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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숙 "내 친구 방실이 모습에 맘 아파"



인물

    현숙 "내 친구 방실이 모습에 맘 아파"

    • 2008-01-07 15:18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노래한다-가수 현숙

     

    포장마차’ ‘정말로’ ‘춤추는 탬버린’ ‘사랑하는 영자씨’ ‘요즘남자 요즘여자’. 손에 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히트곡을 가지고 있는 가수 현숙. 스무 살에 데뷔해서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수로서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인데요. 그런데 수많은 유행가보다 가수 현숙을 더 빛나게 하는 건 그녀의 지극한 효심입니다.

    14년간 병간호한 어머니를 지난해 하늘나라로 보낸 현숙은 어르신들 앞에 서면 부모님 생각에 ‘노래가 목에 걸린다’고 그럽니다.항상 명랑 쾌활한 얼굴에다가 어르신들 보면 덥석 손잡아 목욕시켜주고 어려워서 공부하기 힘든 아이들 보면 장학금을 선뜻 내주는 따뜻한 마음씨까지 가졌습니다.

    흥겨운 노래로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효녀 가수 현숙의 어린시절과 음악,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1월 4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들어봅니다.

    ◇ 내 친구 방실이의 모습에 마음이 너무 아파

    [BestNocut_R]▶ 현숙 씨는 복을 많이 지어놓으셨기 때문에 새해에는 복을 많이 받으실 겁니다.

    저는 엄마 계실 때 항상 “복덩이”, “복덩이”라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새해에 복을 받는 것보다도 많이 나눠 드리고 싶어요.

    ▶ “복덩이”라는 말이 아주 친근하고 좋은데요.

    네. 사실 제 주위에 있는 친구들이나 동료들을 보면 정말 다 잘 되고 있어요.

    ▶ 얼마 전 ‘KBS 가요대축제’에서 방실이 씨가 휠체어를 타고 나와서 시청자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죠.

    정말 방실이 친구가 굉장히 밝고 늘 분장실에서 웃음을 주는 친구거든요. 그렇게 바른 말 잘하고 군기반장을 하던 동료가 요즘은 별로 없는데 방실이가 그렇게 되니까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친구지만 어떻게 대신 아파줄 수도 없고, 대신 노래 불러줄 수 없는 것이 안타깝더라고요.

    또 갈 때 침대에 누워서 벨트로 묶어서 가는데 정말 못 보겠더라고요. 마음으로 많이 울었어요. 정말 여러분들 새해에는 복도 복이지만 건강 지키시는 일이 제일인 것 같아요. 너무 슬펐어요.

    ▶ 정말 방실이 씨가 그 동안 방실 방실 웃으며 노래 부르면서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기쁘게 했어요.

    그 날 ‘서울 탱고’를 같이 부르는데 노래가 참 슬프더라고요. ‘내 나이 묻지 마세요’하는 노랫말이 밝은 노래인데도 굉장히 슬프더라고요.

    ▶ 방실이 씨 돕기에 많은 분들이 애썼지만, 현숙 씨가 그렇게 가만히 있지 않았다고 하던데요.

    가장 어렸을 때부터 친한 친구니까요.처음에 방실이 친구는 가수가 노래하는 무대에서 무용을 했었어요. 제가 먼저 데뷔를 하고 그 뒤에 서울 시스터즈로 데뷔를 했는데, 그 때도 저희 집에 와서 저희 엄마가 청국장이며 된장찌개를 끓이면 정말 밥을 맛있게 먹었어요.

    그리고 성격이 그렇게 좋아요. “어머니, 어머니, 따뜻해요” 하면서 아랫목에 벌떡 누워서 자기도 하고, 그렇게 참 좋은 친구였는데, 정말 마음이 아파서 볼 수가 없어요. 설운도 씨가 그러더라고요. “친구야, 내가 왜 안 간지 알지? 내가 널 볼 수가 없어. 눈물이 나서 못 갔어”라고 하더라고요.

    ▶ 고인이 된 최요삼 선수가 쓰러졌을 때 홍수환 씨 등 권투인들이 동료애를 보여줬던 것처럼 방실이 씨의 일을 계기로 해서 가수분들이 참 뜨거운 우정을 보여줬어요.

    그럼요. 이런 일을 뒤돌아 봐야지만 더 좋은 일이 있고, 더 큰 기쁨으로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뒤돌아보는 것은 참 좋은 것 같아요. 가수분들이 다 자기도 어려울 텐데 하나같이 힘이 되어 주어서 참 기뻤어요.

    ◇ 엄마가 쥐어준 돈 만 원, 쌀 한 말, 김치 한 통... 가수의 꿈을 안고 서울로

    ▶ 그러고 보니 현숙 씨도 무명시절이 있었겠네요.

    그럼요. 저는 전북 김제 평야가 있는 곳에서 벼농사 일도 돕고 하다가 서울에 올라간다고 하니까 아버지는 말리고, 엄마가 돈 만원에 쌀 한 말에 김치 한 통을 주셔서 9시간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왔는데, 어린 나이여서 아무 것도 몰랐어요.

    ▶ 그 때 돈 만 원이면 지금 십만 원 정도 되나요?

    몇 십년 전이니까 백만 원 정도는 될 거예요. 제가 고등학교 갓 졸업하던 해였거든요. 그리고 김치 한 통과 쌀 한 말만 달랑 들고 올라왔죠. 저희 시골 동네는 집성촌이예요. 그래서 서울에 올라간다고 하면 무조건 고시공부 하러들 올라갔어요. 판사 아니면 검사님 되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데 저는 노래하러 올라가겠다고 하니까 아버지는 반대하시고 엄마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돈을 쥐어 주시면서 “어서 가라, 가라.”하셨어요. 가면서 뒤돌아보는데 엄마가 울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내가 정말 잘 돼서 우리 엄마한테 잘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을 어려울 때마다 항상 했어요. 그런 우리 엄마, 고향에서 그 추운 데서 고생하는 우리 엄마를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 제가 흐트러지지도 않고 더 단단하고 야물게 살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저는 지금 활동하면서도 늘 그래요. 현숙이는 내 개인의 현숙이 아니고, 우리 가족의 얼굴이고, 친구들의 얼굴이고, 우리 국민 모두의 얼굴이기 때문에 항상 모범이 되어야 하고, 항상 밝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우울하고 칙칙하면 모든 분들이 짠하잖아요. 제가 엄마를 하늘나라로 보냈다고 해서 제가 늘 슬퍼하면 모든 분들이 가슴 아파하시는데, 그 분들이 제게 얼마나 큰 용기를 주시는지 몰라요.

    ▶ 14년간 어머니 병수발을 하실 정도로 현숙 씨가 정말 효녀이신 것 같아요.

    아니예요. 내 부모인데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 칭찬 받을만한 일은 아니예요. 오히려 칭찬을 들으면 너무 쑥스럽고 죄스러워서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겠어요.

    ▶ 그래서 그 때 서울에 처음 올라와서 어디로 갔었나요?

    제 친구와 같이 친구 언니 집에 갔어요. 왜냐하면 친척집에서는 “공부도 잘 하고 착한 네가 서울이 어디라고 오냐?”고 문전박대를 하시니까요. 그 때는 굉장히 섭섭했는데 지금은 너무 감사해요. 왜냐하면 저 잘되라고 그러신 건데 그 때는 굉장히 슬펐거든요.

    ▶ 그럼 그 때 서울에 처음 올라온 것이었나요?

    방학 동안 ‘옥경이’를 작곡하신 임종수 선생님한테 테스트를 받으러 왔더니, 졸업하면 언제든지 노래할 수 있으니까 공부 다 하고 부모님 모시고 같이 올라오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내려갔죠. 참 좋으신 선생님이세요.

    ▶ 내려갈 때 눈물 흘리지는 않았나요?

    아니요. 선생님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였죠.

    ▶ 그 때가 몇 학년 때였나요?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 현숙씨 형제가 몇 남매죠?

    12남매요. 제가 11번째고, 제 밑으로 남동생이 하나 있어요.

    ▶ 그럼 학창시절 때 누가 가수되라고 부추긴 건가요?

    부추긴 건 아니고요. 처음에는 어릴 때 집안 어른들이 법조계 쪽에 많이 계셔서, 저희 아버지는 늘 어려운 사람 편에 서서 일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멋있는 법관복을 입고 정말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겠다.’고 생각하고 공부를 열심히 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은 또 ‘배구’가 그렇게 멋있어 보였어요. 그래서 배구 선수를 하게 됐어요. 전국체전도 나갔거든요. 그 때는 6인제니까 포지션을 다 했었어요. 제가 깡총 뛰면서 정말 잘했거든요.

    그런데 합숙을 하다보니까 밤에는 기타 치면서 노래도 하게 되고요. 처음에는 저 혼자가 아니라 ‘그린 시스터즈’라고 해서 둘이 같이 노래를 했어요. 그랬는데, 그 친구는 집안 어른들이 너무 말리니까 포기를 했고, 저는 그냥 씩씩하게 했어요. 그런데 임종수 선생님한테 가서 노래 연습을 하는데 제가 그렇게 인사성이 밝고 붙임성이 좋더래요.

    그 때 ‘오뚝이 인생’이라는 노래를 부르신 김상범 선생님이 저를 보시고 끼가 있다고 가수 시키면 잘 하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선생님한테 발탁이 되어서 이렇게 굴곡없이 순탄하게 가수의 길로 들어섰어요. 그리고 바로 ‘정말로’라는 노래로 그 해에 10대가수가 되고, 전국 리사이틀도 했어요. 그래서 그 뒤로 ‘포장마차’도 나오고, ‘사랑하는 영자씨’, ‘요즘남자 요즘여자’ 등 쭉 1년에 한 곡씩 히트곡을 냈어요.

    ▶ 우리가 보통 ‘가수는 히트곡 3곡만 있으면 평생을 먹고 산다.’라는 말을 하잖아요.

    그렇죠. ‘눈물젖은 두만강’은 한 곡으로도 얼마나 히트였는데요.

    ▶ 그 중에서 ‘월화수목금토일’ 한 번 들어볼까요?

    네. 새해에도 여러분 ‘월화수목금토일’ 행복하십시오.

    ◇ 치매로 고생하셨던 아버지, 중풍으로 오랜 세월 누워만 계셨던 어머니

     

    ▶ 현숙 씨는 가사내용도 그렇고 항상 발랄, 쾌활, 명랑한 분위기가 더 많죠?

    네. 저는 가수 선배님이나 동료들을 보면 가삿말에 따라서 인생이 바뀐다고 해서, 겁이 좀 많아서, 또 저한테는 성격이나 모든 면에서 밝은 노래가 잘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같이 부르고 호응할 수 있는 노래를 좋아해요.

    ▶ 좋은 노래를 만나는 것도 참 큰 행운이잖아요.

    그럼요. 저는 곡을 받을 때 가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리고 곡, 편곡이 다 삼위일체가 돼야 해요.

    ▶ 하는 곡마다 다 히트했던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묻혀진 노래도 있어요?

    그럼요. ‘정말로’, ‘포장마차’, ‘건곤감리청홍백’까지는 잘 나갔는데, 1988년도 이후에 트로트에서 댄스, 랩으로 접목하면서 장르가 바뀌어가던 1995년도까지는 아무리 음반을 내도 안 되고 묻히더라고요.

    ▶ 그 때 나왔던 곡이 무슨 곡이었나요?

    ‘이럴수가 있나요’, ‘환희’ 등 많이 있었는데, 안되더라고요. 그 때 1995년도에 ‘사랑하는 영자씨’를 냈을 때, 저희 아빠가 ‘사람과 사람들’이라는 다큐 휴먼스토리에 나오실 때 배경음악으로 깔렸는데, 거기에서 이제 알려져서 그 때부터 다시 재기하게 되었어요.

    ▶ 현숙 씨에게 그런 슬럼프의 시간이 있었어요?

    아무리 해도 안 되고, 찾지도 않고, 굉장히 아주 어려웠었죠.

    ▶ 그러면 그 때 원인이 뭐였던 건가요?

    그 때 댄스 위주로 장르가 많이 바뀌었어요. 그래서 모든 트로트가 다 안 되었어요. 그런데 저의 아빠가 다시 재기하게 해주시고, 그 다음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죠. ‘사랑하는 영자씨’로 알려지게 돼서, 그 후에 아빠가 가셨는데, 밝은 노래를 계속할 수가 없어서 잠깐 쉬면서 석 달 동안 준비를 했는데 ‘요즘남자, 요즘여자’라는 노래가 나왔어요. 아빠가 다시 저를 빛을 보게 해 주신 것이라고 생각해요.

    ▶ 슬럼프에 있게 되고 하면, 정말 주변에서 찾지도 않나요?

    가령 100원의 출연료를 받던 곳도 30원에 간다고 해도 안 찾죠. 그리고 또 양로원이나 고아원에 봉사하러 갈 때도 인기 있을 때는 “어서 오세요”하면서 플래카드도 걸지만, 이렇게 슬럼프에 있고 인기가 없으면 “저, 봉사하러 갈께요.”라고 해도 별로 기뻐하거나 반겨해 주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제 조카들과 친구들에게 항상 어딜 가든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얘기해요.

    저 또한 그냥 이렇게 인기가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아침 새벽 여섯 시면 일어나서 껌껌하고 추운데 더 자고 싶지만 차 밀리기 전에 나와서 대중목욕탕에 가서 목욕하면서 아줌마들의 이야기도 들으면서 미장원 문 열 때 첫 손님으로 와서 가장 먼저 준비하고 여기 저기 다니면서 음반 제작도 하고 방송국도 한 바퀴 돌고 또 지방도 가고 해서 하루가 길죠.

    가령 제가 아홉시에 일어나면 열두시에 준비하면 하루가 너무 짧아서 아무것도 안 돼요. 노래 나올 때마다 준비를 많이 해요. ‘정말로’를 부를 때는 트위스트를 추고, ‘요즘남자 요즘여자’할 때는 힙합바지를 입고 댄스를 하고, 또 ‘친구에서 애인으로’를 할 때는 랩을 했었고, ‘춤추는 탬버린’을 할 때는 제가 탬버린을 들고 춤을 추기도 했었고, ‘오빠는 잘있단다’라는 노래를 할 때는 제가 럭셔리한 드레스를 입고 했었고요.

    항상 나올 때마다 컨셉에 따라 메이크업이 바뀌거나 헤어스타일이 바뀌거나 춤을 바꾼다거나 해야 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열 배 스무 배 더 많이 노력을 해야 되요. 뭔가 노래가 좋아야 자꾸 음악을 틀게 되지, 정말 안 좋은 노래를 “부탁합니다.”라고 한다면 한 번은 틀어줘도 그 뒤에는 안 틀어주거든요.

    제가 지금도 모든 분들이 공감하지 않고 제가 뒤룩뒤룩 살이 쪄서 그런다면 누가 저를 쓰겠어요. 항상 체중조절도 하고 운동도 하고 그렇게 노력을 하기 때문에 불러 주시고 그런 거죠. 제 뒤의 백댄서가 열아홉 살, 스무 살인데요. 제가 엊그제도 ‘캉캉’을 추었거든요. 다리를 번쩍 번쩍 들면서 캉캉을 추는데, 노력 안 하면 그게 되나요? 남들 놀 때 몰래몰래 가서 노력하고 같이 떡볶이도 먹고 어묵도 먹으면서 연습하고 그러죠.

    ▶ 가수는 히트곡 몇 곡만 있으면 편하게 사는 줄 알았는데, 그렇게 노력을 많이 하는 줄 몰랐네요.

    우리가 정말 비싼 옷을 사면 평생 입을 것 같은데, 1년, 2년 지나면 싫증이 나잖아요. 그것처럼 노래도 똑같은 노래만 계속하면 “아우, 쟤 좀 그만 들어갔으면...”라고 한다면, 제가 얼마나 비참해요. 슬프잖아요. 그러기 전에 제가 정신 차려서 열심히 해야죠.

    그렇게 모습이 망가질 때는 제가 예쁜 모습으로 봉사를 한다든가 하는 모습으로 나와야지 생활에 급급해서 나오는 것은 저한테 제 자존심도 허락하지 않고, 지금 일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일해야죠. 지금은 청바지 입으면 어떻고, 운동화 신으면 어떻겠어요. 이다음에는 여유가 있어서 많이 나누고 베풀고 후배들 밥도 사주고 그렇게 해야죠.

    ▶ 현숙 씨는 부모님에게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잘 하신다고 소문이 났는데요. 장학금을 준다든지 하는 일도 참 많이 하시죠.

    저는 우리 엄마, 아빠가 참 감사한 것이요. 많은 재산을 물려주신 것보다는 정말 좋은 성격을 주셨어요. 또 건강한 체력을 주셔서 엄마, 아빠한테 감사하고요. 단 한 사람이라도 섭섭하게 하지 않았나 항상 뒤돌아서면 생각을 해요. 남들이 한 군데 일할 때 저는 세 군데씩 일을 참 많이 해요.

    왜냐하면 그렇게 일을 많이 해야할 만큼 제가 생활이 무척 컸었거든요. 그래서 남들은 다 “그 돈 벌어서 다 어디다 써? 그만해.”라고 하시는데, 사실 나가는 데가 너무 많았거든요. 그 때는 누구한테 단 돈 10원도 달라고 할 사람도 없고, 또 어떤 때는 넉넉할 때도 있지만, 때로는 단 돈 만원이 없을 때도 있잖아요.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 없더라고요.

    내가 정신차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이 주어질 때 부지런히 다니고, 그러면서 막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라고 반갑게 인사를 하면, 어떤 분들은 ‘쟤는 항상 덜렁대고, 진실치가 않은 아이야.’라고 오해도 많이 하셨는데요. 이제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똑같으니까 그건 속일 수 없는 제 성격인가보다 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 아버님도 치매로 오랫동안 고생하셨죠?

    사실 엄마는 누워만 계셔서 마음만 많이 아팠지 그렇게 신경쓸 일이 많았던 것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아빠 같은 경우는 치매 때문에 밤새도록 안 주무시고 앉아계시고, 불장난도 하시고, 나가시면 집도 잃어버리시고, 금방 밥 드셨는데 안 드셨다고 하고, 제 머리채도 잡아당기시고 하셨는데, 그래도 저희 아빠가 참 예쁘셨어요.

    아버지가 꽃을 좋아하시고, 치매에 걸리셨어도 제가 고향에 가면 우리 딸 온다고 들국화를 꺾어서 제가 가는 길목에 꽂아두시고, 제가 돈 만원이라도 용돈을 드리면 처음에는 그렇게 가수가 되는 것을 만류하셨는데 이제는 자랑삼아 부산에 갈 일도 없는데 기차타고 가서 옆에 할아버지, 할머니한테 “우리 딸이 가수요.”하고 소주잔 한 잔 받으시는 그 재미로 다니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다리에 힘이 없으셔서 누우시더니 그렇게 가시는 날까지 고생을 하시다가 가셨어요.

    ▶ 그러자 또 어머니가 그러셨으니 많이 힘드셨겠어요.

    네. 아버지가 가시고 6개월 지나서 엄마가 또 그러셨는데요. 거동은 잘 못하셔도 두 분이 손잡고 계시는 것을 보면 참 그렇게 좋고 집안이 훈훈했는데, 혼자 계시니까 상심이 크셨는데 6개월 지나고 나니까 말문을 닫으시더라고요. 그래서 가실 때까지 말씀 한 마디를 못하셨어요.

    ▶ 어머니 팔순 때도 2천명이 넘는 분들이 오시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많은 분들이 함께 위로해 주셨는데, 그만큼 현숙 씨가 따뜻한 마음으로 세상을 노래하면서 잘 살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저희 엄마가 정말 아주 예쁜 엄마예요. 얼마나 예쁘신지 몰라요. 정말 당신 위해서는 아무 것도 쓰신 것이 없고, 오직 내 가족과 자식, 이웃들만 생각하신 분이예요. 김치 한 포기만 담가도 온 동네에 나누시느라고 저도 그 심부름을 많이 했어요. 서로 나누고 하는 것을 저도 어릴 때부터 많이 배웠거든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지방에 공연을 가면 군수님들, 시장님들이 맛있는 것을 많이 보내주세요. 그러면 제가 그 많은 걸 혼자 다 어떻게 먹어요. 윗집에 아랫집에 먼저 갖다 드리면, 또 빈 그릇으로 안 보내시고 저 혼자 있다고 윗집, 아랫집에서 또 보내주세요. 우리 이웃집 아주머니들이 너무 잘해주세요.

    ▶ 현숙 씨의 목소리로 듣습니다. 직접 소개해 주세요.

    저희 엄마 노래예요. 산수연(팔순) 때 설운도씨가 작사 작곡을 해서 저희 엄마에 대한 가사인데요. ‘나의 어머님’ 보내드리겠습니다.

    ◇ 내 부모님 같은 어르신들을 위한 이동 목욕차량 봉사도 해

    ▶ 설운도 씨, 태진아 씨, 현철 씨 다 “오빠, 오빠”하면서 친한 사이시죠?

    네. 아주 제 보호자예요. 제가 혼자이기 때문에 늘 안쓰러워하고, 저한테 힘도 주고 항상 저를 따뜻하게 해주세요. 가요계가 정말 훈훈해요. 정이 많고 마음이 예쁘지가 않으면 노래가 안 돼요. 마음이 예뻐야 좋은 노래가 나오죠.

    ▶ 여자 동료들과는 어때요? 라이벌 의식 같은 것도 있고 그럴 것 같은데요.

    저는 항상 더불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라이벌이 있으면 선의의 경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정말 좋은 것 같아요. 혼자만 맨날 발전할 수는 없어요. 옛날에 유지인 씨, 장미희 씨, 정윤희 씨 하듯이 가수는 현숙, 방미, 장은숙을 ‘트로이카’라고 했던 적도 있어서 서로 발전적이었던 것 같고요.

    지금도 저는 동료들이 항상 같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만약에 설운도, 현철, 송대관, 태진아 4인방이나 남진 선배 등이 없었다면, 트로트가 정말 사라지는 거예요. 장윤정도 나이가 어리지만 우리 트로트를 해서 얼마나 예뻐요. 우리 트로트의 맥을 잇게 하잖아요. 박상철도 그렇고요. 그래서 저는 후배들을 너무나 예뻐해요.

    ▶ ‘전국에 이동목욕차량을 한 대 씩 보내 드리는 것이 희망이다.’ 라고 하셨어요. 그런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은데, 주변의 어려움을 보면 가만히 못 있으신가 봐요.

    덕분에 제가 열심히 일하게 되고 부지런해져서 더 좋고요. 저는 항상 볼 수 있고, 걸을 수 있고, 먹을 수 있고, 열 손가락을 다 쓸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해요. 그런데 집안에 어려운 어르신이 계시거나 환자가 있으면 1년에 목욕 한 번 제대로 시켜드리기가 너무너무 어렵대요. 그런데 그렇게 좋은 차가 있더라고요.

    사실 저희들은 건강하니까 모르지만 목욕할 때 귀로 물이 들어가는지, 코로 물이 들어가는지 말씀을 못하니까 답답하실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하게 되었는데 참 좋은 것 같더라고요. 처음에는 그 어르신들이 목욕을 안 하시려고 막 문지방을 잡고 제 머리채를 잡고 고집을 피우시다가도 목욕을 시켜드리면 한 살짜리 아이처럼 방실방실 웃고, 잠을 그렇게 편안하게 주무세요. 저희 엄마도 그러셨지만, 지방에 가끔 목욕봉사를 가서 보면 그렇더라고요.

    그 곳에서 자원봉사 하시는 분들을 보면 정말 하늘이 내리신 분들 같아요. 그 바쁜데도 저랑 같이 가면 처음부터 목욕하겠다고 하시는 어르신들이 없어요. 안 하려고 문 잡고 옷 잡고 늘어지시고 하시는데 막상 목욕을 하고 나시면 그렇게 좋아하세요.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 현숙 씨가 서울에 올라와서 이렇게 가수가 되어 있는 것 자체가 국민 여러분들에게 너무 고마워서 뭔가 갚고 싶다는 마음이 크신 거죠.

    우리 동료들이나 선후배들 중에 많은 히트곡을 낸 분들도 계시지만, 음반을 내서 잘 안 된 분들도 많은데요. 저는 1년에 한 곡씩 매년 나오는 곡마다 많은 분들이 불러주시고 사랑해 주셨잖아요. 그러니까 끝까지 욕심을 부리면 안 되죠. 이제는 여러분께 받은 것을 다시 제가 여러분께 돌려드리고 거기서 같이 나누면서 저 또한 예쁜 가수로 남아야죠.

    지방에 가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막걸리 한 잔 드시고 막 좋아서 저한테 뽀뽀를 하셔서 제 화장이 다 지워지고, 손을 막 잡아 당기셔서 손에 흉터가 날 때도 있는데 저는 짜증을 내 본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저를 좋다고 꼬집고 잡아당기시는 건데 그런 분이 계시지 않다면 제가 있지 않잖아요. 아무도 찾지 않으면 가수라도 소용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런 것조차도 항상 감사하게 생각해요.

    ▶ 항상 변신을 해야하는 직업이다 보니, 앞으로 어떤 노래를 어떻게 불러서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까 하는 문제는 늘 고민이죠.

    항상 어디 여행을 가서도 뭔가 아이템을 배우고 오지 그냥은 안와요. 어디 가서 쇼를 보게 되면, ‘아, 이런 변화를 주어야겠다.’라는 생각도 하고요. 그래서 몸이 편하면 안 돼요. 몸이 항상 고달파야만 뭔가 나와요. 그리고 또 그렇게 고달퍼야지만 밥이 맛있고, 잠이 잘 와요. 그래서 나쁜 것도 있지만 좋은 것이 훨씬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바삐 움직여요.

    ◇ 항상 밝은 노래로 많은 분들에게 희망을 드리고 싶어요

    ▶ 항상 어딜 가나 먹을 것도 싸가지고 오셔서 나눠 주시고, 오늘도 쿠키를 가져오셨는데, 짠순이 노릇을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도 저축상을 타고 하시는 것을 보면 상당히 알뜰하신가봐요.

    그것은 많이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요. 저희는 월급쟁이가 아니잖아요. 정기적으로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많이 벌 때도 있고 못 벌 때도 있으니까 항상 계획적인 생활을 해야되요. 제가 항상 인기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많이 벌어서 많이 저축하는 것이 아니고, 저는 어릴 때부터 항상 규칙적으로 은행에 가는 것을 생활화 했었어요. 10원이라도 누가 주면 은행으로 갔어요. 그래서 많은 것은 아니더라도 계획적으로 저축을 해서 주신 것 같아요.

    ▶ 요즘 펀드도 유행이고 한데, 그런 재테크는 어떻게 하고 계시나요?

    저는 그냥 남들 하는 것은 다 해요. 남들 하는 것은 다 하고 많이 알려고 하고요. 그래서 신문도 골고루 보고, 뉴스 보고, 목욕탕 가서 이웃 아줌마들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남들 하는 것은 뭐든지 다 해요.

    ▶ 그렇게 다 잘하시면서, 하나만 바보같이 못 하고 있단 말이예요. 조영구 씨 결혼 중매도 했다면서 말이죠.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것이 결혼해서 아들, 딸 낳고 잘 사는 분들인 것 같아요. 제 생각에는 결혼까지 가기가 참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인연이 닿아야죠. 조영구 씨가 맨날 저한테 “누나, 내가 데려갈게. 누나, 나하고 결혼하자.”라고 했었어요. 그런데, 솔직히 제가 갈 수는 없고, “예쁜 동생 아이가 하나 있는데, 한 번 만나볼래?” 라고 했더니, “바꿔줘, 바꿔줘.” 하더니 전화 통화하고 약속하고, 그러더니 결혼날짜 잡고 그랬어요. 그래서 1월 22일 7시에 결혼식해요. 조영구 씨가 너무너무 성실해요.

    ▶ 조영구 씨도 얼른 장가가고, 또 좋은 일 많이 하는 가수 김장훈 씨도 올해는 장가갔으면 좋겠어요. 김장훈 씨도 올해 장가 좀 보내봐요. 저는 김장훈 씨가 30억이나 기부한 이야기를 듣고 참 놀랬어요.

    그럼요. 정말 그건 타고나야 되요. 자기는 셋방에 살면서 말이죠. 자기도 좋은 옷 입고 쇼핑도 하고 싶고 그럴 텐데, 남들 위해 배려한다는 것은 정말 타고나야지, 3억, 4억도 아니고 30억이 어느 애 이름인가요. 우리 후배지만 멋지고 똑똑한 것 같아요. 사람은 가지고 가지 않거든요. 저희 엄마도 보세요. 하나도 안 가지고 가요. 자기 쓸 것 정도는 남겨두고, 나누는 것이 참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그 기쁨이 얼마나 큰데요.

    ▶ 어떻게 보면 현숙 씨가 지방의 조그만 동네에서 좀 적절하게 가난하고 여러 형제들과 부대끼며 살았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부잣집의 외동딸로 살았다면 또 다른 모습이었을 것 같아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오빠, 언니 사랑도 받고, 형부, 올케 사랑도 받고, 때로는 열 한번째니까 새 옷 한 번도 못 입잖아요. 교복도 늘 언니 것을 물려받아서 너무 커서 두 번 세 번 접어 입고, 또 검정색이 바래서 뿌연 색깔의 교복을 입고 했는데, 한 번도 불만을 갖지 않았어요. 그래서 형제 많이 있는 집안의 사람들이 성격이 참 둥실둥실하고 좋은 것 같아요. 큰 그릇에 밥을 비벼서 숟가락 열두 개를 넣고 먹는 모습을 생각해 보셨어요? 얼마나 꿀맛인지 몰라요.

    ▶ 확실히 그렇게 살았던 것이 추억도 더 많고, 나를 훨씬 더 사람답게 한 것 같은 느낌도 많이 드시죠.

    제. 그래서 오늘 제가 있었죠. 아니면 벌써 제가 좌절하고 그만 두었을 것 같아요. 가수 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예요. 이렇게 잘 되면 좋지만, 어렵게 된 주변의 동료나 후배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 현숙 씨는 자신의 노래가 이 세상을 사는 분들에게 어떤 영향을 준 것 같으세요?

    IMF 때도 그렇고, 지금도 어려운 분들이 많이 계신데요. 제 노래가 3분 정도지만, 그 순간 노래 들으시면서 막 박수치고 웃으시고 할 때 제가 ‘노래하기 잘했구나. 정말 잘했다.’ 하는 생각을 해요. 노래 듣고 그 순간만이라도 행복을 느끼는 그 모습을 보고, 앞으로도 더욱더 활기차고 희망찬 노래, 밝은 노래를 많이 부르려고요.

    ▶ 현숙 씨는 ‘국민가수’ 그러면 어때요?

    저는 늘 부족한 것이 많아서, 쑥스러워지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듣기 싫지는 않죠. 이왕 가수 했으면 ‘국민 가수’가 되어야죠. 그래서 같이 함께 하는 것이 좋죠.

    ▶ 저는 나이 드니까 ‘국민 성우’라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웃음)

    당연하죠. 저 초등학교 때 ‘별당아씨’라는 라디오 드라마가 있었거든요. 그러면 여름에 멍석 깔아놓고 모깃불 피워놓잖아요. 그러면 그 동네에 한두 대밖에 없는 라디오를 통해서 ‘별당아씨’를 얼마나 재미있게 들었는지 몰라요.

    ▶ 마지막으로 현숙 씨의 ‘사랑에 한 표 던진다.’라는 곡 들으면서 이 시간 마칠께요.

    좋아한다는 이야기에 공감한다, 그래서 점수를 준다는 뜻이예요. 앞으로도 더 좋은 노래 많이 부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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