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 방 송 : FM 98.1 (18:00~20:00)
■ 방송일 : 2010년 8월 18일 (수) 오후 7시
■ 진 행 : 정관용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 출 연 : -두 차례 함께 옥고 치른 이해동 목사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 민주당 김근태 상임고문
이해동 정세현 김근태
▶정관용> 네. 고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상 수상 수락 연설부터 시작해서 시대역순으로 대표적인 연설 몇 개를 들어봤고요. 중간 중간 유시춘 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장, 장성민 전 국회의원, 연극인 손숙씨, 세 분이 김대중 대통령의 인간적 모습을 회상하는 말씀까지 들어봤습니다. 이제 우리 초대 손님들과 함께 더 많은 것들 함께 이야기 해 보죠. 이 자리에 이해동 목사님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십시오.
▷이해동>네. 반갑습니다.
▶정관용>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어서 오십시오. 장관님.
▷정세현>네. 안녕하십니까.
▶정관용> 김근태 전 의장, 어서 오십시오.
▷김근태> 네. 안녕하세요.
▶정관용>우리 이해동 목사님께서 인연으로 치면 김대중 대통령하고 제일 오래되셨죠?
▷이해동>그렇죠. 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연루돼서 대면한 것은 그게 이제 계기가 돼서 처음 거기서 대면했죠. 그러나 알고 지낸 것은 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냈죠.
▶정관용>누구 고등학교 시절이요?
▷이해동>제가 목포고등학교를 나왔는데요. 제가 목포고등학교를 한 2년 늦게 다닌 셈인데 고등학교 3학년 때 그것이 아마 1954년이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그 양반이 목포에서 처음 국회의원에 출마했었어요. 20대 약관이셨죠.
▶정관용>예. 그때 직접 만나셨어요?
▷이해동>만나지는 못 했죠.
▶정관용>먼발치에서?
▷이해동>유세장에도 가보고 그렇게 했는데 그때는 그렇게 말씀을 잘하시는 줄 몰랐어요.
▶정관용>그때 떨어지셨죠?
▷이해동>물론 떨어졌죠.
▶정관용>그러면 직접 대면하신 건 처음이 76년?
▷이해동>76년입니다. 그때 당시 교수들이 대학에서 다 쫓겨났는데 기독자 교수들이 가장 많이 쫓겨났습니다. 제일 처음에 쫓겨났고. 그 기독자 해직 교수들이 교회를 하나 아주 교회다운 교회 만들어 보자 해서 시작이 갈릴리 교회인데 그게 저희 한빛교회에서 모이게 됐고 그 갈릴리 교회가 이른바 76년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의 산실이올시다. 그 멤버들이 전부 다 감옥에 갔죠.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이 전 대통령께서 그 사건에 갈릴리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연루돼서.
▶정관용>함께 옥고를 치르셨죠.
▷이해동>그렇죠. 그 사건에 연루된 연유로 인해서 대통령을 직접 대면하게 된 거죠.
▶정관용>그렇죠. 감옥에서 처음 만난 건 아니죠? 그러니까.
▷이해동>아닙니다. 처음입니다.
▶정관용>감옥에서 만나신 게 처음이에요?
▷이해동>그러니까 검찰청 대기실에서 만난 게 첫 대면입니다.
▶정관용> 아이고. 다들 혹시 포승줄 묶고 그러고 처음 인사 하셨나요?
▷이해동>그때 포승줄까지는 묶었던 거 같지 않아요. 수갑은 찼던 거 같고요. 거기서 그 양반을 처음 대면을 했어요.
▶정관용>김근태 의장께서도 지금 기억에 다 나시는 사건들이죠? 지금 쭉 언급된 사건들.
▷김근태>다는 아니지만 대체로 기억납니다.
▶정관용>그 당시에 그러면 김근태 의장께서는 어떤 활동을 하시던 시절이었죠? 76년 그 당시면.
▷김근태>76년도는 지명수배를 받아서 피신하고 있었고요. 70년대는 대체로 지명수배를 받아서 한 두 차례 내지 세 차례 걸쳐서 피신을 해서...
▶정관용>대체로 도망 중.
▷김근태>그래서 그때는 ‘공소외 김근태’ 라는 게 유명했습니다.
▶정관용>그러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나신 건 언제에요?
▷김근태>처음 뵌 거는 1988년도에 제가 감옥에서 석방되는데 그때 제가 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병원으로 찾아오셔서 처음 뵀습니다.
▶정관용>그게 88년이에요? 그러면 민청련 만드셨던 게 83년?
▷김근태>83년도입니다.
▶정관용>83년 민청련 그 시절에도 못 만나셨어요? 서로?
김근태, 70년대에는 정치인 김대중과 연결되는 것 자체가 너무나 위험한 일
▷김근태>그때는 미국에 계셨고요. 더군다나 중요한 게 학생운동, 청년운동과 정치인 DJ가 연결을 갖는 것은 끔찍한 상황이 올 수 있었고요.
▶정관용>맞아요. 연결되면 곧 잡혀가는...
▷김근태>잡혀가는 정도가 아니라 사형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거는 염두에 두지도 않았고요. 또 당시는 정치에 대해서 ‘건강하지 않다. 야심가들이 모이는 곳이다.’ 이런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학생운동, 청년운동 하면서는 정치인으로서 DJ를 만난다는 건 일종의 금기였습니다.
▶정관용>정세현 장관님께서는 언제가 김대중 대통령과 첫 대면입니까?
▷정세현>김대중 대통령과 대면해서 만나는 것은 98년 국민의 정부 들어서가지고 차관으로 발령받아가지고 임명장 받을 때 처음이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는 77년부터 통일원에서 통일문제를 연구하고 남북대화 일선에도 나서고 했습니다만 사실 제가 통일 문제를 평생의 화두를 삼게 된 데는 역시 김대중 대통령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71년 4월 달 장충단 연설, 그걸 그때 들으러 갔었어요. 저는 그때 대학원 1학년이었었을 겁니다, 71년도에. 그러니까 제가 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를 했는데 제 은사님 중에 나중에 통일원 장관님이 되신 분이 있는데요.
정세현, 대학원 시절 접한 DJ의 장충단 연설이 통일문제를 평생 화두로 삼는 계기▶정관용>어느 분이시죠?
▷정세현>이용희 교수께서 입학 초에 무슨 말씀을 하시나면 ‘우리나라에서 국제정치학을 가르치고 배우는 이유는 시사문제 해설하자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통일문제 해결하는 일종의 정책브레인들을 키우기 위한 것이다.’ 제가 굉장히 강한 인상을 갖고 통일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서 국제정치학을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고, 그래서 대학원까지 갔지만 통일문제와 관련된 공부를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감을 못 잡고 있을 때 장충단 연설이 결정적으로 저한테 영향을 줍니다. 소위 4대국 보장론, 거기 더해서 남북 간의 국제정세가 이렇게 바뀌고 있는데 기자교류도 하고 스포츠교류도 하고 이산가족상봉도 해야 되는 거 아니냐는 남북교류 왕래 협력론, 이걸 연설에서 딱 듣고 그야말로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거 같은 그런 충격을 받았어요. ‘아, 바로 저거다.’ ‘한국의 국제정치학이 기본적으로 4대국 보장,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4대국으로부터 보장을 받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한국에서의 국제정치학의 목표다.’ 라는 생각을 해가지고 이제 그런 쪽으로 독학을 했죠. 독학을 하고. 대학에서는 안 가르치는 학문이니까.
▶정관용>그 당시 국제정치학은 그런 거 안 가르치잖아요.
▷정세현>미국정치학 소개하는 것이 대세였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77년에, 그때 저는 박사과정 논문 작성을 앞두고 있었는데 통일원에서 연구직 공채가 있었어요. 그때 이제 대학 때 은사님이 장관으로 계실 때입니다. 그렇게 해서 말하자면 대학 때 통일문제에 대해서 눈을 뜨게 해준 은사님이 장관이 되실 때 시험 봐서 들어가 가지고 쭉 있다가 다시 장충단 연설에서 통일문제에서 다시 또 아주 현실적인 그런 어떤 자극을 주셨던 분이 대통령인 정부에서 차관, 장관으로 일을 하게 되었고 또 퇴임 이후에 국민의 정부, 노무현 정부 초까지 일을 하다가 나왔습니다만 퇴임 이후에는 김대중 평화센터에 이사로 부르셔가지고 거의 매일, 매일은 아니고 매주에 한 번씩은 꼭 뵙는 그런 식으로 있다가 작년 8월 18일 날 돌아가셨죠.
▶정관용>네. 이렇게 세 분 ‘언제가 첫 대면이었느냐? 김대중 대통령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됐느냐?’ 이런 저런 말씀들을 쭉 듣고 있는데 제가 오늘 프로그램 시작하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 하면 두 단어 ‘민주주의’ 또 ‘남북평화’ 두 단어로 요약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전반부의 삶은 민주주의였지 않겠습니까. 이해동 목사님께서 아까 76년 3.1 민주구국선언사건으로 첫 옥고를 치르셨다. 그리고 한 번 더 옥고를 같이 치르셨지 않았나요?
▷이해동>80년에 또 갔었습니다.
▶정관용>80년. 그때 내란음모 사건이죠. 그때는 사형판결 받으셨던 때인데요. 그죠? 그때 사형판결 선고 받았을 때 곁에서 모습을 보셨죠?
▷이해동>물론이죠.
이해동, 80년의 DJ "아무리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밧줄이 목에 걸리는 게 연상된다" 고백
사형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얼굴에 화색 돌아▶정관용>어땠어요? 아무리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있어도 사형이라고 하는 판결을 받으면 좀 낯빛이 변하지 않던가요?
▷이해동>80년 사건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표정은 웃음이 없었습니다. 무표정, 그게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이를테면 1980년 5월 17일 날 밤에 연행돼 가셔서 뵌 것은 재판정에서 뵙게 된 건데 아마 혹시 여러분이 그런 자료사진이 나와 있는 걸 아시겠지만 그때 김대중 모습이 재판장에 앉아 있는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생 살아오는 동안에 가장 마른... 그런 모습입니다.
▶정관용>맞아요. 헬쓱해 보이고.
▷이해동>아주 헬쓱... 네. 적어도 중앙정보부에서 거의 두 달 동안 시달림을 받던, 그리고 이제 기소가 됐는데... 그리고 그 양반의 얼굴에 화색이 돈 거는 나는 사형이 벗겨지던 날이라고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사형이 벗겨지던 날 저희들은 다른 피고 11사람인가는 얼마나 우리가 정말 속된 표현을 하면 땡깡을 거기서 많이 부렸는지 좌우간 관행적으로 한 7사람은 세면장에 나와서 있을 수 있었어요. 우리는 만나니까 거기서 같이 만나면 재밌잖아요. 이제 앉아서 노닥거리고 얘기도 하고 그러는데 이 양반은 완전히 별개였습니다. 그런데 사형이 벗겨진 후 위원회를 갔다 들어오시다가, 이 양반이 그 전엔 표정이 없었어요, 좌우간에, 우리 모여 있는 곳으로 쑥 들어와 버리신 겁니다. 그러시면서 그때 하신 말씀이 ‘아, 정말 아무리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그래도 자꾸 밧줄이 목에 걸리는 게 연상이 된다.’ 그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비로소 얼굴에 화기가 돌고. 그러니깐 이 양반이 무슨 초인이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막 이렇게 했다고 그렇게 사람들이 잘못 생각할 수 있는데 그 사람도 목숨에 대한 아주 정말 심각한 그런 고민, 그 가운데서도 삶과 죽음의 그 양 갈래 길에서 그러나 변절을 통해서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았다. 이거는 얼마나 인간적인 고뇌를 많이 하셨겠나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고..
▶정관용>아까 저희가 들은 이야기 중에 문화정책연구소 유시춘 이사장께서 ‘김대중 전 대통령, 겁 많고 소심한 사람이다.’ 이렇게 표현을 했거든요. 그런 표현에 동의하세요? 정 장관님, 김 의장님, 어떠세요?
▷정세현>글쎄요. 그게 겁 많은 케이스가 될는지는 모르지만 퇴임 후죠. 저는 그때 매주 월요일 날 가서 정세토론을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그랬었죠. 다른 일 있으면 또 가서 일주일에 두 세 번은 갈 수 있었지만. 어느 날은 무슨 얘기를 하다가 ‘나는 산행하는 사람 속을 모르겠어요.’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니. 왜 산에 가는 사람 속을 모르겠다고 그러십니까.’ 했더니 ‘나는 높은 데 올라가는 거 무서워 못 가요.’ 그러니까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러면서 비행기는 잘 타신다고, 그래서 ‘비행기야 완전히 밀폐돼 있는 공간이니까 밑을 내려다 볼 일도 없고 높은 데 올라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조금 그런 데 있어서는 소심한 대목도 있었던 거 같아요. 이런 일도 하나 있었어요.
정세현, 칭찬에 어린애처럼 기뻐하던 인간적인 분▶정관용>어떤 일입니까?
▷정세현>2007년 초였었는데 그 날도 이제 제가 주례, 정례, 정책토론 때문에 가서 뵙는데 일본 언론 매체가 와서 인터뷰를 하고 막 나갈 때입니다. 얼굴이 상기되셨어요. ‘정 장관’, 그래서 ‘네.’ ‘일본 사람들이 나보고 말이야. 이론가인줄 알았더니 사상가라고 그럽디다. 사상가래요.’ 그래서 ‘일리 있죠. 워낙에 이론이 해박하신 데다가 단순히 이론차원이 아니라 어떤 점에서는 굉장히 멀리 내다보시는 그런 말씀들을 많이 하시니까 사상이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하지요.’ 그런데 하여튼 일본 언론에서 ‘이론가인줄 알고 인터뷰하러 왔는데 사상가 수준이다’ 라는 일종의 평가를 듣고는 얼굴이 상기되셔서 80이 넘으신 분도 그런 모습도 있더라고요. 좋아하시더라고요.
▶정관용>칭찬받고 대접받으면 금방 표가 나는 군요.
▷이해동>네. 표정관리 못하시는 분입니다.
▶정관용>그래요? 정치를 그렇게 오래하셨는데 표정관리가 안 돼요?
▷이해동>잘 못하시는 분이에요.
▷김근태> 이런 점이 있는 거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김구선생을 좋아하신다고 그러는데 노선 상으로 보면 김구선생과 여운형 선생의 중간쯤이 아닌가 싶습니다. 한 번은 한반도 평화, 남북의 대화와 협력에 대해서 야당총재 때 강연하셨는데 끝나고 나서 제가 정말 감동을 했어요. 그래서 ‘고맙습니다. 후배들한테 큰 방향을 가르쳐줘서 고맙습니다.’, 이랬더니 얼굴이 정세현 선배 말씀하시는 대로 상기되면서 ‘그렇게 들으셨습니까? 고맙습니다.’ 그러는데 룰루랄라 하고 걸어가시는...
▶정관용>비판받으면 어떻게 표정이 바뀌던가요?
▷김근태>좀 사나워지시죠. 그거는 한국정치가 가혹했지 않습니까, 폭력에 의해서. 또 우리 민족의 지도자분들이 저격당해 암살도 당하고 그런 과정에서 당신의 사상이라고 그럴까. 당신이 정치의 길을 견디고 감당하고 포기하지 않고 키워오는 과정에서 숱한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정관용>자기의 선택과 길에 대해 지적하고 비판하는 거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맞서 싸우더라? 그렇게 또 이해할 수 있겠군요.
▷김근태>그렇습니다. 그런 측면이 있고요.
김근태, 최근 YS의 언행을 보면 87년 당시 YS로의 후보단일화가 대안이 될 수 있었을까 회의▶정관용>자, 우리 김 의장께는 두 가지를 안 여쭤볼 수가 없는데 87년 대선에서 민청련 세대들이 주로 비판적 지지를 선언하지 않았었습니까. 그런데 결국 그렇게 해 가지고 사실은 후보단일화가 되지 않고 노태우 정부를 출범시키게 됐어요. 얼마 전에 나온 자서전을 보면 당시에 단일화 실패를 두고서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나 라도 양보를 했어야 했다. 지난 일이지만 너무도 후회스럽다.’ 이런 표현까지 있었는데요. 김 의장, 그런 비판적 지지라고 하는 그 당시의 상황에서 어떤 느낌이셨는지. 한 말씀만 해 주시면요?
▷김근태>할 얘기가 굉장히 많은 거기 때문에 가능하면 줄여서 얘기하겠습니다. 87년 김대중 총재에 대한 후보로서의 비판적 지지는 제가 감옥 안에 있을 때 횃불을 들었습니다. 87년 6월 항쟁은 ‘군사독재 끝내라. 정권교체해라.’, 이런 것에 대한 국민의 지상명령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재야 민주화운동의 힘만으로는 구호를 독자적으로 내서 정권교체 하는 것이 비현실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힘이 부족했기 때문에 전두환 독재와 맞서 싸우는 과정에서 민주화 운동 세력, DJ세력, YS세력이 연합해서 싸웠거든요. 그런데 그 힘을 가지고 정권교체를 하되 민주화운동 세력으로서는 최대한의 민주주의, 최소한의 진보, 한반도의 평화, 이런 것을 동시에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 개를 동시에 얻고자 노력했는데 당시 민청련도 그랬고 민통련, 민가협 등 당시 민주화운동의 중심세력이라고 자부했던 세력들 중에서는 DJ를 후보로 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다수였습니다.
▶정관용>그게 더 많은 민주주의를 가져온다. 그런 거죠?
▷김근태>그렇죠. 그래서 토의해서 결정을 해서 DJ를 후보로 만들 수 있거나 또 그 외의 다른 선택은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김대중 대통령이 말씀하신대로 자서전에서 말씀하시고 몇 번 그런 자리가 있었습니다. 87년 후보단일화를 이루지 못해서 국민이 받은 충격과 좌절감은 대단한 것이었거든요.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따져볼 게 좀 있습니다. 비판적 지지도 결과적으로 실패한 거죠. 그럼 그 당시에,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그러지만 가정을 해서, 어떤 선택이 보다 적절한 것이었느냐.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DJ가 재야 민주화운동 세력을 지렛대로 해서 당신이 후보가 됐거나. 그게 불가능 했으면 이론적으로는 민주화운동 세력과 협력해서 3자가 연합해서 YS를 후보로 만드는 길, 이런 길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근래 또 한나라당 쪽으로 가서 YS의 행태나 언동을 보면 과연 그것이 적절한 선택이 될 수 있었던가. 또 YS를 비교적 잘 아는 DJ로서는 그런 결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측면은 있는데 이것은 토론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관용>그럼요. 토론 여지뿐만 아니라 또 후대 역사에서 평가해야 할 얘기기도 하고요.
▷김근태>그러니까 토론을 위한 토론이 아니라 앞으로 미래에도 이런 선택의 어려움이 올 때가 많이 있을 텐데 현실적으로 어떤 선택이 가능했고 바람직한 것이었는가, 이런 것은 지나간 일이니까 덮어두자가 아니라 토론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국민에게 큰 좌절감을 줬기 때문에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이 자서전에 얘기한대로 참 잘못된 것이었다, 부족한 것이었다, 이렇게 얘기를 한 거 같습니다.
▶정관용>‘너무도 후회스럽다.’ 이런 표현까지... 한 가지 더 그럼 김 의장께 여쭤볼 게 있는데 그럼 이제 97년 대선에서 DJP연합을 통해서 여야 간 첫 민주적 정권 교체를 성공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 DJP연합 때 우리 김 의장께서는 또 내심 괴로우셨다면서요.
▷김근태>내심 괴로운 게 아니라 ‘괴롭다. 받아들이기 참 곤란하다.’, 이렇게 얘기를 했습니다. 이것도 연합이나 연대라고 얘기할 수는 있는데 정당성이 부족한 것이고 역사성과 가치가 달랐습니다. 만약에 실패하면 어떻게 됐을까. 이런 것에 대해서 두렵게 생각을 했습니다. 실패하면 이 정치세력은 국민으로부터 외면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너무나 큰 투기였고 배팅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정하는 길, 이런 길은 없었을까, 당시 고민을 했습니다.
▶정관용>그러니까요. 뭐 87년 당시에 비판적 지지는 아까 김 의장께서 말씀하신대로 더 많은 민주주의, 진보, 내용적 원칙에 충실한 결정이었다면 97년 DJP연합은 내용적 원칙보다는 현실적 파괴력이라고 그럴까. 그것을 고려한 결정이고 약간 앞뒤가 안 맞는 부분도 있는 거 아닙니까?
▷김근태>그렇습니다. 현실 정치가 그런 권력정치적인 성격이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보면 일정한 기준과 원칙을 지키지 못한 측면도 있습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결과적으로는 이건 성공을 했고 비판적 지지는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이런 차이도 주목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해동, 원칙을 지키되 현실적인 방법을 추구한 실사구시 형 정치인▶정관용>이 목사님, 이런 부분에 대해서 ‘정치라고 하는 것이 원칙과 현실 사이의 끝없는 대화다.’ 이런 부분 말이죠.
▷이해동>제가 직접 경험한 거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많이 알려진 겁니다만 1980년 5월 15일 날 제가 동교동에 있었습니다. 그 5월 15일은 학생 데모가 지금 서울역 광장에 모든 학생들이 다 나와서 데모를 하던 그 날 상황입니다.
▶정관용>그래요. 5.17 직전.
▷이해동>5.17 직전 15일 날. 그래서 동교동에 그때는 우리가 늘 말할 때 ‘선생님, 선생님’ 그랬습니다. 선생님이 보자고 그렇게 해서 오후 두 시인가 제가 거기를 갔었습니다. 그런데 가니까 서남동 목사님도 거기 계신데 조금 후에 문익환 목사님, 이문영 박사님, 예춘호 선생, 세 분이 들어오시더라고요. 그런데 이 세 분이 들어오신 까닭은 뭐냐면 당시에 국민연합의 공동의장이 세 분이었는데요. 그 국민연합에서 5월 7일 날 제 1성명이 나갔고요. 제 2성명을 준비해가지고 그 공동의장한테 승인을 받기 위해서 들어온 겁니다. 그런데 그때는 막 동교동이 문전성시였어요. 사람들이. 그런데 나중에 우리가 별채에 나가서 있는데 김대중 선생님께서 그리로 나오셔서 이제 그 제 1성명의 설명을 하니까 그때 성명의 내용은 어떤 거냐면 이런 겁니다. 5월 7일 날 한 성명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그 골자는 ‘계엄 해제하라. 전두환, 신현확 퇴진하라. 정치일정 밝혀라. 그 세 가지가 성명의 내용인데 그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이것을 5월 18일까지 대답을 하라고, 정부가 만약 대답하지 않으면 아래 행동강령에 의해서 우리는 행동에 옮길 수밖에 없다. 그 강령이 첫째, 왼쪽 가슴에 민주주의가 죽었다고 하는 표시로 검은 리본을 단다. 둘째, 계엄은 원칙적으로 무효이므로 계엄군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말라. 셋째, 서울은 장충단, 서울시청 앞, 각 도는 도청소재지 앞 각 광장에 모여서 국민궐기대회를 한다.
▶정관용>전면 저항운동이로군요.
▷이해동>네. 그게 행동강령이에요. 그렇게 했는데 딱 이 양반이 이거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안 되는 이유가 어떤 거냐면 이런 겁니다. 그때 25일 날인가 국회가 소집되기로 했는데 ‘국회가 모이면 공화당까지도 계엄해제 결의를 하도록 지금 그렇게 사전 약속이 돼 있는데 왜 18일까지 대답하라고 그럽니까. 국회가 계엄해제 결의를 하면 지금 현재 우리가 계엄 하에 있다는 게 대단히 어려운 상황인데 계엄해제를 하라고 하면 그만큼 정부가 코너에 몰릴 거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 전에 대답을 하라고 그럽니까. 또 하나 검은 리본 단다는 것은 뭐 그런대로 괜찮습니다. 둘째, 계엄군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지 말라. 당장 이러면 내란선동으로 걸립니다. 계엄 하에서 지금 그 성명 내용의 한 마디도 정작 들어야할 계엄군도 못 듣는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왜 구실만 줍니까.’
▶정관용>그렇게 꼼꼼하게 하나하나 다 따지시는 군요.
▷이해동>네. ‘이거 안 됩니다.’ 그렇게 하고 그것을 수정하는 그런 것을 제가 직접 봤어요. 그러니까 그 양반은 원칙이 좋으면 그 원칙을 무모하게 마구 이렇게 밀어대는 것이 아니라 그 원칙에 도달하기 위한 현실적 방법을 찾기 위한 실사구시입니다.
▶정관용>그것도 하나하나 꼼꼼하게 뜯어보고, 뜯어보고 신중하게 결정한. 그런 것들이 결합돼서 결과적으로는, 평가는 이런저런 평가야 있을 수 있습니다만, 결과적으로는 한국 민주주의를 한 단계 성숙시키는 그런 어떤 성공을 이루어낸 그렇게 볼 수 있을 거 같고요. 그래서 정권교체를 이뤘습니다. 그 대목 가기 직전에 김근태 의장께 한 가지만 여쭤볼 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다리를 좀 저셨잖습니까. 그거 미국 가서 다리 수술 하시려고 했는데 김 의장님이 말리셨다면서요. 왜 그러셨어요? 그거는?
▷김근태>제가 전에 들어서 잘은 모르지만 이랬던 거 같습니다. 당시 언론에서 지팡이 짚고 다니는 걸 두고 ‘다리병신, 병신이 꼴깝하네.’, 이런 말하자면 공격적이고 상처를 주는 얘기를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걸 견디지 못해 하신 거 같아요. 저라도 그랬을 거 같습니다. 그런데 미국 어느 특정한 대학병원에 가서 수술하기로 되어 있다는 얘기를 제가 듣고 제 가슴 속에.
▶정관용>몇 년도입니까? 그게?
▷김근태>96년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정관용>대선 직전이네요.
▷김근태>96년 연말쯤 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조병옥 박사가 떠올랐어요. 조병옥 박사가 미국 가서 결국 돌아오시질 못하고 국민에게 많은 한과 충격을 주고 떠나셨지 않습니까. 김대중 총재도 연세가 많으셨고요. 또 제가 결정적으로 반대한 것은 일상생활을 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었습니다. 제가 타진해서 여러 번 물어봤더니 별지장 없고 또 별지장이 없으신 거 같고요. ‘그러면 가시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술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병옥 박사 얘기도 제가 했습니다. ‘걱정이 된다. 상황이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오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된다.’ 제 말씀을 듣고 꼭 그러신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참고를 하신 것 같습니다.
▶정관용>만에 하나 어쩔지 모른다. 이런 어떤 걱정이셨군요.
▷김근태>그렇습니다.
▶정관용>네. 이제 대통령 당선 이후의 이야기로 넘기겠는데요. 그 사이에 거리의 시민들께서 김대중 대통령하면 떠오르는 게 뭔지 들어봤습니다. 함께 듣고 계속 이야기 나누죠.
▶정관용>네. 우리 시민들께서 ‘IMF극복’ 또 민주주의 옥고 치른 이야기도 나왔습니다만 주로 남북정상회담, 햇볕정책, 노벨평화상, 이런 말씀들을 기억 많이 해 주고 계시네요. 정세현 전 장관께서 활약하실 때가 됐는데 자서전 보니까 ‘98년 4월 남북차관급 회담이 상당히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이런 식의 표현이 나오더라고요. 바로 그 때.
▷정세현>수석대표로 있었습니다.
▶정관용>무엇 때문에 자서전에 그런 내용이 나오는 겁니까?
▷정세현>그게 햇볕정책을 취임사에서 선언하시지 않았습니까. 햇볕정책을 취임사에서 선언해놓고 국민들로부터 여러 가지 기대를 모은 대목도 있지만 그런 정책방향에 대해서 처음부터 비판적인 세력도 분명히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남북 간의 첫 회담에서 국민들한테 정부의 정책의지가 어떻게 읽혀지느냐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순간이었었습니다. 그때 회담이 4월 11일부터 18일까지 일주일 동안, 그 중간에 김일성 주석의 생일이 있어가지고 하루는 북쪽 대표가 쉬어야겠다고 그래서 못했지만.
▶정관용>4월 15일이 생일이죠.
▷정세현>네. 그래서 거의 그때는 오전, 오후 뭐 하루에 두 번씩 회담을 했기 때문에 일주일이라고 하지만 10여회 이상 접촉을 했었는데 접점을 찾지 못했죠. 그 회담의 주제가 무엇이었었냐 하면 북쪽은 비료 20만 톤을 좀 지원해 줬으면 좋겠다는 거고 우리는 비료는 줄 수 있으나 이산가족상봉 사업을 가을쯤에는 좀 하자. 봄에 비료를 주는 대신 가을에는 이산가족상봉을 북쪽이 받아들여라 하는 그런 일종의 상호주의적 협상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때 우리가 가지고 갔던 상호주의 원칙은 비동시입니다. 요즘 상호주의 하면 동시, 등가 그 다음에 뭐 대칭 이걸 자꾸 얘기하는데 분명히 그때 북쪽한테도 얘기를 했죠. ‘봄에 비료를 주는 대신 가을에는 이산가족상봉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다음에 ‘우리는 물건을 주지만, 당신네 필요한 물건을 주지만 당신네가 우리한테 내놓을 거는 인도주의적 배려, 이거면 충분하다. 돈으로 달라는 게 아니다. 물건으로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의미에서 비대칭이다, 또 비등가다 하는 원칙을 분명히 설명을 해줬는데 그때 북쪽이...
정세현, DJ 집권 초기에는 북한이 햇볕정책을 흡수통일전략으로 의심▶정관용>회담 결렬됐죠?
▷정세현>결렬됐는데요. 북쪽이 그때는 그런 여러 가지 우리의 적극적인 자세가 소위 흡수를 위한 위장전략인 걸로 착각을 했어요. 그래서 회담장에서도 햇볕정책에 대해서 뒤집어 놓은 흡수통일전략이니 그렇게 잘해주는 척 하면서 결국 우리를 녹여먹으려고 그러는 것 아니냐 하는 그런 이제 부정적인 평가도 나오고 그랬었는데 그러니까 우리 국민들로부터 햇볕정책이 시험을 받게 되고 또 북쪽으로부터 시험을 받는 그런 상황에서 정부가 정말 잘 대처를 해야만 되는 좀 어려운 상황이었었습니다. 거기서 무조건 북한에 대해서 온정적으로 나가면 보수 여론이 가만있지 않을 거고 북쪽에 대해서도 잘못된 신호가 돼가지고 남쪽을 좀 만만하게 볼 거 같고. 이런 어려운 사정들이 있었죠. 그래서 아마 자서전에서도 그 말씀을 하신 걸로 저는 그렇게 이해를 합니다.
▶정관용>자서전에 구체적으로 이렇게 쓰셨어요. ‘나는 북측이 생각보다 자존심이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가 더 가졌다면 베푸는데 더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그리고 물론 남한 사회에선 상호주의를 더 강력하게 펼치라는 거대 야당과 보수언론이 있었다.’ 이런 표현을 쓰셨는데 결국 한 마디로 말하면 가운데 끼어있었던 거 아닌가.
▷정세현>그렇죠. 정확한 표현입니다.
▶정관용>남쪽의 한 부분에서 상호주의를 요구하고 북측에서는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그 중간에 끼어서 양쪽을 설득해야 하는 것 아니었나...
▷정세현>그렇죠. 그러니까 대북정책 또는 통일정책이라는 게 사실은 세 가지를 다 고려해야 합니다. 우선 첫째, 대북정책, 통일 정책은 북한이 어느 정도 만족은 해야 되요. 100% 만족하면 국내 보수층이 가만있지 않으니까 그건 어렵지만 어쨌건 북한이 50% 정도는 만족을 하고 우리 국민들도 50%정도는 그 정도면 됐다 하는 정도의 균형을 잡아줘야 하는 문제가 있고 또 하나는 국제적으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그런 내용이어야 됩니다. 그래서 대북정책은 청중이 셋이다. 상대가 셋이다. 첫 째가 북한이요. 또 그 다음에는 우리 국민들이 동의를 해줘야 하는 게 있고 국제사회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어야 되는데 이게 그 이전 정부의 대북정책과 완전히 다른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다보니까 아까 남북 사이에 끼어있었고 국내적으로는 보수와 진보 사이에 끼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여러 가지로 주목하는 나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른바 주변 4국들이라는 게 남북이 분단돼 있는 것을 기본전제로 해가지고 그들의 동북아 전략이 40년, 50년, 이렇게 진행돼 있었기 때문에 현상타파 그 자체를 굉장히 불안시 하는.
▶정관용>싫어하죠?
▷정세현>싫어하죠. 남북대화가 열리면 뭐 미국이건 일본이건 굉장히 관심이 많습니다. 소위 남북관계가 급작스럽게 개선됨으로 해서 자기들의 동북아에서의 국가이익이 침해를 받느냐 안 받느냐 까지도 깊이 생각을 해야 하니까.
▶정관용>주판을 튕기는 거죠.
▶정관용>복잡한 여러 국면을 뚫고 성공을 시킨 거 아니겠습니까.
▷정세현>그런 것 때문에 아마 굉장히...
정세현, 남북 화해협력 정신이 평생의 신념이었기에 정상회담 가능했다▶정관용>그런 복잡한 여러 국면을 뚫고 결국 정상회담까지 성공을 시킨 게 아니겠습니까. 그 원동력은 어디 있다고 보시는지...
▷정세현>제가 볼 때는 김대중 대통령의 남북 화해협력 정신이라고 그럴까. 한반도 평화에 대한 구상은 어떻게 보면 그분의 평생의 신념이었다고 봐요.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관성이라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대북정책에 대한 임기 5년 동안 주변정세도 그렇게 썩 적극적으로 뒷받침해주지는 않았었어요. 굉장히 어려운 시절이 많았습니다. 그 주변정세가 격동하는데 북한변수도 크게 작용을 했었어요. 난데없는 짓을 많이 했으니까. 예를 들면 뭐 미사일을, 일본열도 상공으로 미사일을 쏴가지고 일본의 대북정서가 완전히 뒤집어지도록 만들고 또 무슨 핵실험 하는 이런 여러 가지 지하시설이 있다는 사진이 공개되면서 미국여론이 뒤집어졌는데 그때 그 대처하시는 걸 보니까 정말 신념을 가지고 일관성을 견지하더군요. 흔들리지 않아요. 흔들리지 않고 미국을 적극적으로 우선 설득을 하고 그 다음에 또 그 힘을 가지고 다시 일본을 설득을 하고 그러면서 이제 북쪽한테도 계속 일관되게 우리가 나갈 테니까 당신네도 일단 그 동안에 여러 가지 실수한 거 그거는 다시 스스로 반성하고 우리 이런 방향으로 협조해 나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메시지를 계속 보내니까.
▶정관용>북한이 98년에 또 불신하던 게 신뢰로 변한 건가요?
▷정세현>그러니까 그때 비료 안 주고 돌아왔을 때 저쪽의 정서는 굉장히 좋지 않았었습니다. 저쪽에서는 저를 또 미워했었죠. 북쪽에서 저를 굉장히 미워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98년도 회담이 끝나고 나서 우리의 진정성을 북쪽한테 전달하기 위해서 몇 가지 조치를 취합니다. 민간차원의 북한방문승인 조건을 대폭 완화시켜 버립니다. 그리고 민간기업의 대북투자 상한선을 풀어버립니다. 500만 불로 돼 있었습니다, 김영삼 정부 그때까지. 그 두 가지. 민간차원의 대북승인, 북한 방문 승인조건을 대폭 완화해서 범법으로 해서 출국이 금지돼 있는 사람 외에는 일단 초청장만 있으면 갈 수 있도록 허용을 했고 또 500만 불 이상의 투자를 할 수 있도록 이렇게 투자 상한선을 풀면서 북쪽한테 보낸 메시지는 ‘우리가 경제적으로 당신네들을 도와가지고 북한에게도 혜택을 주면서 그 경제협력 과정에서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는 것을 우리는 바란다.’ 하는 메시지를 계속 보내죠. 민간인들한테도 그런 메시지 계속 전달해 주면서 ‘북쪽으로 가서 잘 설득해라. 당국 간 대화가 능사가 아니다. 민간차원의 접촉의 소위 횟수를 자꾸 늘리다보면 접촉점이 접촉선으로 그리고 접촉면으로 접촉공간으로 발전되면서 그것이 확대되는 과정에 북한이 자연스럽게 개방으로 나오지 않겠느냐.’
▶정관용>민간교류 확대를 통해 우회적으로 이렇게 정부 간 대화로 가는.
▷정세현>그렇죠. 정부 간 대화가 가능한 조건을 형성할 수 있고 특히 우리가 바랐던 것은 정부 차원에서 바랐던 것은 일방적인 퍼주기라고 그러지만 결국 대북지원형식을 통해서 북한이 경제적으로 우리를 필요하게 만들어가지고 그 경제적인 필요를 충족해 주기 때문에 군사적인 긴장을 조성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게 햇볕 정책의 전략적인 구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김대중 대통령이 그런 구상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국내 여론이 흔들리거나 북한이 조금 나름대로 어떤 여러 가지 전략적 계산을 해서 행동을 취함으로써 국제정세가 뒤집어 질 때도 그냥 그 방향으로 쭉 가신 걸 보고 ‘아. 참. 저래야 하는구나.’ 하는 걸 저는 배웠어요.
정세현, 정상회담 직전의 모의 남북대화에서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점을 절감▶정관용>정상회담이 딱 결론이 났을 때 성사, 많이 설레셨겠죠?
▷정세현>그렇죠. 그리고 하나만 더 보태죠. 그리고 6월 6일 날입니다. 6월 6일 날 이제 바로 정상회담을 위해서 평양 가시기 전 일주일 전인데 6월 6일 날 현충일 날 행사 끝나고 오후 두 시부터 청와대 법무관에서 회담을 앞두고 모의대화라는 걸 했어요. 그때 이제 남북대화가 예정돼 있으면 남쪽 대표단을 훈련시키는 차원에서 북쪽 대표의 역할을 하는 그런 사람들이 나서가지고 쭉 괴롭힙니다.
▶정관용>어떤 사람이 그런 역을 맡아요?
▷정세현>주로 회담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하죠.
▶정관용>정 장관님 같으신 분?
▷정세현>저는 이제 그때는 김용순 역할을 했어요. 김정일 역할을 하신 분은 70년대 남북 대화를 했던 분이고. 저희보다 12~13년 연상인 분이 김정일 위원장을 맡고 제가 김용순 역으로 들어가서 김대중 대통령을 소위 김대중 대통령의 상황대처능력을 키워드리는 거예요. 남쪽 대표, 수석대표를 (우리가) 괴롭히고 그랬죠.
▶정관용>어떻게 괴롭히셨어요?
▷정세현>예를 들면 돌출발언 같은 걸 해 가지고 예를 들면 주한미군 철수부터 말씀을 하셔야지 좋은 말씀 다 좋은데 그런 걸 실현하려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던지 이렇게 먼저 조건을 갖춰놓고 나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북쪽에서 으레 하는 논리가 있습니다.
▶정관용>그랬더니 어떻게 반응하던가요?
▷정세현>그런데 그분에 대해서 제가 놀란 것은 주한미군, 연방제 논리, 그쪽의 단골메뉴 있지 않습니까. 소위 무슨 근본문제니 하는 논리도 있고. 그런 걸 몇 개 가지고 돌발적으로 이제 공세를 하고 들어가면 원고 없이 왜 주한미군을 놔두고도 남북이 얼마든지 서로 도우면서 서로에게 득이 될 수 있는지를 한 30~40분 원고 없이 쭉 이야기를 해요. 연방제에 대해서도 그게 이러이러한 맹점이 있다.
▶정관용> 30~40분씩 말씀하세요?
▷정세현>그렇죠. 원고 없이.
▶정관용>너무 긴 거 아닙니까?
▷정세현>그래가지고 원래 2시간 예정을 하고 있는데 4시간에서 6시에 끝났어요. 4시간 동안을 집중적으로 소위 북쪽 대표가 이리 돌리고 저리 돌려서 괴롭히는 것에 대해서 받아치는, 대응하는 걸 보면서 ‘아, 준비된 대통령이라 그러더니 진짜 통일문제에 대해서....’ 자료 없이 원고 없이 그렇게 대응하시는 걸 보고 ‘아, 이건 진짜 우리 공부 좀 많이 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정관용>다양한 분야에서 그랬습니다만 특히 남북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정말 오랫동안 준비해 오셨고 오랫동안 구상을 펴 오셨던 것을 정상회담을 통해 상당한 성취...
▷정세현>남북관계뿐만이 아니라 한미관계라든지 한일관계에서 외교, 4강 외교에 있어서도 굉장히 치밀하게 준비를 해 가지고 결국 부시를 설득해서 북한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연설을 하도록 만들지 않습니까, 도라산역에서. 대단한 설득력이에요.
김근태, 고인의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진다▶정관용>그게 71년도에 나온 4대국 교차승인이라고 하는 구상부터 30년이 무르익으신 거니까 그렇게 볼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시간이 너무 빨리빨리 가버려 가지고요. 민주주의 이야기, 남북평화 이야기, 조금씩 건드리다가 그냥 끝내 버릴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 돼 버렸습니다. 김근태 전 의장님부터 시작을 해서 고인에 대한 뭐랄까요, 하늘에서 다 듣고 계실 거예요. 한 말씀만 잠깐 하시고 오늘날 한국 사회에 김대중 대통령은 아마 이런 얘기를 할 거 같다. 세 분께 한 말씀씩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마무리를 짓죠.
▷김근태>오늘 돌아보면 살아계시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이 듭니다. 특히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집니다. 민주당 소속 정치인으로서 지난 6.2 지자체 선거, 7.28 선거를 보면서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정말 잘해야 된다. 그래서 국회의원으로서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정권창출을 해서 정권교체를 이뤄서 민주주의 위기라든지, 또 서민경제의 위기, 남북의 대결적 구도, 특히 근래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발생하고 있는 미국과 중국의 패권적 대립 분위기, 이런 것을 돌파할 수 있는 국민적 동력을 만들어 내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그런 다짐을 합니다.
▶정관용>‘그렇게 하라’ 라고 말씀하실 거 같다.
▷김근태>그게 바로 ‘역사는 발전한다.’, 그것이 그런 뜻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정관용>정 장관님.
▷정세현>예. 지금 남북관계가 악화일로를 겪고 있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계속 지금 군사연습이 연말까지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 군사충돌 가능성까지 예견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이제 우리 국민들이 정말 참 평화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가 하는 것을 점점 더 실감할 수 있게 돼 간다고 봅니다. 지난 10년 여러 가지 공과가 있다고 그러지만 남북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정말 국민들이 전쟁공포 없이 살 수 있도록 이렇게 만들었던 거라고 할 수 있는데 대통령께서 계신다면 이명박 대통령한테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겠나 생각이 듭니다. 그분은 아주 구체적인 대안을 말씀하시니까. 천안함은 남북 간에 따져라. 따질 일이 있으면. 천안함 사건은 남북대화를 열어가지고 따져라. 거기서 6자회담과 연계 짓지 마라. 6자회담은 북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왜 이렇게 천안함 사건에 대한 사과가 없으면 6자회담을 못 열겠다고 해가지고 북핵문제를 더 악화되도록 방치하고 있는가. 이거 정말 현명치 못한 거고 결국 국민으로 하여금 북핵 때문에 더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지금 몰아넣는 거다, 하는 경고를 하시면서 6자회담과 천안함 사건의 분리 대응 그리고 인도적 차원의 대북지원은 오늘이라도 계속 시작해야 한다. 그런 말씀을 구체적으로 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정관용>아주 구체적인데요.
▷정세현>구체적이죠.
▶정관용>이해동 목사님 마지막으로. 네.
▷이해동>네. 저는 우리 역사에서 김대중 대통령이라고 하는 분을 우리 역사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자산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저 양반의 여러 가지 사상도 그렇고 업적도 그렇고 그런 모든 것이 적어도 하나의 우리 역사를 바르게 가꾸어 나가는 데 하나의 큰 자산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양반의 목표... 저는 이제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얘기는요. 누구에게나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저분은 대통령이 목적이 아니었다, 나는 그렇게 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양반이 대통령을 해야 되겠다고 하는 거는 그 양반이 평소에 젊어서부터 익히고 품었던 그분의 신념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 그것이 대통령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기 때문에 저만한 분을 우리 역사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우리 역사의 자랑이기도 하지만 앞으로도 저 양반의 사상이나 삶, 우선 삶 자체를 국민들이 정말 편견 없이 잘 공부하면 우리나라의 국격을 높이는데 크게 이바지 할 수 있는 자산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관용>네. 이 방송을 들으시는 분들 중에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 뭐 좋아하시는 분, 싫어하시는 분, 여러 평가가 있을 겁니다. 또 구체적으로 역사 속에서 취하셨던 여러 행보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평가가 물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하늘에서 듣고 계실 김대중 전 대통령께 누구보다 많은 고통을 받으셨던 분이기도 하지만 또 누구보다 본인이 원하는 민주주의와 남북평화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뚜렷한 성과와 성공을 이루어내신 분 아니겠습니까. 이제 오늘 날의 한국사회, 우리들이 책임지고 잘 할 테니 염려 너무 많이 하시지 말고 정말 편안하게 쉬시라고 그런 말씀 저는 좀 드리고 싶네요. 오늘 함께 좋은 말씀들 나눠주신 이해동 목사님, 김근태 전 의원, 정세현 전 장관, 세 분 귀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오늘 고맙습니다. 시사자키 오늘 여기서 마무리 짓고요. 저는 내일 6시에 다시 옵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