국에 왔구나. 나는 배에서 내리자마자 국정원 사람들에게 이끌려 조사를 받으러 가는 와중에도, 이 황홀한 세계에서 살아갈 앞으로를 기대했다.

    (사진=우리온 제공)

     

    ◇ 모든 것이 새로웠던 그날 이후

    하지만 내 기대와 달리, 국정원 조사를 받는 2개월간 바깥세상으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고, 그 이후로도 북한이탈주민정착교육시설인 하나원에 입소하여 3개월을 더 보내야 했다.

    한국에 도착한 지 5개월 만에 사회에 첫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미처 몰랐던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내가 한국으로 넘어오기 위해 지불된 거리비용 1,200만원. 이모는 브로커 비용에 대해서는 말을 한 적이 없었고, 나는 태국이나 라오스를 거치지 않고 쉽게 한국으로 온 대가로 일반적인 브로커 비용보다 훨씬 높은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1,200만 원의 빛이 내 앞으로 남겨졌다. 얼마나 큰돈인지 감이 오지 않는 금액이었다.

    나는 빚을 갚기 위해 편의점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나원에서 나온 지 닷새 만이었다. 나는 매일 지하철을 타고 을지로3가에 있는 편의점으로 출근을 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오후 두 시부터 밤 열 시까지. 물건 정리와 카운터판매. 고단한 하루가 지나가고 이모네 집에 들어오면 밤 11시가 되었다. 매일이 똑같았다. 한 달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도록 같은 날들이었다.

    일 끝나고 집에 들어오면 하루가 허무하고 외로웠다. 잘살고 싶어서 가족들 다 떠나 홀로 한국에 왔지만 혼자서 살아가기엔 너무도 힘든 현실이었다.

    후회도 많이 하고 울기도 많이 했다. 내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져갔다. 내가 진짜 행복해서 웃어본 적이 언제인지 손가락으로 꼽아보아도 몇 번 되지 않을 것이다. 한국에 와서는 다들 바쁘게 사느라고 한집에 사는 이모 얼굴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힘들고 외로울 때면 고향 생각, 이웃 생각이 많이 났다. 한국에서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지내는 건 정말 충격적인 모습이었다. 북한과는 너무나도 다른 이웃 관계다.

    북한에서는 이웃들과 정말 살갑게 지낸다. 우린 특히 옆집과 정이 각별했다. 엄마가 일을 나가시고 혼자 있기 싫을 때면 항상 옆집에 가서 같이 밥을 먹었다. 내 집처럼 편하게 드나들었고, 명절이나 생일에는 함께 모여 시끌벅적 웃고 떠들며 보내곤 했다.

    특히 4살 차이가 나는 옆집 막내 언니와 친했는데, 언니와는 화장실도 같이 가고, 심부름도 같이 다녔다. 둘이 하도 붙어 다녀서 어른들이 “언니가 남자였으면 둘이 결혼시키는 건데.”하고 우스갯소리를 던질 정도였다. 그때는 마냥 행복했었는데... 가끔 고향에서의 기억을 더듬어 보노라면 가고 싶고, 보고 싶고, 그리워서 눈물이 흐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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