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용 감독의 1967년작 '만선'의 한 장면. (사진=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어기야 디야 어기야 디야"
7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의 한 넓은 홀에 흥겨운 민요 가락이 울려 펴졌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미보유 한국 극영화 94편을 발굴한 뒤 디지털·복원 작업을 거쳐 일부를 공개하는 자리였다.
노래가 들려 오는 곳은 흑백 스크린. 그곳에는 물고기로 가득찬 배 위에서 덩실덩실 춤추는 어부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만선의 기쁨을 만끽하는 어부들을 찍은 이 장면은 5분으로 축약돼 상영된 김수용 감독의 1967년작 '만선'의 도입부다.
섬마을에 사는 곰치(김승호)는 아들 둘을 바다에서 잃었지만 어부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 온 뱃사람이다. 그러나 선주(변기종) 밑에서 아무리 고생을 해도 빚만 늘 뿐 곰치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곰치와 선주 사이 갈등은 깊어만 가고, 급기야 지긋지긋한 어부 생활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아들 도삼(남궁원)과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한다.
이날 상영된 짧은 영상은 당대 사실적인 어촌 풍경과 배우들의 강렬한 연기, 그리고 이를 묵묵히 지켜보는 정직한 카메라의 움직임을 충분히 담고 있었다. 후반부를 장식한 배우들의 서러운 몸짓과 음악, 파도 소리는 극중 어부로 대표되는 하층민들의 삶이 예나 지금이나 결코 녹록지 않다는 점을 대변하고 있었다.
1960년대 어촌경제를 사실적으로 고발한 이 영화는 개봉 당시 비평과 흥행에서 모두 좋은 성적을 거두며 당대 한국영화계의 '문예영화 붐'을 이끈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시사회에 참석한 김수용 감독은 "영화 기술의 발전이 크게 이뤄진 만큼 지금의 영화와 (시대를 대변하는) 정신만 갖고 만든 옛날 영화를 단순 비교해서는 안 된다"며 "감독이 무슨 이야기를 집요하게 하려고 했는지, 배우들이 연기를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지를 봐 주시기 바란다"고 전했다.
◇ 1949년작 '안창남 비행사'부터 1950, 60년대 작품 다수…"영화사 연구에 큰 보탬"
7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한국영상자료원 주최로 열린 미보유 극영화 발굴공개 언론공개 시사회 뒤 기자회견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이날 공개된 작품 5편을 포함해 모두 94편에 달하는 미보유 한국영화는 1949년부터 1981년까지 다양한 시대를 넘나든다.
가장 오래된 작품은 노필 감독의 1949년작 '안창남 비행사'다. 이 영화는 한국 최초 비행사인 안창남의 이야기를 다뤘는데, 아쉽게도 전체의 3분의 1가량만 남은 채 수집됐다.
이들 작품은 연합영화공사 한규호 대표가 소장하고 있던 것들이다. 연합영화공사는 1970년대 서울 종로 일대에서 운영되던 순회용 영화 필름 배급업체 10여곳을 통합해 설립한 회사로, 한 대표는 당시 수집한 다량의 필름을 버리지 않고 개인 소유 창고에 보관해 왔다.
영상자료원은 이들 필름의 훼손을 우려해 지난해 10월 3.5톤 분량의 필름을 이관해 왔고, 필름 상태 등을 점검하고 목록화 하면서 미보유 94편 106벌을 포함해 이미 보유한 356편 455벌의 필름을 기증받았다.
필름을 기증한 한규호 대표는 "선친 때부터 50여 년간 모아 온 영화가 한때 2000여 편을 넘기기도 했는데, 화재·수해 등으로 많은 자료가 유실됐다"며 "영상자료원이 이 자료들을 잘 보존하고 관리해 보다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는 데 작은 보탬을 줬으면 한다"고 전했다.
영상자료원 이병훈 원장은 "기증품에는 1950, 60년대 작품이 다량 포함돼 있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한국영화사를 연구하는 데 획기적인 성과"라며 "앞으로도 유실된 영화를 찾는 데 최선을 다하겠다. 개인이 소장한 필름을 후대에 물려 줄 수 있도록 발굴·복원사업에 관심을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 1960년대 영화 5편 축약본 상영…"가슴 울렁거리고 눈물 난다"
7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한국영상자료원 주최로 열린 미보유 극영화 발굴공개 언론공개 시사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박종민 기자)
이번 시사회에서는 만선 외에도 각각 5분 분량으로 압축한 1960년대 영화 4편이 함께 공개됐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당시로서는 드물게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를 중심에 둔 가족영화로 눈길을 끈 정진우 감독의 '외아들'(1963) △한국전쟁을 다뤘지만 주제나 메시지 전달보다 오락성을 강조한 임권택 감독의 14번째 영화 '전장과 여교사'(1965) △연극적이고 이국적인 화면과 예상을 벗어난 이야기 전재로 독특한 멜로 감성을 표현한 고(故) 이만희 감독의 '잊을 수 없는 연인'(1966) △한국전쟁이라는 국가폭력이 개인에게 남긴 내면의 상처를 탐사한 최하원 감독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8) 등이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원로 감독, 배우 등은 25분간 5편의 영화가 상영되는 와중에도 감회에 젖은 듯 서로 영화에 대한 정보를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정진우 감독은 "외아들은 스물네 살에 젊은 감각으로 만든 데뷔작인데, 세월이 54년이나 흐르고 보니 이 영화를 찍을 때 기억이 모두 사라진 것 같다"며 "조감독 시절 액션영화를 많이 했는데, 감독으로 데뷔하면서는 휴머니즘을 다뤄보고 싶다는 생각에 어머니 이야기를 영화로 만드는 데 주력했다"고 회상했다.
영화 외아들에 출연했던 배우 김지미는 "스물세 살에 이 영화에 출연했는데 75세가 돼 다시 보니 가슴이 울렁거리고 눈물이 난다"며 "평생 영화배우로 늙어 온 것을 행복하게 생각하고 영원한 여배우로서 자리를 굳힐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