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Nocut_L]지난해 정부로부터 기술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명장에 선정된 제과 장인 김영모 회장.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건 빵집을 운영하며, 경쟁이 치열한 강남 상권에서 대형 체인 제과점과 당당히 경쟁해 큰 성공을 거둔 제과점 CEO입니다.
그는 최상의 품질 관리를 위해, 주변의 많은 요청에도 불구하고 체인점을 늘리지 않기로도 유명하죠. 사업의 성장이나 돈이 목적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빵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는 김영모 회장. 그는 가난하고 외로운 청소년 시절,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집을 나와 경북 왜관에서 빵집 보조로 일하며 세계 최고의 빵을 만들겠다는 꿈을 키웠는데요.
6평 빵집에서 이룬 신화. 빵굽는 CEO 김영모 회장을 1월 28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김영모 과자점’, 네 곳 직영점의 연매출은 60~70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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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정부로부터 ‘명장’으로 선정되시고 축하 많이 받으셨죠?
네. 그렇습니다.
▶ 명장 되신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제과 제빵쪽에서는 어떤가요?
제과쪽으로는 제가 여섯 번째 명장이 되었습니다. 물론 정부로부터 명장이라는 호칭을 받아서 개인적으로 굉장히 영예로운 일이지만, 그것보다는 더욱더 인정받고 싶은 대상이 있는데요. 그 대상은 저희들의 고객에게 정말 인정받는 과자점을 하고 싶습니다.
▶ 몇 년만에 이렇게 명장으로 선정되신 건가요?
제가 40여년 가까이 했습니다. 20년 정도 이상 되어야만 명장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집니다.
▶ 우리나라에서 제과쪽으로는 명장이 여섯 분 밖에 안 계시다니, 정말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 영예로운 일인 것 같네요.
그렇습니다. 단순하게 기능적인 측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봉사 활동이라든지 그 사람의 품성 등 기타 여러 가지를 판단해서 명장이 선정되죠.
▶ 지금 ‘김영모 과자점’이 몇 군데 있습니까?
‘김영모 과자점’이 전국에 세 군데가 있고요. 샌드위치 카페가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네 곳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 전부 직영점인가요?
네. 직영으로 하고 있습니다. 다들 왜 프랜차이즈를 하지 않느냐고 제게 질문을 많이 하시는데요. 조금 전에 말씀하셨듯이 한국제과의 역사가 공식적으로 나타난 것이 약 120년 정도 됩니다. 그런데도 120년을 유지하는 과자점이 우리나라에 한 곳도 없거든요.
가까운 일본이나 유럽이나 본고장에 가보면 보통 3-4백년, 일본 전통 과자점의 경우는 거의 1천년에 가까운 역사들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상당히 안타까움을 느꼈죠. 저는 아이들에게 정말 좋은 과자점을 물려주고 싶거든요. 그래서 프랜차이즈는 저희들이 안하고 있습니다.
▶ 직원의 숫자는 어느 정도입니까?
점포가 작다고 해서 직원수가 적은 것은 아니고요. 규모는 작지만 그만큼 많은 고객들이 찾아주실 수 있도록 운영을 하면 될 것 같고요. 저희들은 약 140-150명 정도가 근무하고 있습니다.
▶ 네 군데 점포인 것에 비하면 엄청 많은 것 같은데요?
네. 인원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고, 전체적으로 점포수는 적지만, 점포를 10개, 20개 하는 것 못지않은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 그만큼 고객에게 많은 서비스를 드리기 위해서 매장에 비해 직원수가 더 많은 건가요?
네. 그렇습니다. 보통 제과점이라고 하면 지역 주민들, 기타 다른 고객들인데, 계속 재방문에 의해서 성업이 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정말 좋은 제품, 맛있는 제품을 만들지 않으면 재방문이 어려워지죠. 그래서 제가 좀 성공했다고 해서 저희 후배들이나 동료들이 과자점을 하겠다고 제게 자문을 구하러 옵니다.
그럴 때 제가 후배들에게 우선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항상 먼저 물어보는 것이 있어요. “왜 사업을 하고자 하느냐?”하고 제가 질문을 해요. 그랬을 때 요즘 젊은이들을 보면 첫 마디가 “돈 벌어야죠.”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럴 때 저는 정색을 하고 “아직 사업할 준비가 덜 된 것 아니냐? 조금 있다가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왜 그러냐고 반문을 해요. 그런데 기능인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로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지, 돈을 벌기 위해서 노력해서는 안되거든요. 그래서 정말 좋은 제품을 만듦으로 인해서 고객들이 자꾸 재방문하게 되어 있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 매출은 어느 정도 되나요?
저희들은 연간 60억~70억 가까이 됩니다.
▶ 도곡동의 한 주상복합 아파트는 상가 입점하기가 매우 까다롭다고 경쟁이 치열하다고 하던데, 건물주로부터 입점제의를 직접 받으셨다고요? 그만큼 ‘김영모 과자점’의 퀄리티가 이런 면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 같은데요.
저희 과자점을 선택해 주신 것은 참 감사한 일이죠. 제가 다 한 것은 아닌 것 같고요. 하나님께서 도와주신 것 아닌가 싶습니다.(웃음)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신 것 같아요. 저희는 사실 지나다니면서도 항상 ‘여기 참 좋은 곳이다.’ 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수의계약이라든지 여러 가지로 자금력이 뛰어난 사람들만 들어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들어가면 참 좋겠다.’하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말이죠. 그런데 우연한 기회로 연락이 와서 저희들이 입점하게 된 것입니다.
▶ 경제적으로 수준이 높은 분들이 사는 곳이라서 제품도 꽤 까다롭게 고를 것 같고 해서 장사하시기는 좀 힘드신 부분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 곳에 있는 저희 과자점이 2000년도에 오픈한 이후 많은 성장을 했고요. 또 브랜드 파워가 많이 높아진 이유는 그쪽에서 제품력이라든지 여러 가지로 인정을 받으면서부터거든요. 그쪽의 고객들은 상당히 까다로운 고객들이고, 외국을 많이 다니셔서 제과에 대해서 많이 아시는 분들이 많으세요.
그런데 저는 그쪽에서 제품을 만들면서도, 항상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해외 연수를 안 다닐 때 혼자 해외연수를 다니면서 많은 제품에 대한 지식과 연구개발이 되어 있었던, 준비가 되어 있었던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고객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데 그렇게 어려움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 고객들이 요구하는 제품들을 그 때 그 때 개발해낼 수 있었기에 지금 ‘김영모 과자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 눈칫밥 먹던 어린 시절, 학교 앞 빵집에서 맛본 빵 부스러기의 맛 ▶ 보통 제과점 상호를 외래어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김영모 과자점’이라고 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처음에 사업을 시작하면서 상호를 선택할 때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또 제가 창업을 할 때는 1982년이었는데, 그 때는 외국발음이 많이 나는 브랜드가 굉장히 유행을 할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제가 모시고 있던 사장님께 제가 사업을 하겠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상호에 대한 여러 가지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 때 사장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자네 같은 기술력을 가진 사람이 왜 외국같이 자기 이름을 달려는 생각을 해보지 않는가?”하고 조언을 해주셨어요. 그래서 제가 용기를 갖고 ‘김영모’라는 이름을 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참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름을 달았잖아요. 그래서 잠시도 소홀할 수 없다는 것이 하나의 큰 장점이고요. 항상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뭔가 보이지 않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 창업하시기 전까지는 무교동에 있는 제과점에서 근무하셨는데요. 그 때는 어떤 직책이셨나요?
처음에 제가 군대가기 전에 거기에서 공장장 밑에서 일을 했었어요. 그러다가 군대 갔다와서 다른 곳에서 3년 정도 기술을 배워서 다시 그 곳에 갔는데요. 그 때는 ‘보리수 제과점’에 공장장으로 갔어요.
▶ 그 곳의 사장님도 진정한 사장님이셨네요.
참 훌륭하신 분이세요. 그리고 굉장히 자상하신 분이고요. 제가 군대가기 전에 말썽을 많이 피웠는데도 다시 받아주실 정도로 인자하신 분이셨죠.
▶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열일곱 살에 빵공장에 취직하시면서 빵과 인연을 맺게 되셨다고요?
네. 대개 인터뷰를 할 때 저한테 빵이 뭐냐고 많이 물어보세요. 그러면 저는 항상 이렇게 대답합니다. “빵은 내 인생이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사실 제가 제과점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은 초등학교 때인데요. 그 때 제가 작은 아버님댁에 가서 살았거든요. 그러다가 친아버지댁에 갑니다. 그 때 이미 가서 보니까 이복 동생이 세 명 있었고요.
저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간 것이니까 어느 정도 철이 들어서 간 것이었거든요. 그 때 가서 보니까 아버님이 제가 가기 전까지는 신문사 주재원으로 그 지역에서 근무하셨다고 그래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퇴직하시고 나서 그 이후에 제가 가게 되었기 때문에 그 때까지만 해도 굉장히 어려운 시기였거든요.
제가 빵 만드는 것 다음으로 눈치를 잘봐요. 하도 어릴 때부터 눈칫밥을 많이 먹어서요. 그래서 가서 보니까 먹을 쌀도 없을 정도로 어렵게 지내는데, 제가 거기를 가게 된거예요. 너무너무 배고프고, 새어머니 밑에 있는 것이 너무너무 외로운 일이었어요. 그래서 학교 마치고 나오면 학교 앞에 빵집이 하나 있었어요. 그 곳이 전남 광주였습니다.
제가 수창초등학교를 다녔는데요. 그 앞에 조그만 빵집이 하나 있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만 해도 제과점에서는 진열을 전부 윈도우에 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설탕이 귀하니까 설탕을 도너츠 등에 듬뿍 묻혀놓았는데, 진열된 모습을 쳐다만 보면서 허기를 매웠어요.
그렇게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서있다 보면 안타까운지 공장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빵부스러기 하나를 주면 그 맛이 너무너무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기억이 머릿속에 굉장히 잠재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외갓집에 어머니를 찾아가게 되는데, 어머니는 또 저와 같이 살 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 아버님이 어머님과 헤어지시고 재혼을 하신 건가요?
제가 태어나자마자 부모님은 이혼하셨어요. 그러니까 저는 갓난아이 때부터 부모님은 계셨지만 작은 아버지 손에서 컸어요. 형님이 한 분 계셨는데 형은 어머니가 데려가고, 저는 아버지가, 보통 남자들이 그렇잖아요. 책임도 못 지면서 뺏어서 저를 작은 아버지에게 맡겨서 키운 거예요. 그래서 작은 아버지마저 어려워지니까 저를 아버지에게 보낸거죠. 그래서 제가 광주를 가게 되요.
▶ 그러니 눈치를 안 볼래야 안 볼 수 없는 상황이었겠네요.
이미 알고 갔기 때문에 더욱더 힘이 들었던 거죠.
▶ 어린 시절에 그렇게 빵집 앞에서 얼마나 서계셨던 건가요?
제가 기억을 더듬어 보면 보통 2~3시간 서있었던 것 같아요. 그 때 막상 학교 끝나면 집에 가봤자 누군가 반겨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저는 항상 빵집 앞에 서서 바라보고 있는 기억이 너무나 강했던 것 같습니다.
▶ 그 때 그 빵맛이 어떠시던가요?
아마 제가 지금 만든 빵이 훨씬 맛있겠죠. 그러나 그 빵맛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 그런 생활을 언제까지 하신 겁니까?
제가 아버지 밑에 약 6개월 정도 있었는데 도저히 못 있겠더라고요. 요즘도 그렇지만 가정이 어려운 사람들을 보면 서로 협력해서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는데 어려운 가정일수록 그렇게 부부싸움을 많이 해요. 저희 아버님과 새어머니도 생활이 넉넉지 못한데다가 저라는 아이가 갑자기 갔기 때문에 항상 부부싸움을 하게 되면 마지막 화살은 꼭 저에게 돌아오게 되죠.
예를 들어서 그 화가 항상 저한테 돌아와서 마지막에는 제가 꼭 매를 맞았어요. 아버지가 저를 때리실 때마다 저는 고집이 있어서 맞으면서도 절대 울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제가 광주를 갈 때 이미 이복동생이 있다는 것도 알고 갔기 때문에 속으로 이복동생들 앞에서 절대 울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고 갔거든요.
제가 울고 빌고 해야 하는데 그러질 않으니까 매를 더 많이 맞죠. 그 날도 제가 매를 많이 맞고 학교를 가는데 정말 눈물이 많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다리 밑에서 한참 울다가 바로 학교로 안 가고 버스 정류장으로 갔어요. 거기서 제가 무임승차를 하게 되었죠. 그 당시에는 차장이 있었는데요. 버스가 영산포 정도 가다가 차표 검사를 해서 제가 고향인 해남까지 데려다 달라고 아무리 사정을 해도 안된다면서 쫓아내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지금 생각해보면 쫓아낸 것이 제가 거짓말 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제가 피부가 굉장히 하얀 편이거든요. 그 때는 부잣집 아들들이 얼굴이 하얗거든요. 그러니까 아마 저를 거짓말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은데, 제가 그 길로 3-4일을 밤에도 자지 않고 걸어갔어요. 그 때는 비포장도로였어요. 그 나이에 영산포에서 해남까지 걸어갔어요. 그런데 비포장길을 계속 걸어가는데 버스가 오면 또 숨어야 했어요.
왜냐하면 아버지가 저를 쫓아올까봐 겁이 났거든요. 그렇게 숨어 있다가 또 걸어가는데, 저녁에 잠을 잘 수가 없는 이유가 저녁에 잠을 자면 더 무서우니까, 움직이지 않으면 더 무섭잖아요. 그래서 계속 걸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걸어서 작은 아버지댁에 다시 찾아가죠.
◇ 어머니를 만나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그 날 밤 너무나 많이 울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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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때가 몇 학년 때였나요?
그 때가 초등학교 5학년 때입니다. 제가 좀 남다른 삶을 산 사람인데요. 제가 작은 아버지댁에 찾아갔는데요. 작은 아버지가 최근에 저한테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시골에 살아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저를 아버지께 보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또 다시 왔으니까 화가 나셔서 제가 오자마자 또 저에게 매를 많이 때리셨어요. 그러니까 저희 작은 어머니가 보고 계셨는데, 저희 작은 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셨어요.
그래서 저희 작은 어머니가 저희 집안에 복음을 들고 시집을 오시는데요. 그 때 작은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너는 여기 이 집안에서 살다가는 맞아 죽겠다. 그러니까 외갓집을 찾아가라.”라고 이야기 하셨어요. 그 길로 작은 어머니가 부엌에 있던 저를 꺼내서 보내주셨어요. 그런데 작은 어머니도 외갓집이 어디 있는지 모르시니까 고향에 가서 물어보면 알 것이라고 하셨어요. 왜냐하면 저희 외갓집이 굉장히 대농이었거든요. 그래서 고향에 가서 친척 되는 분들께 물어보니까 안 가르쳐 주시더라고요.
그런데 그것을 안타깝게 본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너희 외갓집이 ○○면의 ○○네라고 하더라.” 라고 막연하게 말씀해 주셔서 그 때부터 또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걸어서 외갓집을 찾아갔는데, 벌써 3-4일을 굶은데다 비포장길을 걸었으니까 완전 거지였죠.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었습니다.
▶ 고무신인들 제대로 신고 가셨겠어요?
나중에 모든 긴장이 풀려서 보니까 발바닥이 모두 껍질이 다 벗겨져 있었고, 제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서 거의 일주일을 드러누워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 제가 외갓집에 들어 갔는데, 그 당시에 꼬마 거지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래서 “여기 꼬마 거지가 왔으니까 밥 좀 따뜻하게 먹여서 보내라.” 라고 이야기하시더라고요.
제가 그 때 “여기가 저희 외갓집이라고 하던데요.”라고 이야기 했어요. 그랬더니 저를 한참 쳐다보시다가 “네가 누구냐?”라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이름을 말했는데요. 나중에 외할아버지께 제가 외손자인 줄 어떻게 알았냐고 여쭤보니까 제 이름이 형 이름과 비슷하고 하시더라고요. 제가 갔을 때 마침 점심식사 때였는데, 모두들 식사하시다가 나오셔서 저를 씻기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그런 좀 남다른 삶을 살았죠.
▶ 외가에 가서는 좀 편하셨나요?
정말로 모처럼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아주 아름다운 귀부인 한 분이 오셨는데, 느낌으로 저희 어머니라는 것을 알겠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 때 어머니만 만나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줄 알았어요. 모든 희망이 어머니한테만 있었기 때문예요. 그런데 어머니가 오셨는데 저를 바로 쳐다보지도 않으시고, 밤에 제가 자다가 뭔가 느낌이 나서 쳐다보니까 어머니께서 자고있는 제 머리맡에서 담배를 피고 계시더라고요.
어머니는 저 때문에 담배를 피우셨다고 그래요. 어린 저를 떨어뜨려놓고 그 외로움 때문에 담배를 배우셨다고 하셨는데요. 나중에는 끊으셨지만요. 그런데 저는 어머니와 같이 사는 꿈을 꾸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제게 하시는 말씀이 “너하고 같이 살 수 없다.”고 하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당신이 개가를 할 때 형 하나밖에 없다고 하고 결혼을 했기 때문에 저라는 사람을 나타낼 수가 없는 거죠.
제가 그 소리를 듣고 정말 밤새 울었습니다. 모든 꿈과 희망이 다 사라졌거든요. 그 때 제가 너무 많이 울었고, 그 다음 날 아침에 같이 살아보지도 않았으면서 정을 뗀다고 아무 말 없이 어머니가 떠나시더라고요. 그래서 먼발치서 어머니를 쳐다보면서 입술을 깨물고 ‘성공을 해야겠다. 성공을 해서 잃어버린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나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때부터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정말로 저는 성공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나니까 시골에 있는 것이 정말 싫어졌어요. 그래서 제가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께 어머니와 가까운 곳으로만 보내달라, 어머니 가까운 곳으로만 보내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고집이 세다고 했잖아요. 제가 한번 고집을 세우면 굉장히 오랫동안 고집을 피웁니다. 그래서 할 수 없어서 저를 어머니 가까운 곳으로 보내주는데, 결국 이모 곁에 얹혀서 살게 되었죠. 그 때 중학교 다니다가 갔으니까 철이 많이 들었을 때였고, 거기서 고등학교를 들어가자마자 3개월도 채 안 다니고 그만두게 되었죠.
어릴 때는 그나마 잘 몰라서 그랬다지만 철이 들면서 눈칫밥을 먹는 것이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립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뛰쳐나왔는데,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제과점이었어요. 그 곳에 취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연결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우선 제가 먹고 잘 곳이 없잖아요. 그 때 제과점에서는 숙식이 제공되었어요. 그래서 제과점에 취업을 하게 되었죠. 그 때부터 제빵인생이 시작된 거죠.(웃음)
▶ 그 때 처음 가신 곳이 어디였나요?
역시 어머니가 계신 곳과 가까운 곳이었는데요. 경북 왜관에 있는 ‘맛나당’이라는 제과점이었는데, 그 제과점은 일반적으로 판매되는 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학교급식용 빵을 만드는 제과점이었어요. 그 곳에 처음으로 취업을 하게 되었죠.
▶ 어머니와 가까운 곳에 있게 해달라는 것은 그만큼 모정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탓이었겠죠.
그런 것도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제가 성공해야 하잖아요. 제가 외갓집에 있을 때 어머니가 가신 이후로는 제가 한 번도 입술이 성한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매일 입술을 깨물었기 때문예요.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아서는 도저히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 때 이야기 들어보니까 왜관이라는 곳은 미군부대가 많은 도시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까운 쪽으로 저를 보내달라고 해서 오게 된 것이죠.
▶ 그러면 자연히 어머니도 만나게 되었나요?
거의 못 만났습니다. 어머니도 참 불행한 삶을 사셨죠. 가깝게 있는데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요. 한 번 실패를 하셨던 분이라 그런지 새로 결혼한 가정이 잘못될까봐 그런 두려움이 많으셨던 것 같아요.
◇ 성공하고 싶어서 시작한 제빵 기술... 죽고 싶을 때도 많았죠▶ ‘맛나당’에서는 처음에 어떤 일을 하게 되었나요?
그 당시만 해도 연탄으로만 빵을 굽고, 가스도 없었을 때였어요. 그 때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청소, 그릇 닦는 허드렛일부터 시작했죠. 그 다음에는 오븐으로 빵 굽는 것을 했고요. 이런 단계별로 일이 진행되었는데, 그 때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것은 연탄 가스를 마시는 것이었어요. 다락도 요즘 같은 환경이 아니고, 공장 위에 다락을 매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잤어요. 그러면 밑에는 오븐도 그렇고 화덕도 그렇고 전부 연탄이 타고 있거든요. 그렇게 하루종일 연탄가스를 마시면서 일하고 또 잠은 공장의 다락에서 자니까 밤새도록 연탄가스를 마셔요.
그러면 아침에 일어나면 완전히 술 취한 사람 같습니다. 아침에 다시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서 밖에서 10~20분 정도 서 있어야만 맑은 정신이 돌아와요. 그런 점이 힘들었고, 또 더 힘든 것은 뭔가하면 명절 때입니다. 그 때는 여러 가지로 물자가 귀할 때니까 연탄도 불씨 하나만 남겨놓고 전부 다 껐어요. 그리고 사장님과 직원들은 다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서 고향으로 가는데, 저만 불꺼진 다락방에서 혼자 추위에 떨면서 배고팠던 기억이 너무나 생생합니다. 그것이 너무나 힘들었어요.
▶ 그럴 때마다 버텨낸 힘은 역시 ‘나는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었군요.
그렇습니다. 그런 생각이 굉장히 강했었죠. 그러나 저한테는 ‘멘토’가 없었어요. 제가 요즘에 학생들 강연을 나가보면 이 세상에 가장 소중한 멘토는 부모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느 부모가 정말 사랑하는 자식을 독사굴에 던져 넣겠어요? 그런데 저는 그런 멘토가 없었어요. 그렇다 보니까 정말 처절하게 외롭고 쓸쓸해서 술을 먹기 시작했어요.
그 어린 나이에 술을 먹고 담배도 피우게 되었죠. 그래서 술을 너무 많이 먹어서 항상 술에 취해 있고, 손이 흔들리는 수전증이 생길 정도였어요. 또 담배는 하루에 거의 세 갑을 피웠습니다. 그 당시에 무슨 맛이나 알고 피웠겠어요? 그런 생활을 계속 하면서 방황을 하게 되었죠. 그러다가 싸워서 소년원에도 가게 되고, 한 번 소년원을 다녀오니까 마음이 위축되고 조심스러워졌어요.
▶ 그 당시에 소년원을 다녀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정말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때 아닌가요?
정말로 그 당시 소년원은 밤에 폭행이 난무하고, 정말 요즘 교화생활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소년원을 갔다가 나와서 정말 바르게 살아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모처럼 적금을 붓기 시작했습니다. 적금을 1년 동안 열심히 했는데, 공교롭게도 적금을 탈 때가 되니까 결핵이 걸려서 직장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결핵이 무서운 병이었어요. 그 때 저한테는 얼마나 절망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있는 돈으로 하숙집에서 매일 술먹고 좌절하고요. 저는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는 것을 그 때 알았어요. 죽으려고 해도 죽는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보면 사람이 참 묘한 것 같아요. 죽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병이 자꾸 나빠지면 나빠질수록 살고 싶다는 의욕이 더 강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생전 연락을 안 하다가 할 수 없이 어머니에게 연락을 했어요. 그 때도 어머니가 저와 같이 살 수 없는 입장이니까 저를 당신이 다니시던 절에다 맡기셨어요. 그래서 절에서 약을 먹으면서 치료를 받게 되었어요.
▶ 그럼 그 때도 왜관에 계속 계셨던 건가요?
아닙니다. 대구로 나갔었죠. 왜관에서 오래 있을 수가 없었어요. 왜냐하면 제가 왜관에 있는다는 것 자체가 어머니에게는 부담이었죠. 그래서 저는 얼마 안 있다가 대구로 가서 거기서 직장생활을 하고, 대구에서 그렇게 술을 먹고 방황을 하는 생활을 했던 거죠.
▶ 소년원까지 다녀왔지만, ‘성공’이라는 것은 잊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성공을 해야겠다는 집념은 항상 살아 있었죠. 그러나 방황을 하면서 그 가치 자체가 자꾸 희석이 되고 잊혀져 가는 시기였고요. 그럴 때마다 그래도 제 주위에는 항상 도와주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어요. 그 때 저를 처음에 취조했던 형사분도 저한테 굉장히 우호적이었고요. “너는 그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왜 싸웠니?” 하시면서 굉장히 도와주시려고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그런 사람들 덕분에 제가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어요.
제가 그런 과정에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 그 동안의 제가 어려운 역경과 고난을 잊게 하신 것도 하나님이시잖아요. 또 저를 다시 교회로 불러들인 것도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불러 주신거죠. 그래도 어릴 때 작은 어머니의 영향으로 신앙생활을 조금이라도 했었거든요. 그 힘이 항상 가슴속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그러고 보면 정말 순수한 소년이었는데, 환경에 의해서 사람이 그렇게 방황하게 된 것이네요.
착한 것은 잘 모르겠는데요. 어쨌든 제가 끝까지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제가 생각했던 삶을 찾게 된 계기가 있어요. 제가 대구에서 결핵에 걸려서 치료를 하고 나오니까 대구에서는 취업이 잘 안되었어요. 다 나았다고 해도 그 때는 믿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요. 서울로 온 지 얼마 안 되어서는 군대에 가게 되었고요. 그런데 그 때는 군대가는 것 자체도 제게는 절망이었어요. 왜냐하면 그 때가 제과쪽이 굉장히 급성장할 때였는데, 3년 동안 군대를 가게 되면 제대 후에 다시 배워야 했거든요. 그것이 너무 힘들었던 거예요.
▶ 빵굽는 CEO, ‘김영모 과자점’ 김영모 회장의 이야기는 내일 2편으로 이어집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