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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늦은 오후 일산에 있는 한 체육관을 찾아갔다. 들어가자마자 훅 끼쳐오는 남자들의 미묘한 땀 냄새. 그들은 기록적인 폭염에도 아랑곳 않고 매트 위에서 서로 뒤엉킨 채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훈련 방향을 지도하는 근육질 남성은 이 체육관의 수장 육진수 감독(37)이다.
육 감독에게 본인 소개를 부탁했더니 직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일산 팀맥스의 감독, 한중대학교 종합격투기학부 교수, 방송인, 아직 파이터 생활을 마감하지 않은 전적 9승 2패의 현역 파이터…. 살다 보니까 하고 싶은 것도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이것저것 하게 됐단다. “할 수 있는 건 다 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서 삶에 대한 열정과 욕심이 느껴졌다.
체육관에 들어서면서부터 그의 팔에 새겨진 문신의 의미가 궁금했다.
“왼팔의 문신은 힘이 강하고 용맹스러운 부족 사모아인들이 전쟁하기 전에 새기는 것이다. 오른팔엔 와이프의 이름을 새겼다. 원래 아들 둘까지 가족들 이름을 다 새기려고 했는데 그냥 아내 이름만 새겼다.”
육 감독은 양쪽 팔에 파이터의 용맹스러움과 가족을 사랑하는 가장의 자상함을 모두 새기고 있었다.
날 괴롭혔던 친구들, 이제는 평범한 아저씨가 돼 있어격투기 선수라고 하면 어렸을 때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대장 노릇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전혀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늘 맞고 살았다. 지금도 동창회에 나가면 내 뺨을 때렸던 친구들을 만나게 되는데 참 묘하다. 지금의 몬스터같은 내 모습과 평범한 아저씨가 돼 있는 친구들을 보면서 인생이 참 아이러니하고 재밌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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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부터 맞고 자랐던 아이가 종합격투기 선수가 됐다는 게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그런데 육 감독의 말을 빌리면 프로파이터들은 대부분 다 유약했던 유년시절을 겪었다고 한다. 약한 자신을 극복하려다 보니까 오히려 더욱 강해지고, 그 매력에 흠뻑 빠지다 보니 프로파이터가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 감독은 격투기 선수들에 대한 대중의 편견을 더욱 속상해했다.
“격투기 선수는 피도 눈물도 없는 싸움꾼일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들 하신다. 그런데 나는 지금껏 한번도 ‘싸움’을 해본 적이 없다. 지금 여기서 운동하는 친구들도 다 마찬가지로 순수한 청년들이다. 축구나 춤에 미치듯 우리도 격투기라는 스포츠에 미친 것이다. 가끔 우리가 TV에 나오면 채널을 돌리는 사람들, 우릴 야만인 보듯 슬금슬금 피하는 사람들을 마주하면 정말 속상하다.”
배울 곳이 없어 외국 선수 영상 수십번 돌려보며 연구육 감독은 종합격투기 1세대다. 지금은 선수층도 꽤 두꺼워져 정기적으로 시합이 열리고 열정적인 매니아층을 보유하고 있는 종합격투기지만, 그가 처음 뛰어들던 10년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일본방송이 막 들어오던 시절, 판크라스라는 일본 시합을 봤는데 근육질의 거구들이 무섭게 싸우더라. 경기를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그래서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그때부터 내 돈 써가면서 체육관을 찾아다녔다. 그 당시엔 누가 누굴 가르친다기보다 외국 선수 동영상을 토대로 서로가 서로의 장단점을 지적해주는 일종의 동호회 식이었다. 지금 UFC의 김동현 선수도 동영상 세대다. 10년 전 모방에서 시작해 창조를 거듭했고 그것이 지금의 종합격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꿈이냐 현실이냐를 놓고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꿈을 붙들고 있기엔 삶이 너무 팍팍해 고민 끝에 현실을 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육 감독은 우연히 보게 된 격투기 경기에서 꿈을 발견했고 그때부터 꿈 하나만 보고 달려왔다. 육 감독은 그 과정에서 현실의 열악함을 견뎌야 했다.
“지금이야 자리를 잡았고 교수까지 됐으니 좋아하시지만 처음에는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다. 한동안은 거의 단절된 채로 살았다. 그 와중에 결혼생활까지 시작하게 됐는데 일정한 수입도 없이 버텼다. 오로지 격투기에만 미쳐 있었다. 한 대회당 이삼십번은 족히 보다 보니 경기 내용을 다 외웠다. 솔직히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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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격투기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육 감독에게 딜레마로 작용할 지도 모르는 질문들을 던졌다. “아들이 나중에 자라서 격투기를 하겠다고 하면 허락하실 건가요?”
“처음에는 격투기를 절대 안 시키려고 했다. 어떤 부모가 자식 얼굴이 찢어지고 다치기를 바라겠나. 예전엔 부모님의 반대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자식을 낳고 나니 그 마음이 이해가 됐다. 근데 최근에 마음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아들이 성장했을 때쯤엔 격투기가 메이저 스포츠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이 쪽에서 일하고 있다 보니 아들이 하겠다고 하면 물심양면으로 밀어주고 싶다.”
격투기선수로 활동하는 가장에 대한 가족들의 염려도 물었다. "아내와 아이들이 격투기 선수로 활동하는 것을 걱정하시지는 않나요?"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아빠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아내는 지금 잘 살게 됐는데 굳이 또 출전할 이유가 뭐 있냐며 반대하고 걱정이 많다. 하지만 결국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고 점점 나이가 들어가고 있기 때문에 나중에 후회하지 않게끔 마무리를 잘 하기 위해서 계속 나가고 싶다고 설득했다."
아내의 반대에도 격투기선수 생활을 이어갈 뿐 아니라, 아들에게도 격투기 선수라는 직업을 물려줄 용의가 있을 만큼 육 감독의 격투기 사랑은 대단했다. 거의 모든 스포츠의 실전적인 기술을 모아 놓은 것이 격투기라며 ‘종합선물세트’라는 표현을 했다. 그가 생각하는 격투기의 매력은 무엇인지 물어봤다.
“가장 솔직한 운동이다. 아무리 타고난 능력이 있다고 해도 노력으로 극복하고 땀을 흘린 사람이 결국은 이기게 돼 있다. 싸움 잘하는 사람이야 많지만 같은 체급의 상대와 팬츠 한 장 걸치고 겨뤄 본 사람은 거의 없다. 체격의 차이도 없고 비슷한 체격의 상대와 날짜를 정해놓고 겨루기 때문에 일반 싸움과는 완전히 그 성격이 다르다. 상대방의 장단점에 맞춰 전략도 세워야 하고 체급에 맞춰 감량도 해야 하고, 생각보다 더욱 과학적인 스포츠다. 맞는 게 싫은 건 누구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수가 관객들의 박수갈채에 모든 고통을 잊어버리듯, 우리도 승리 후 환호를 받을 때 느끼는 스릴이 있다.”
“그냥 행복하게 웃으면서 잘 살고 싶다”육 감독은 지난 5월 KBS 2TV ‘대국민 토크쇼 안녕하세요’에 출연해 화제가 됐다. 국내 1세대 격투기 선수에다 일본 CMA 챔피언인 육 감독이 드라마, 인간극장 등을 즐겨보고 자주 눈물을 흘린다는 제자의 폭로가 주된 내용이었다. 육 감독은 이 방송으로 ‘울보 파이터’라는 별칭까지 얻었다.
“소심했던 학창시절과 지금의 파이터 생활이 겹쳐지다 보니까 양면성을 갖게 됐다. 어떨 땐 마초스러운 면이 있는데 어떨 땐 소녀감성이 나온다. 감정이 풍부해서 음악을 들을 때도 자주 눈물이 난다. 특히 아픈 사람들을 TV에서 보면 너무 마음이 아프다. 큰 도움을 못 주더라도 최소한 ARS전화는 눌러서 도움을 주려고 한다.”
육 감독에게는 아픈 아들이 있다. 그는 아들 때문에 대학병원을 무수히 드나들면서 세상에 아픈 사람이 정말 많다는 것을 느꼈다. 간병인의 슬픔을 직접 경험해봤기에 다른 사람의 슬픔에 잘 공감하고 눈물도 자주 흘린다. [BestNocut_R]
{IMG:4}육 감독은 외모와 달리 섬세한 면을 가진 매력적인 캐릭터 때문에 앞으로도 대회뿐 아니라 방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추성훈 선수나 최홍만 선수가 이슈가 되긴 했지만 더 떠야 한다. 국민 여동생 김연아 같은 선수가 격투기에서도 나왔으면 좋겠다. 남녀노소의 사랑을 받는 격투기가 되도록 더 노력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스포츠 댄스처럼 섬세한 운동에 도전해 보고 싶다. 내가 지금껏 너무 동적인 운동을 해왔으니까 정적인 운동이 하고 싶어지더라.”
떡 벌어진 어깨와 울퉁불퉁한 근육에 상대방을 압도하는 인상까지.. 거친 파이터의 아우라를 풍기면서도 따뜻한 인간미가 넘치는 그의 매력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