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블리비언
'성문의 수장 호라티우스는 말했다. 지상에 살아있는 자 모두에게 늦거나 빠르거나 죽음은 찾아온다. 그렇다면 선조의 유물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강적에 맞서는 것보다 더 나은 죽음이 있겠는가.' -토머스 B. 매콜리(1800-1859)의 연작시 '호라티우스(Horatius)' 중에서
외계와의 전쟁으로 폐허가 돼 모든 사람이 떠나 버린 2077년의 지구, 인류의 마지막 정찰병 잭 하퍼(톰 크루즈)는 임무 수행 중 정체불명의 우주선을 발견한다. 그곳에서 줄리아(올가 쿠릴렌코)를 구해낸 잭은 그녀를 보며 지워진 자신의 기억 속에 커다란 음모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적인지 동료인지 알 수 없는 지하조직의 리더 말콤 비치(모건 프리먼)를 만난 뒤 잭의 의심은 더욱 커져 간다.
11일 개봉하는 SF 블록버스터 '오블리비언(Oblivion)'은 이미 화제가 된 SF 영화들의 공식을 충실히 따르는 듯하다.
자신이 몸담은 현실에 의문을 품은 주인공은 '블레이드 러너' '토탈리콜' '매트릭스' 등을 연상시킨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 희생하는 주인공의 모습은 '터미네이터' '나는 전설이다' 등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이렇듯 흥미로운 SF적인 요소들을 맛깔나게 버무려낸 오블리비언은 1억 달러(약 1130억 원) 이상의 천문학적인 제작비를 들여 완성도를 높인 특수효과와 맞물리면서 2시간 동안 남다른 설득력을 갖는다.
이 영화는 SF 블럭버스터라는 옷을 입었지만 곳곳에 나타나는 장면들은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 잭이 영화 말미에 오르게 되는 비행선의 이름은 '오딧세우스'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의 작품 속 주인공 이름과 같다. 트로이 전쟁을 끝내고 험난한 모험을 거쳐 집으로 돌아오는 오딧세우스와 잭의 여정은 많이 닮아 있다.
드론이라는 정찰기를 수리하기 위해 찾은 도서관에서 잭이 발견해 보관하게 되는 책이 토머스 매콜리의 '고대 로마의 노래'라는 점도 그렇다. 이 책 속 '호라티우스'라는 시는 이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177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미국은 이후 철저하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고대 로마 공화정의 것을 모방한 것으로 알려졌다.이 로마 제국의 발판을 마련한 카이사르가 독재자의 대명사로 쓰일 정도로 미국인의 공화정에 대한 애착은 강하다.
그러한 미국 발전의 상징과도 같은 뉴욕시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자유의 여신상, 미식 축구장 등이 영화 속에서 폐허로 변해 있다.
'선조의 유물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강적에 맞서는 것보다 더 나은 죽음이 있겠는가'라는 매콜리의 시는 고대 로마 공화정에 뿌리를 둔,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를 이끌어 온 미국 정신의 당위성을 강화하는 수단이 된다. 이 영화가 매우 미국적으로도 읽히는 이유다.
영화 속 살아 있는 인류가 아지트로 머무는 곳은 도서관이다. 배경이 뉴욕인 만큼 뉴욕 공공도서관인 듯하다. 주인공 잭이 비밀 안식처로 만들어 놓은 숲속 작은 집에도 책들이 여럿 쌓여 있다.
'인류 문명이 멸망해도 도서관만 남아 있다면 다시 재건할 수 있다'고 믿는, 꽤나 인상적인 미국인의 인식이 영화 곳곳에 배어 있는 셈이다.
오블리비언의 감독인 조셉 코신스키는 개인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에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써 놨다고 한다. 당시 그는 뉴욕공공도서관에서 매콜리의 시를 읽은 뒤 고대 로마의 영웅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이야기의 맥을 잡은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15세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