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배너 닫기

연예 일반

    이문세 “‘별밤’, 처음에는 6개월만 하려고 했죠”

    • 2009-07-27 05:18
    • 0
    • 폰트사이즈

    [노컷인터뷰] 영원한 별밤지기 이문세-박경림

    SS

     

    MBC 라디오 표준FM(95.9Mhz) ‘별이 빛나는 밤에’(연출 김빛나, 이하 ‘별밤)가 올해로 방송 40주년을 맞았다. 지난 1969년 3월 17일, 오남열 전 MBC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첫 전파를 쏘아올린 ‘별밤’은 총 22명(더블 DJ포함)의 DJ를 배출하며 10대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았다.

    ‘별밤’이 남긴 기록들은 실로 한국 라디오사에 기록될만하다. 40년 동안 청취자들에게 받은 사연만 대략 150만통. 사연 한통을 A4한장 분량으로 계산해 이어 붙이면 약 4050KM에 이른다. 이는 서울과 부산을 50번 왕복할 수 있고 에베레스트 산 (8850m)을 44번 쌓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한다.

    ‘별밤’은 스타들의 등용문으로 활용됐다. 톱스타 이경규, 김국진이 무명 시절, 보조 MC를 맡으며 심기일전을 다졌던 프로그램이 ‘별밤’이었고 심은하, 김희선 등 90년대 청춘스타들이 신인시절 단골로 출연했다. 방송인 박경림, 가수 이수영 등은 ‘별밤’의 ‘별밤 뽐내기 대회’코너를 통해 방송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별밤’에서는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고 최진실, 고 서지원, 고 김광석의 목소리도 종종 들을 수 있었다. 고 노무현 대통령 역시 국회의원 재임 시절, ‘별밤’에 출연했다. .

    ‘별밤’의 전성기는 가수 이문세가 DJ를 맡았을 때였다. 1985년, 당시 청춘스타였던 이문세는 ‘별밤’을 당대 최고의 인기 프로그램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별밤’의 DJ를 뜻하는 ‘별밤지기’란 말도 이문세에게 처음으로 붙여진 닉네임이다.

    1996년, 눈물을 흘리며 ‘별밤’ 스튜디오를 떠난지 13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많은 이들은 그를 ‘별밤지기’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가 진행하던 ‘별밤’을 듣고 자란 한 소녀가 이제는 어엿한 ‘별밤’의 안방마님 자리를 꿰찼다.

    ‘별밤’ 40주년을 기념해 한자리에 모인 전 별밤지기 이문세와 현 별밤지기 박경림에게 ‘이립’을 맞은 ‘별밤’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해 들어보았다.

    ◈이문세 “12년이나 ‘별밤’ 진행할 줄 별들도 몰랐죠”

    1980년대 가수 이문세의 인기는 지금의 ‘빅뱅’ 못지 않았다. 때문에 당시 최고의 청춘스타로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그는 ‘별밤’의 DJ직이 돌아왔을 때 탐탁치 않아하다 못내 이를 수락했다.
    SS

     



    “그 때만 해도 KBS ‘밤을 잊은 그대에게’가 가장 인기가 좋았어요. 게다가 저는 주로 FM에서 음악 전문 프로그램만 맡아왔기 때문에 표준 FM에서 방송되는 ‘별밤’ DJ직을 맡으라고 했을 때 시큰둥하게 받아들였지요. 결국 제작진에게 ‘6개월만 하고 싫으면 그 때 빼주겠다’는 굳은 약속을 받아내고 마이크를 잡게 됐지요.”

    일종의 ‘소방수’ 같은 역할로 ‘별밤’에 투입됐지만 이문세는 시쳇말로 ‘대박’을 쳤다. 얼마나 인기가 좋았던지, 이문세가 전날 방송에서 한 말이 바로 유행어로 만들어져 회자됐다. 어쩌다 말실수라도 하면 학부모로부터 항의전화가 빗발쳤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케이블 TV가 없었던 시절이기에 라디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죠. 게다가 중고교 학생들과 대화를 나눈다는 게 참 매력적이었어요. 결국 12년 동안이나 ‘별밤’ 스튜디오를 지키게 됐죠. 제가 그렇게 오랫동안 ‘별밤’ DJ를 하리라곤 아마 별들도 미처 몰랐을걸요.(웃음)”

    이문세는 ‘별밤’을 단순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아닌 일종의 문화적 선구자 역할을 하도록 이끌었다. 매 년 여름, 800명의 청소년들과 함께 했던 별밤 가족마을, 지금의 톱가수들을 배출해 낸 별밤 뽐내기 대회, 당대 최고의 뮤지션들이 함께 했던 별밤 잼콘서트, 실험정신이 가득했던 별밤 창작극장 등은 모두 이문세가 DJ를 맡았을 때 만들어진 코너다.

    “사실 제가 ‘별밤’을 처음 맡았을 때만 해도 가수로서 제대로 된 히트곡이 별로 없었을 때였어요. 다른 방송사 DJ들에 비해 지명도나 방송진행에 있어 완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방송을 맡다 보니 어떻게 하면 청소년들에게 가깝게 다가설 수 있을까 고민했죠. 그 결과 청취자들의 참여를 유도하는 특별한 이벤트를 끊임없이 만들게 됐어요.”

    12년 동안 진행하며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이문세는 한 청취자를 잊을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

    “항상 편지에 숫자를 새겨 보내던 여학생이 있었어요. 200번째를 넘은 뒤 글씨체가 바뀌더군요. 알고보니 그 학생은 백혈병에 걸려 자신의 인생을 일기 쓰듯 제작진에게 매일 보낸거였어요. 그리고 그 학생이 세상을 떠난 뒤 친구들이 대신 편지를 보냈고요. 아직도 그 친구를 잊을 수가 없네요.”

    SS

     

    ◈박경림 “‘별밤’, 이제는 온가족이 함께 듣는 프로그램이죠”

    박경림은 여러모로 ‘별밤’과 인연이 깊다.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1990년, 지금은 무너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삼풍백화점에서 열린 ‘별밤’ 공개방송에 갔다 인파에 깔려 큰 화를 당할 뻔 했다.

    “당시 ‘별밤’의 인기가 엄청났어요. 이문세 씨가 삼풍백화점에서 공개방송을 한다고 딱 한번 얘기했는데 (중간에 이문세가 사실은 여러번 얘기했는데 박경림이 한 번만 들은 것이라고 정정한다) 인파가 몰려 공개방송이 취소됐어요. 그 때 제가 집이 구파발이었거든요. 어린 마음에 제가 늦게 도착한 탓에 앞쪽에 있는 친구들만 들여보내 공개방송을 할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어요. 결국 집에 안가고 끝까지 버티다 사고를 당했죠. (웃음)”

    학창시절 ‘별밤’을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청취했다는 그는 1996년, 청취자 장기자랑인 ‘별밤 뽐내기 마을’을 통해 방송계와 인연을 맺고 결국 ‘별밤’의 안방마님 자리까지 꿰찼다.

    박경림은 ‘별밤’이 배출한 유일한 기혼녀 DJ이자 ‘엄마’ DJ이기도 하다. 그는 매일 밤,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별밤’을 위해 생후 6개월 된 아들 민준 군을 떼어놓고 서울 여의도 MBC로 출근하는 ‘워킹맘’이다.

    “스튜디오에서 출산하겠다고 청취자들과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죠. (웃음)아직은 아기가 엄마가 일하러 간다고 보채거나 하지는 않지만 언젠가 그럴 시기가 오겠죠. 하지만 저는 현재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무엇보다도 ‘별밤’ 40주년에 제가 DJ를 맡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큰 선물이자 영광이니까요. 처음 ‘별밤’ 측에서 DJ를 맡겠냐고 제의가 왔을 때도 지금 아니면 내 인생에서 ‘별밤’을 다시 맡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흔쾌히 수락했답니다.”

    매체가 다양해지면서 ‘별밤’의 명성이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도 들린다. 박경림은 이에 대해 명쾌한 해석으로 해답을 내놓았다.[BestNocut_R]

    “예전에는 주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이 들었다면 지금은 학원 앞에서 학생들을 기다리는 어머니들이 휴대전화로 사연을 보내는 예가 부쩍 늘었지요. 그만큼 청취층이 다양해졌다는 뜻이죠. 연말에는 한동안 명맥이 끊겼던 잼콘서트를 부활시키려는 계획도 세웠어요. 3040 추억과 향수를 가진 분들이 무척 좋아하실 것 같아 벌써부터 설렌답니다.”

    이 시각 주요뉴스


    실시간 랭킹 뉴스

    노컷영상

    노컷포토

    오늘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