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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작가는 잔인했다. 시청자들을 위한 친절은 끝까지 베풀지 않았다.
드라마 히트제조기라 불리는 김수현 작가는 4년 만에 멜로드라마 ‘천일의 약속’을 내놓았다. ‘청춘의 덫’을 시작으로 ‘불꽃’ ‘완전한 사랑’ ‘내 남자의 여자’ 등 파격적이면서도 애절한 사랑을 주로 그렸던 김수현 작가는 이번에 서른살 여주인공에게 찾아온 알츠하이머를 다뤘다.
불치병에 걸린 여주인공 서연(수애)과 그녀를 곁에서 지켜주는 남자 지형(김래원)의 지고지순한 사랑. 더욱이 그 불치병이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알츠하이머란 사실은 처음부터 흥미로운 소재였다. 이 둘의 사랑이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리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러나 김수현 작가는 한국 드라마에서 골백번은 더 등장했을(심지어 김수현 작가 자신도 ‘완전한 사랑’에서 다뤘던) 불치병이란 소재를 뻔하지만 뻔하지 않게, 슬프지만 눈물을 짜내지 않게 그렸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천일의 약속’이 친절하지도 평범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주인공 이서연이 그랬다. 서연은 처음부터 약혼자가 있는 남자 지형을 탐했다. ‘삼류 드라마 속 여주인공이 되기 싫다’며 스스로 끝을 정해놓고 만났지만, 예기치 못한 병으로 결국 지형과 결혼을 했다. 온갖 못된 말을 퍼부었지만, 병을 얻은 대신 그와 결혼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예정된 수순처럼 하루하루 기억을 잃어가는 서연은 충분히 불쌍했지만 동정 받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자신의 기억을 더 빨리 단축시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고집해 낳은 딸 예은을 단 한번도 안아주지 않았다. 딸과 헤어지는 순간에도 통곡을 하거나 안아주는 대신 “안녕. 잘있어”라며 담담한 듯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웃었다. 지형의 말처럼 무슨 의미인지 알 수가 없게 말이다.
서연은 “어제보다 내일 더 사랑한다”는 지형을 잊고 그를 ‘아저씨’라고 불렀고, 자신을 친자식보다 더욱 아껴준 고모를 “자기 딸 주려고 내 옷을 훔쳐가는 아줌마”라고 생각하기도, 발로 걷어차기도 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게 된 자신에게 지형이 기저귀를 권하자 “내가 애기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지만, 늦은 밤 홀로 나와 기저귀를 찼다.
결국 그녀는 죽는 순간까지 마음껏 아파하지 못했다. 이를 보는 시청자 중 일부는 “뻔뻔한 이서연에게 동정이 가지 않는다” “고래고래 소리만 지르고 늘 제 멋대로 인 여주인공을 보기 불편하다”는 반응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서연의 이러한 행동은 앞서 그녀의 삶을 통해 설명됐다. 남들보다 몇 배는 운 나쁜 인생을 살아온 서연은 늘 강한 척, 자신있는 척을 해야 했기에 죽음으로 가는 문턱에서 조차 ‘척’을 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스스로 불쌍해지는 것보다 못되게 변하는 것이 편했을 테니까 말이다.[BestNocut_R]
마지막회 역시 김수현 작가는 친절하게 서연이 죽는 과정을 설명하지 않았다. 서연이 어떻게 죽음을 맞았는지, 주위 사람들이 어떻게 그녀를 떠나보냈는지, 지형의 해바라기였던 향기가 그녀의 죽음 후 어떤 길을 택했는지 보여주지 않았다. 다만 지형이 서연의 무덤 앞에서 “나는 아직...아직이다 서연아”라고 말했을 뿐이다.
이번 작품을 통해 김수현 작가는 극과 극의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천일의 약속’이 불치병을 소재로 한 여느 드라마들과는 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극중 서연이 그랬듯 김수현 작가만의 고집일 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