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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틈 없이 돌아가는 백화점, 그 안의 노동자들



책/학술

    쉴 틈 없이 돌아가는 백화점, 그 안의 노동자들

    신간 '백화점에는 사람이 있다'

     

    신간 '백화점에는 사람이 있다'는 휘황찬란한 백화점 공간 이면에서 고강도의 노동으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열두 명의 백화점 노동자가 들려주는 생생한 이야기는, 우리가 “물건을 사이에 두고” 비인간적인 고객과 무력한 노동자가 되도록 조장하고 있는 백화점과 사회의 이면을 낱낱이 일러준다.

    이 책은 한국여성민우회, 백화점 노동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인 시민들, 이야기를 통해 여성들을 만나고 연결해 온 안미선 작가, 그리고 용기 내어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 준 열두 명의 백화점 노동자들이 공동작업자이다.

    "1월, 5월, 9월 행사 집중 기간에는 집에서 서너 시간만 겨우 자고 출근해야 해요." (최지은, 백화점 화장품 매장)

    "종일 무조건 정자세로 말없이 기다리고 서 있으라는 거에요. 그게 너무 힘든 거에요. 그래서 한번은 억울해서 울었어요." (박정아, 백화점 잡화 매장)

    대다수 백화점 노동자들의 휴무는 일정치 않고, 백화점의 정기휴무는 월 1회에 불과하다. '여가와 저녁이 있는 삶'은 포기한 지 오래이며, 주로 여성인 노동자들은 일과 가사노동이라는 이중의 부담 속에서, "서너 시간만 겨우 자고" 일터로 나서는 일상을 보내기도 한다. 그야말로 금전적, 시간적, 삶의 질적인 면에서 모두 빈곤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고객들은 직원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도 다 수용되는 경험들을 통해 '그렇게 해도 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본문 136쪽)

    백화점이 이렇게 '서비스'를 강조하는 것은, 인터넷 쇼핑 등의 활성화로 인한 매출의 하락을 극복하기 위해서이다. 실제 서비스 교육 현장에서, "승부할 건 서비스밖에 없다"는 말이 오가기도 한다. 백화점은 매출의 책임을 노동자 개개인에게 지우고, 수시로 점검하며, 재촉한다. 모든 매뉴얼은 '판매' 증진을 위한 것으로, 비합리적이고 무리한 요구를 해오는 고객들을 적절히 응대할 만한 내용의 매뉴얼은 없다.

    "고객한테 세 가지 용어를 하면 안 돼요. '안 돼요', '몰라요', '없어요'." (주은아, 백화점 의류 매장)

    매뉴얼에 따르면, 백화점 판매직 노동자들은 고객에게 '안 된다'는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 고객의 모든 요구를 들어 주고, 만족시키라는 백화점의 지시는 '진상 고객'들의 횡포를 일상적으로 감내하게끔 만든다. 백화점 노동자들이 받는 감정적 상처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월초에 백화점은 각 매장의 목표 매출액을 정해 준다. 기준은 언제나 '지난해의 매출보다 높게'다. 전년도의 성과가, 올해에는 노동자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격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매출은 늘 갱신되며, 백화점 본사는 '무한 이윤'의 꿈을 향해 나아간다.

    높은 목표치를 달성하기 위해, 때로는 노동자들의 카드를 이용해 '가매출'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마치 판매가 이루어진 것처럼 카드를 긁고, 목표한 매출액이 채워지면 해당 달이나 다음 달에 이를 취소하는 것이다. 이는 겉보기에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행위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백화점 관리자들에 의해 공공연하게 종용되고 있는 관행이다. 한 달에 150만 원 전후의 월급을 받으며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가매출을 올리기 위한 명목의 카드값은 때때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빚이 되기도 한다.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가매출 관행은, 생계를 위해 일터에 나선 노동자들을 도리어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

    "소파가 찢어지든지 발이 하나가 휘든지 신경도 안 써요." (정혜란, 백화점 화장품 매장)

    백화점의 노동 환경을 살펴보기 위해 백화점을 찾았던 시민액션단('우다다 액션단')은 노동자들의 휴게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다른 공간들에 비해, 너무나 허름하고 열악했기 때문이다. 10시간 넘게 서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마련된 휴게 시설은 딱딱한 나무의자이거나, 찢어진 소파이거나, 그마저도 없을 때 찾게 되는 비상통로의 '계단'이었다. 노동자들은 창고나 다름없는 휴게실과 비상통로의 계단에서 겨우 한 숨 돌리고 나와 다시 일해야 했다. 한 노동자는 "백화점에서 2년 이상 일하면 하지정맥류는 당연히 걸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고객 전용 공간과 대조적인 공간은 휴게실만이 아니다. 직원용 화장실, 이동수단 역시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다. 매장을 쉽게 비울 수 없는 상황인 데다가, '직원은 고객용 시설을 이용할 수 없다'는 백화점의 방침 때문에, 노동자들은 먼 길을 돌아 직원용 화장실을 가야만 한다. 옮겨야 하는 물건의 양은 많은데, 직원용 이동수단은 턱없이 부족하기에, 높은 굽의 구두를 신고도 계단을 이용해 짐을 옮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인터뷰에 참여했던 백화점 노동자들은 건강 악화를 호소했다.

    "'금싸라기 땅’에 위치해 있는 백화점에서 노동자들이 마음 편히 다리를 뻗을 수 있는 휴식의 시간과 공간을 가진다는 것이, 백화점으로서는 아깝고 쓸모없는 일로 여겨지는 것만 같다." (본문 200쪽)

    "문 하나를 넘었을 뿐인데, 여긴 이렇게 마구잡이 창고처럼 허름하고 버려진 모습이고 이 문 하나만 넘어가면, 이 물건들이 저렇게 화려하게 쇼윈도에 진열이 되어 사람의 임금보다 몇 배, 몇십 배나 비싸게 팔려 나간다." (홍연지, 우다다액션단)

    여성들이 많이 진출해 있는 다른 업종과 마찬가지로, 백화점에는 노동 조건이 열악한 저임금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불안정한 고용 상황은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기 어렵게 하고, 각기 다양한 조건에 놓여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을 만들어 한 목소리를 내기도 어렵다. 백화점은 이 같은 상황을 이용해, 고용에 대한 책임과 부담 없이 노동자들을 무한 착취하고 있다.

    "여성이 많잖아요. 그런 점에서 서비스 부문 노동운동은 주목해야 할 이유가 확실히 있는 거에요. …… 인터뷰하면서 느꼈어요. 특정한 직종과 직무가 여성의 일자리로 굳어져 버리고 있다는 걸. 백화점 판매직, 마트 판매직, 요양보호사 거의 다 여자잖아요. 사무직도 마찬가지예요. 저임금에 장시간 동안 일을 많이 하는 분야는 거의 다 여성들의 일자리인 거죠." (류형림, 민우회 활동가)

    이 책의 후반부는 '존중이 오가는 백화점'을 만들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였던 시민들의 인식 변화, 그리고 구체적인 액션의 내용들을 담고 있다. 백화점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공간을 방문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처음 듣게 된 시민액션단 일원은 "처음엔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았다"고 고백한다. 자신이 백화점 노동자들에게 "무례하지 않았을 뿐, 존중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고 고백한 이도 있었다. 직접 보고, 듣고, 고민하면서, 그간 '소비 공간'으로서만 바라보았던 백화점을 '노동 공간'으로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은 "노동자의 노동 환경을 이루고 있는 한 축이 물건을 사는 사람들의 생각과 태도"라는 점을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단순히 '좋은 고객'이 되는 것을 넘어, 노동 조건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으로 나아가기를 요청한다. 우리에겐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될 권리"가 있다고 말이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 불안정한 고용, 감정의 소외 등 많은 일터의 노동은 '백화점'의 그것과 닮아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백화점 노동자들의 노동이 자신의 노동과 닮아 있다는 것, 어느 한곳의 노동 조건이 나빠지면, 또 다른 곳의 노동 조건 역시 나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렇기에 다른 노동자의 행복이 나의 행복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존중이 오가는 백화점'의 가능성은 바로 '존중이 오가는 일터'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지난 2014년, 감정노동 종사자의 노동권 문제 해결을 위해 '감정노동전국네트워크'가 결성되었고, 19대 국회에 이어 20대 국회에서도 감정노동자의 건강권과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법안 제정 추진은 계속될 예정이다.

    책 속으로

    백화점의 금빛 외양과 풍경 속에, 진열된 상품처럼 반듯하고 묵묵한 노동자들의 모습. 그녀들은 이처럼 화려한 공간에서 일하면서도, 사람답게 일하고 쉬고 싶다는 바람이 묵살된 데에 모멸감을 느낀다. 지금도 백화점에는 고객들이 무리 지어 들어오고 있고, 물건은 어김없이 진열되어 있으며, 노동자들은 언제나 웃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늦은 시간까지 환한 백화점의 활기찬 영업은 결국 이러한 고된 노동과 무수한 모멸감 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69~70쪽)

    먹다 남은 음료수 컵을 버려 달라거나, 고객의 실수로 판매용 옷에 화장품이 묻어 정중하게 세탁비를 요구해도 도리어 항의 전화를 받게 되는 등 사례는 무궁무진하다. 노동자들의 인터뷰를 통해 유추해 보건대, 고객들에게 노동자는 ‘버선발로 뛰어나와야 하는’ 하인이고, 손에 묻은 화장품을 닦아도 되는 존재이며, 정해진 업무는 아니어도 물을 떠오는 시중을 해야 하며, 온갖 화들을 분출해도 되는 존재이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본적인 규칙들, 인권 의식 등이 백화점 안에만 들어오면 다 무화되어 버린다. 이곳을 지배하는 법도는 오로지 ‘매출’, 그리고 그 매출을 실현해 주는 고객의 만족이다. 이 둘은 무한하고, 온전히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124쪽)

    이 같은 고객들의 갑질과 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수용은 하루아침에 우연히 벌어진 일은 아니다. 독과점 형태의 대형 유통기업인 백화점이 중소기업, 입점협력업체를 구조적으로 착취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구조적인 착취의 종착역은 백화점에서 판매를 담당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노동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어떤 체계적인 매뉴얼도, 대처 방안도 없다. 무조건 “네”, 무조건 “죄송합니다”가 전부다. 고객을 대우해 주면 상품이 더 팔릴 것이고 그 이익을 백화점이 가져가면 된다. 손해는 입점협력업체의 몫이지 백화점의 명성에 흠집날 것은 없다. 고객을 극진히 대우하기 위한 노동과 그로 인한 상처는 백화점 노동자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두면 된다. 백화점은 그렇게 계산한 것이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하는 것이다. (132쪽)

    1996년에 유통산업이 개방되고 국내 재벌 유통기업 중심으로 백화점이 재편된 이래, 재벌의 시장 점유율이 80%에 이르렀다. IMF 구제금융 이후 재벌과 대기업 위주의 유통업 구조조정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로부터 10여 년 사이에 백화점 시장은 포화 상태에 이르렀는데, 백화점은 포화로 인한 매출난을 타개하기 위해 ‘서비스 향상’을 주된 전략으로 삼았다. 그리고 이러한 기업의 전략은 자연스럽게 소비문화에 스며들게 되었다. 고객들은 직원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도 다 수용되는 경험들을 통해 ‘그렇게 해도 된다’는 암묵적인 메시지를 받게 되었다. (136쪽)

    미스터리 쇼퍼는 백화점 판매직 노동자의 서비스를 평가하고 점수화하는 ‘가짜 고객’이다. 미스터리 쇼퍼는 까다로운 질문을 하고 직원의 반응을 보려고 일부러 자극적인 말과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들은 서비스를 꼬치꼬치 체크한다. 미스터리 쇼퍼 제도는 백화점뿐 아니라 면세점, 호텔, 레스토랑, 은행 등 다른 서비스 업종에서도 실시된다. 주어진 일을 처리하기에도 몹시 바쁜 와중에 자신들의 노동 수행 면면이 모니터를 당한다는 사실에 노동자들은 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미스터리 쇼퍼는 자신들의 정체가 눈에 띄지 않게 하려고 매장을 은밀히 다닌다. 직원이 그들을 분간하는 것은 쉽지 않으므로 노동 강도는 일상적으로 강화된다. (146쪽)

    쇼핑객을 위한 광활한 공간에 비하면 노동자들에게 허락된 공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협소하고 어두컴컴한 곳이다. 백화점이라는 한 공간 안에서 고객과 직원은 다른 길로 다녀야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서로 마주치지 않아야 하며, 같은 화장실을 사용해서도 안 된다. 직원들은 매장 안에서 고객을 기다리고 응대하는 모습 이외에 어떤 것도 공식적으로 드러낼 수 없다. 한 백화점 여성노동자의 말처럼, “직원은 사람이 아니다”. (184쪽)

    우리는 일터에서의 경험들을 말하는 대신 숨기면서 견뎌내고, 일터에서 나오면 소비의 공간으로 들어가 마음껏 웃고 떠들며 잊고 싶어 한다. 그러나 소비의 공간, 백화점은 또 다른 사람의 일터였다. 10시간 넘게 노동하고 매출 압박에 죽음의 언저리까지 내몰리는 노동자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지갑을 열고 닫으며 경쾌한 표정을 짓는 것은 참 이상한 풍경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갈라져 있었다.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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