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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쓰레기 더미에 가려졌던 희망이 아름다운 하모니로 태어났다.
지난 21일 저녁 7시. 광화문 인근의 한 대형교회에서는 케냐에서 온 합창단들의 공연이 1,000여 명의 관객 앞에서 펼쳐졌다.
무더운 아프리카 케냐에서 온 합창단 아이들은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맹추위에도 소매없는 옷을 입고 씩씩하게 율동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머리에는 수술이 달린 띠를 두르고 두 볼에는 노랑, 주황의 물감을 칠한 아이들은 발바닥이 새까매지도록 아프리카 특유의 리듬에 맞춰 흥겹게 북을 치고 몸을 흔들었다.
힘겨운 환경에서 살던 아이들이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천진난만한 얼굴로 노래하는 27명의 지라니 합창단.
지라니 합창단원들은 가난과 질병으로 ‘저주받은 땅’ 케냐의 쓰레기 마을 고로고초에서 태어나 생존과 사투를 벌이던 아이들이다.
당장의 먹을 것이 절실하기게 ‘꿈’은 사치에 불과했던 그 곳에 희망의 씨앗이 뿌려진 건 한국인 목사가 그 곳을 우연히 지나게 되면서였다.
빈민국을 돌며 구호에 힘쓰던 임태종 목사는 6년 전 이곳 아이들을 처음 봤을 때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며 당시 기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임 목사에 따르면 케냐의 고르고초 마을은 온갖 오물들과 각종 쓰레기들이 산을 이뤘고, 썩은 물들이 도랑처럼 흘러내려 그 곳을 지나가면 바지 밑단이 흥건하게 젖을 정도였다.
개, 돼지들이 쓰레기더미를 비집고, 흉측한 대머리 황새 수백마리가 그 위를 빙빙 돌다 쓰레기 산으로 내려와 시커먼 날개들로 뒤덮곤 했다.
그런데 짐승들과 오물들이 가득한 곳에 어린 아이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손에 집은 게 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바로 입에다 넣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 3개월 동안 그 모습이 지워지지 않던 임 목사는 글자도, 음표도 모르던 고르고초의 아이들을 모아 ‘도레미’를 가르치고 꿈을 심어줬다.
2006년 11월 16일 우여곡절 끝에 창단식을 가진 합창단은 그로부터 7개월 만에 각국 5,000여 명의 국빈이 모인 가운데 케냐 정부수립기념 초청공연을 대통령궁에서 펼쳤다.
그 다음해부터 이들은 매년 겨울마다 국내에서, 2008년부터는 미국에서도 30여차례에 걸쳐 순회 공연을 하며 감동을 전하고 있다.
임 목사는 아이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가장 많이 변한 것은 “꿈이 생겼고, 꿈은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하루 한 끼도 먹기 힘들어 허기진 배를 채우러 합창단에 들어온 아이들이지만 이제는 멈출 수 없는 희망의 노래를 부른다.
고로고초 마을에서 3평도 안 되는 방 한 칸에 일곱 식구가 산다는 수잔 아우마(12)는 “수업료를 못내서 학교에서도 쫓겨났지만 합창단원이 되면서 다시 다니게 됐고, 노래를 부를 때가 가장 즐겁다”며 하얀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었다.
쓰레기장에서 플라스틱 찾아 팔아 마약을 사기도했던 라우렌스(15)군은 “노래를 하면서 새로운 사람이 됐다”며 “다른 사람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 기쁘고 반드시 훌륭한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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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땅에서 자란 희망의 하모니는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노래가 끝나자 사람들은 일제히 일어나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흥겨운 음악에 같이 춤을 추기도, 입을 모아 함께 부르기도 했다.
특히, 도라지 타령과 대중가요인 촛불하나를 부를 때는 관객들의 웃음과 환호를 자아냈다.
8살 딸과 함께 온 강희연(38) 씨는 “쓰레기 장에서 이런 하모니가 나온다는게 믿어지지 않는다”며 “기적같은 일이고 너무나 감동적이다. 우리 애가 많은 걸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많이 겸손해졌던 시간이었다”던 한순영(50) 씨는 “이렇게 맑고 순수한 아이들이 공연이 모두 끝나면 쓰레기 더미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아프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노래 부르지 말고 쓰레기나 주워오라는 부모의 반대에도 아이들은 꿋꿋하게 노래했고, 이들이 만든 하모니는 인종과 국경을 넘어 희망으로 전해졌다.
세상은 이들이 힘겹다고 얘기하지만 정작 아이들은 환하게 웃으며 “내일은 태양이 뜬다”고 노래한다.
큰 자만이 작은 자를 품는 것이 아니다. 27명의 작은 아이들은 아름다운 노래와 흥겨운 율동으로 오히려 자신들보다 큰 우리를 품어주고 있었다.[BestNocut_R]
지라니 합창단은 지난달 24일부터 시작해 서울, 부산, 경남, 창원 등 23차례 순회 공연을 한 뒤 다음 달 10일 시흥에서의 공연을 마지막으로 케냐로 돌아갈 예정이다.
특히, 다음달 7일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오케스트라 협연으로 창단 5주년 기념 공연이 진행될 예정이다.
지라니는 스와힐리어로 좋은 이웃이라는 뜻. 쓰레기 더미에서 시작된 지라니 합창단은 어느샌가 사랑과 희망을 전하는 좋은 이웃으로 우리곁에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