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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오후에 서울 대학로에 가 보신 적 있으세요? 그 곳에 가면, 수 십 명 아니 수 백 명에게 둘러싸여 있는 이 사람을 늘 만날 수 있습니다. 올해로 거리 공연을 19년째 하고 있는 윤효상 씨.
마이크와 엠프로 군중을 모으는 다른 화려한 거리 공연과는 달리그는 오직 기타와 목소리만 가지고,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데요. 때론 관객에게 호통을 치거나 면박을 주기도 하고, 또 흥에 겨워 노래 가사와 음정을 마음대로 고쳐 부르지만, 그래도 그의 공연을 보는 관객들은 박장대소를 하며 행복해 한답니다.
‘공연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대학로 명물’ ‘야생 개그맨’ 윤효상 씨! 잘 나가는 레크리에이션 강사인 윤효상 씨가 19년 째 아무런 보수 없이 거리에서 공연을 하는 사연...12월 8일 CBS 배한성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FM 98.1Mhz, 연출 김우호 PD)에서 만나봤습니다.
◇ 19년째 대학로 거리에서 라이브 공연 중[BestNocut_R]▶ 생각한 것보다 많이 어려 보이세요. 올해 몇 살이신가요?
올해 마흔 한 살입니다.
▶ 어떻게 해서 이렇게 공연을 시작하게 된 건가요?
제가 1989년에 군대를 막 제대하고 나서 물건을 배달해 주러 대학로에 갔었는데, 제 친구가 대학로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하는데 사람들이 주위에 둘러싸여 있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고 굉장히 흥분했어요. 그래서 저도 거기서 장난도 치고 했는데, 사람들이 저한테 호감을 많이 갖는 거예요. 그래서 ‘직장이고 뭐고 때려 치워야겠다. 나도 이 길로 나가야겠다,’ 싶어서 하게 되었습니다.
▶ 그 때 무슨 배달을 했던 거예요?
세운상가에서 조그만 부품박스를 파는 곳이었는데요. 그 부품을 배달해주고 한 달에 15만원씩 받는 일을 했었죠. 박봉이었죠.
▶ 그 친구는 뭐하던 친구였는데, 거기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나요?
그 친구는 서울예전 실용음악과를 나와서 정통으로 음악을 배운 친구였고, 저는 그냥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이었죠.
▶ 그 친구는 몇 년째 하고 있었던 건가요?
그 친구는 불과 한 1년 정도 했었는데요. 그 때 시청 앞에 ‘코러스’라고 커피마시면서 합창하는 곳이 있었어요. 거기를 자주 가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덩달아서 같이 갔었죠. 거기서 같이 합창하다가 중간에 20여분 정도 노래 부르고 싶은 사람 있으면 나가서 부르는 시간이 있었는데, 저도 그 시간에 나가서 같이 부르고, 그 때 반응이 좋아서 시작하게 되었죠. 친구따라 무직자 되었죠.(웃음)
▶ 그럼 함께 공연하는 파트너가 그 친구입니까?
아닙니다. 지금 같이 하는 친구는 MBC 공채 개그맨인 ‘김철민’이라는 친구예요. 그 친구도 무명시절부터 오래했죠.
▶ 어떻게 보면 대학로가 명물들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 같은데요. 윤효상씨도 명물이 된거죠?
보기 보다는 꽤 많이 알려졌더라고요. 제가 작년에 한 번 외국을 갔었는데, 에펠탑에서 기타를 메고 왔다갔다 했거든요. 그런데 어떤 동양인 부부가 저를 보더니 영어로 “한국말 할 줄 아세요?”라고 물어보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No” 라고 했더니 그냥 가더라고요. 근데 다시 와서 “아저씨, 대학로에 그 아저씨 맞죠?” 하면서 굉장히 반가워 하더라고요.
▶ ‘열린 음악회’를 통해서도 대중들과 많이 만나셨죠?
네. 그래서 이제 함부로 행동도 못하고, 전처럼 거리에서도 못자고 조심스러워졌죠.
▶ 거리에서 잤다고요? 왜죠?
그냥 거리에서 자는 것이 편해서 결혼하기 전에는 거리에서 잤어요.
▶ 그럼 원래부터 자유인적인 기질이 있었던 건가요?
그런 것이 있었고, 지금도 그런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힘은 좀 들지만 별로 힘들 줄을 몰라요. 30-40분 일하기 위해서 몇 시간씩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이 사실은 쉬운 일이 아닌데, 그런데도 힘든 줄 모르고 즐겁게 다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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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적으로 거침없이 말하다보면 가끔 오해 받기도 해▶ 19년씩 했으면 그 일에 어느 정도 중독이 됐다는 것 아닐까요?
권태기가 온 적도 있었지만 굉장히 짧게 끝났습니다.
▶ 권태기에는 어땠었나요?
‘내가 꼭 이 일을 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가? 관두자.’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기껏해야 몇 주 안 돼서 다시 생각하니까 또 이것 밖에는 없더라고요.
▶ 마이크 없이 육성으로만 라이브를 고집하시는데, 힘들지 않나요?
힘들죠. 그런데 제 생각으로는 많은 문화가 있어야지만 시민들이 보더라도 이것도 보고 또 싫증나면 저것도 볼 수 있어야 이런 거리문화가 형성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사람은 그 거리공연을 하더라도 앰프를 사용해서 오직 자기 문화만이 거리문화다 라고 생각해서 재밌는 것도 아닌데 시끄럽게만 해서 사람들을 모으려고 하는 것이 있어요.
그 조그만 공원에서 앰프를 사용하면 공원 자체가 시끄럽거든요. 그럼 사람들이 그 쪽으로 다 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래도 끝까지 육성으로 했습니다. 육성으로 했기 때문에 명물로 자리 잡게 된건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굉장히 근접하게 되고, 또 모여 있으니까 다른 분들이 뭔가 해서 또 모여들게 되고요. 일종의 군중심리죠.
▶ 도대체 어떤 공연을 하기에 ‘명물’이라는 얘기까지 들을 정도로 재미있다는 소문이 난건가요?
제가 명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저는 그냥 기타 치면서 노래해요. 처음에 시작할 때는 “여러분! 저 노래하고 싶은데 사람이 없습니다. 한 다섯 명만 있어도 노래하고 싶은데 다섯 명이 없습니다. 다섯 명 모이면 노래하겠습니다.” 하면서 노래를 시작해요. 노래를 재미난 말과 함께 섞어서 부르고, 다 끝나면 “박수 치신 분들, 100세까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박수 안 치신 분들은 알아서 사세요.” 라고 끝을 맺는 거죠.
▶ 노래하는 중간중간 음정, 박자, 가사가 맞는 건지, 수상한 구석이 좀 보이는데요?
안 맞죠. 저는 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노래하는 중간에 멘트를 주면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이 더 중요하거든요. 저는 노래하면서도 사람들의 모습을 관찰해요. 그래서 어떤 분이 제 노래를 따라하면 “따라하지 마세요. 따라하려면 나와서 하세요.”라고 얘기해요. “위에서 노래하는 나는 창피하니까, 똑같이 나와서 창피함을 같이 당해라. 고통분담을 같이 해야 된다.” 라고 얘기하죠.
▶ 요즘은 많이들 나올걸요?
안 나와요. 제가 인상을 너무 박박 쓰면서 하니까요. 또 노래하는데 박수 안 치는 사람, 저는 가라고 해요. 특히 노래하는 데 스킨쉽을 하고 진하게 붙어있는 사람들한테는 “샴쌍둥이는 떨어져라.” 라고 말해요.
▶ 그래서 박명수의 ‘호통개그’의 원조가 윤효상 씨 아니냐 하는 말이 있어요.
제가 원조입니다. 그건 제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전에 더한 일도 많이 당했어요. 사람들에게 소리를 너무 많이 지르다보니까 오해도 많이 받고, 싸움도 많이 났었어요.
▶ 그래도 관객인데, 너무 하신 것 아닌가요?
사실 앞에서 노래를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또 육성으로 목이 터져라 하는데, 사람들이 모여 있다보면 하는 도중에 나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특히 맨 앞에 앉아 있던 연인이 딱 빠져 나가는 거예요. 나가려면 뒤에 있다가 나가지 왜 제일 앞 가운데 있다가 나가나 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 한 번 혼을 내주어야겠다 싶어서 “남자분, 오랜만이예요. 잘 지냈어요?” 그러면 손 흔들면서 나가요. 그러면 제가 “진짜 오랜만이네. 여자가 바뀌었네.”라고 하면, 그 남자분이 정색을 하고 저를 쳐다보는 거예요. “뭘 봐?” 그러다가 육두문자가 나올 때도 있고, 그래서 심할 때는 싸울 때도 있죠. 지금은 이제 그러려니 하고 머리숙여 나가거나 뒤에 있다가 나가거나 하죠.
▶ 처음에 그랬을 때 사람들이 “윤효상 씨는 원래 그래.”하며 이해하기 까지는 얼마나 걸렸어요?
어떤 분들이 저한테 가끔 “아저씨는 좀 입이 거치세요.”라고 하세요. 그런데 저는 거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남한테 고의적으로 육두문자를 쓴 적도 없고, 항상 남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말을 가끔 들을 때는 ‘아, 자숙해야 겠다.’라고 생각은 해요. 그런데 저는 자숙하면 분명히 재미가 없어요. 제가 말을 조심스럽게 하면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합니다.
▶ 그러고 보면 역시 라이브의 묘미는 역시 관객과의 호흡, 타이밍이 절묘해야 하는거로군요.
그런 것도 있고요. 갑자기 생각이 날 때가 있습니다. 한참 일본이 우리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할 때, 저도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 화가 났어요. 생각해보니까 이게 아니다 싶은 거예요. 그 때 저희 공연장 바로 옆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었어요.
그 때 제가 “여러분, 아직도 많은 일본인들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에 대해 화나시죠?”라고 하니까 “네” 그러시더라고요. “여러분, 독도가 일본말로 ‘다케시마’ 랍니다. 여러분, 그 사람들 잘못 지었습니다. ‘다케시마’ 거꾸로 하면 ‘마시케다(맛있겠다)’입니다. 통일 신라 시대 때 우리나라 땅이었던 대마도, 일본말로는 ‘쓰시마’, 곧 ‘마시쓰(맛있어)’입니다.” 라는 식으로 얘기를 풀어갔었죠.
▶ 시비 때문에 심각한 상황까지 간 적도 있었나요?
저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면 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저는 국회의사당 앞에서도 했었는데요. 사실 사복 경찰들한테 미친 놈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한 2-3년 정도 된 것 같은데요. 종로에 가면 ‘피아노 거리’라는 곳이 있어요. 그 바로 뒤가 청계천이거든요. 사람들이 꽤 많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공연장에 올라가서 노래를 했는데, 순식간에 사람들이 200명 쯤 제 주위를 에워싼 거예요.
신나게 하고 있는데, 갑자기 도중에 어떤 인상도 험악하고 덩치도 좋으신 분이 무대 위로 뛰어 올라오더니 저한테 막 욕을 해대면서 “나 여기 번영회 사람인데, 너 허락받고 하는거야? 뭐야?” 하면서 제 기타 케이스를 발로 뻥뻥 차더니 “빨리 꺼져.” 막 그러더라고요. 그 상황에서 제 자신이 흥분하면 안 되겠다 싶어서 “아저씨, 제가 내려갈께요. 금방 끝날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라고 했더니, “빨리 안 꺼져?” 라고 계속 저한테 소리를 쳐대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나이가 있는데 여기서 그냥 내려가면 여지껏 지켜온 자존심에 먹칠을 하는거다, 그런데 여기서 이 사람과 맞붙어봤자 좋을 것도 없고, 그냥 내려가야겠다’ 생각하는 찰나에 갑자기 어떤 젊은 청년이 후다닥 올라오더니 그 사람 멱살을 잡고 “뭐야?” 하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우루루 따라 올라왔어요. 그러더니 처음에 막말하던 그 사람이 “이거 뭐야? 다 따라와” 하더니 파출소로 막 가는 거예요.
제가 뒤에서 사람들한테 이러지 말라고 막 말렸는데도 사람들이 전부다 그 사람 사진을 막 찍어대더라고요. 제가 “이러지 마세요. 집단행동은 절대로 좋은 행동이 아닙니다.”라면서 말렸는데도 끝까지 다들 쫓아가시더라고요. 그래서 종로3가 탑골공원 옆에 파출소가 있거든요. 거기를 갔는데, 시민 한 50여분이 따라가신 거예요. 50:1이 된거죠.
먼저 멱살을 잡았던 젊은 청년이 들어갔고, 나머지 50여분은 바깥에 계셨고, 저는 들어가서 말렸죠. 그런데 경찰이 저에게 하는 얘기가 “다 당신이 데리고 온 사람들이야?”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제가 데려온 사람들이 아니고 그냥 길가는 시민들인데, 이 아저씨가 실수를 해서 잘못돼서 따라온 사람들이다.”라고 했더니, 빨리 보내라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 사람이 나한테 사과를 하면, 나도 사람들을 보내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그 사람이 저한테 사과를 하고는 가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이 사회가 이기주의이고 향락주의이고 퇴폐주의인 사회인데, 아직도 이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구나, 시민정신이 아직도 남아 있더라고요. 제가 그것을 보고 너무 가슴이 뿌듯해서, 그 때 제 주머니에 돈이 한 십여만 원 있었거든요. 또 바로 옆에 아는 형님이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세요. 그래서 그 형님 가게에 가서 소주 한 잔 마시려고 “제가 이런 좋은 기분에 소주 한 잔 사겠습니다. 갑시다.” 해서 열일곱 분 정도가 술을 마시러 갔어요.
가서 17만 원 정도가 나왔는데, 한 연세 드신 부부가 계셨거든요. 그 분이 제주도에서 올라오셨는데, 요즘 세상에 아직도 이런 젊은이들이 있는 것이 너무나 흥분된다고 하면서 술값을 다 내신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 날 잠을 못 잤어요.
◇ 저를 통해 사람들이 많이 웃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공연을 하면서 주변 분들의 지지도 받는 점에서 보람도 많겠는데요.
정말 저는 이 사회가 아름답다는 것을 이 피부로 느꼈습니다.
▶ 그럼 윤효상 씨의 공연이 사회를 아름답게 하는데 기여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까?
저는 보이지 않는 0.0000001%라도 기여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어떤 면에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요즘 웃을 일이 많이 없잖아요. 그런데 제가 하면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많이 웃으세요. 그런 걸 봐도 이 웃음이 많은 범죄를 예방할 수도 있고, 행복 바이러스가 생기는 거잖아요.
▶ 그러면 공연할 때 주로 어느 때 웃으시던가요?
엉뚱한 이야기를 할 때죠. 있었던 에피소드를 말씀드리자면요. 제가 버스를 타고 가는데 할머니가 앞으로 내리시니까, 젊은 기사가 할머니한테 “노인네가 뭐하는 거야? 빨리 내려. 빨리”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화가 나서 “아저씨, 할머니한테 ‘다치시니까 천천히 내리세요.’라고 말씀하셔야지, 이게 뭡니까?” 라고 했더니, 기사분이 저한테 “이 양반아, 앞문으로 내리지 말고, 뒷문으로 내리라고 얘기하는 것 아냐?” 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저씨, 버스에 앞문, 뒷문이 어딨어요? 다 ‘옆문’이지.”라고 했던 적이 있어요. 제가 그 얘기를 사람들한테 얘기해서 웃으신 적이 있어요. 정확히 말하면 ‘앞옆문’, ‘뒷옆문’이죠.
▶ 어떻게 보면 그렇게 사람들이 웃는다는 것은 대리욕구를 채워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그런 의미에서 ‘음유시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는데요.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저는 부끄럽습니다. 음유시인까지는 안 되지만, 저는 이 목소리로 오페라도 합니다. 한 번 들어 보시겠어요? 사람들이 제가 하는 것을 항상 서서 보기 때문에 저는 항상 기립 박수를 받습니다. 오페라 ‘마술피리’의 한 대목입니다.
▶ 유럽의 경우에는 거리문화가 다양하지 않습니까?
저도 가봤는데요. 생각보다 거리문화라고 하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저도 한 달 동안 저희 아이들 셋을 데리고 다녀봤는데요. 그렇게 특출난 것이 없더라고요. 단지 우리나라가 거리문화가 없을 뿐이예요. 우리나라의 거리문화가 발산될만한 장소가 없을 뿐입니다. 우리나라는 할 곳이 없잖아요. 물론 하려고 하면, 저 같은 경우는 인사동에서 잠깐 하려고 하면 주위의 장사하는 분들이 장사에 방해된다고 못하게 하는 거예요.
▶ 그런 것도 ‘님비현상’ 적인 것이 있어요?
그렇죠. ‘바스크문화(거리문화)’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거든요. 이 거리문화가 외국인들이 보기에는 쉽게 한국인을 접할 수 있는 것인데, 인사동 가서 물건을 사시더라도 'Made in China' 제품이 굉장히 많습니다. 하지만 거리에서는 순수한 'Made in korea'예요. 외국인들이 지나가다 보면 한국인의 밝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 거리에서 하는 것을 꼭 공연장에서 해야 합니까? 그 좁은 거리에서도 할 수 있는데, 그런 공간도 만들어주지 않고 인사동을 무슨 명물의 거리라고 만들어 놓은 것 자체가 정말 어폐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거리 공연을 하려면 집회 신고나 어떤 절차가 있어야 합니까?
내가 내 나라 내 땅에서 세금내고 내가 사는데, 무슨 집회 신고를 합니까? 집회신고는 두 명 이상 모여서 할 때 하는 것이지, 혼자서 하는데 무슨 집회 신고가 필요합니까? 저의 소견입니다만, 매스컴을 봐도 그렇고 국가 정책을 봐도 그렇고 사람들이 웃을 일이 없는 상황에서 저를 보고 사람들이 많이 웃습니다. 그런 사람 같은 경우는 정부에 돈을 달라고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할 수 있는 공간만 제약받지 않도록 해 주시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저는 조그만 공간만 있으면 되는데 말이죠.
◇ 수익금으로 매달 30여명의 소년소녀가장 돕기와 고아원에 쌀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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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익 같은 것은 어떻게 됩니까?
사람들이 모금을 하거든요. 처음에 소년소녀 가장돕기를 두 명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서른 명으로 늘어났어요. 그 아이들에게 매달 보내주고 있고, 또 돈이 남으면 그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고아원에 쌀도 사다주고 있습니다.
▶ 모금이라는 것이 절대 강제적인 것도 아니잖아요?
제가 강제로 하면 그건 깡패죠. 어떤 때 사람들이 돈 들고 있으면 뺏는 경우는 있죠. 사람들이 웃으면서 뺏겨요. 기타 케이스를 열고 모금할 때도 있고, 모금통을 들고 다닐 때도 있고요. “이 기회주의자, 어디 가?” 하고 소리 지를 때도 있고요. 그런 식으로 하니까 사람들이 항상 웃으면서 내요.
▶ 정확히 쓰이는 곳은 어딘가요?
소년소녀가장 돕기, 고아원에 쌀도 사다주고요. 예전에는 라면을 사다주었는데, 그 아이들한테는 라면을 사다주는 것이 가장 필요가 없는 거예요. 아이들에게는 곡기, 쌀을 먹여야 합니다.
▶ 좋은 일도 많이 하시는데요. 혹시 아내와 아이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이들 셋은 저를 아주 멋있는 아빠로 생각하고 있고요.
▶ 아이들이 몇 살 인가요?
막내가 다섯 살이고요. 둘째가 열 살이고, 큰 아이가 열 네 살입니다. 집사람한테는 제가 좀 서운한 남편이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집사람한테는 제가 정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 그러면 가장으로서 생활의 문제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제가 지금 하는 일이 있습니다. 제가 레크리에이션 강사를 하고 있어요. 또 KBS 열린 음악회에서 오프닝을 10년째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사는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데, 단지 지금 직장생활하는 분들도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저 또한 그렇지만, 이 정도의 정신상태로 살면 모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집사람한테 더 잘할 일만 남았죠. 아내한테는 너무 미안해요. 저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도 제가 부족한 점이 많이 있겠죠. 그런 부분을 부부로서 별로 대화를 못해서요.
▶ 어떻게 보면 윤효상 씨는 기부문화와 늘 가까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 기부문화를 보면 어떤가요?
저는 사람들이 기부라는 것을 왜 명절 때나 연말에만 하는지 모르겠어요. 항상 주기적으로 계속해야죠. 시도때도없이 해야돼요. 내 일처럼 생각해야 되는데 남의 일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명절 때나 남이 갈 때만 가는 거예요. 남이 안 갈 때 가야죠.
▶ 윤효상 씨의 공연이 재미있어서 방송사나 기획사에서 소위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적은 없나요?
스카우트도 받았죠. 얼마 전에 KBS ‘폭소클럽’에도 나갔었는데요. 몇 번 출연하고 짤렸습니다. 재미없어서요.
▶ 어떻게 했길래 짤렸어요?
하다가 대사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사람들은 막 웃는데 방송용으로는 안된다 해서 짤린 거죠.
▶ 거리에서의 즉흥적인 것에 익숙해서 그런 건가요?
그런거죠. 연기자들은 대사를 잊어버리면 “감독님,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하면 되는데, 저는 안 그랬어요. 저는 하다가 대사를 잊어버리면 “여러분, 저 대사를 잊어버렸는데, 보면서 해야되겠어요.” 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막 웃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게 뭐가 웃겨? 나는 창피해 죽겠는데...”하니까 막 웃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계속 밀고 나갔죠. 사람들은 너무나 많이 웃었는데 담당 PD로서는 “이건 웃기지만, 방송용으로는 안된다.” 하면서 편집을 해버리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건 내가 할 것이 아니다. 길거리로 나가자.’라고 한거죠.
▶ 어떻게 할 수 없는 ‘야성’ 본능이 있나보군요.
꼭 방송이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한 거죠.
▶ 어릴 때부터 끼가 많았나요?
제가 어릴 때 굉장히 어렵게 자랐어요. 집이 너무 어려웠었어요. 어머니가 많이 힘드셨는데요. 집에 먹을 것이 없어서 두 달 동안 아이들에게 라면만 먹이신 어머니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어요. 굉장히 못 먹고 어려웠는데, 그런 것이 있어서 웬만큼 어려운 것은 그냥 몸에 밴 것 같아요. 지금은 굉장히 잘 사는 거죠. 그 때 생각하면 지금 굉장히 부르조아이고, 잘 살죠. 단지 차가 없을 뿐인데, 차가 없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면허가 없습니다.
▶ 아버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저희 부모님이 제가 어렸을 때 이혼하셔서 아버지의 사랑을 못 받고 자랐는데요. 아버님이 인천 쪽에서는 꽤 알려진 분 같으세요. 당구도 잘 치시고, 대학교에서 잘 노시던 분이시고요. 당구를 600 치셨다고 하시더라고요. 인천당구 600이면 아주 알아주는 거라고 하더라고요.(웃음)
▶ 몇 살 때까지 그렇게 고생을 많이 했나요?
청소년기 때까지 계속 그렇게 힘들게 살았던 것 같아요. 술, 담배 같은 못된 것도 일찍 배우고요. 나중에는 커가니까 그런 것도 별로 재미가 없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음악을 알게 되고 기타를 알게 되고요. 제가 고등학교 때는 밴드부에서 드럼을 쳤거든요. 드럼을 치다가 기타를 알게 되었어요. 기타를 치면서 거리를 알게 되었는데, 그 때 사람들의 마음, 인간미를 알게 되었어요.
▶ 비닐하우스에서 사셨다면서요?
예. 정말 없는 사람들이 사는 비닐하우스에서 살았는데요. 한 번은 옆 동 비닐하우스에서 불이 나서 사람들이 죽고 했던 기억도 있어요.
▶ 윤효상 씨는 몇 형제세요?
저는 1남 2녀 중에 장남입니다.
▶ 보통 장남이 잘 돼야 그 집안이 잘 된다고 하는데요.
네. “쟤, 커서 뭐가 되려고 그래? 공장에나 다니지.” 라고 전부다 그랬어요. 저도 공장에 다녀봤거든요. 바지 만드는 공장에 시다로 들어갔었는데 보름 일하고 그만 두었죠.
▶ 주변 분들은 그랬지만, 어머님은 뭐라고 하시던가요?
어머니는 제 걱정 정말 많이 하셨어요.
▶ 어머님은 어떻게 되기를 바라셨나요?
어머니는 뭐가 되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제가 결혼이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무슨 방황을 해서 그런 겁니까? 아니면 장남으로서 속을 썩인 겁니까?
왜냐하면 변변한 직업도 없고 제가 고등학교도 제대로 못 나왔거든요. 그렇다고 사고치거나 한 것은 없었는데, 아마 그런 것 때문에 어른들이 보기에는 ‘얘가 과연 이런 상태로 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다 하시겠죠. 그런데 노는 것은 참 잘 놀았어요. 진짜 어디 가서 빠지지 않을 정도로 잘 놀았어요.
◇ 경제관념은 빵점... 아내에게 항상 미안해요.▶ 혼자 있기 좋아하고 수줍음도 많은데, 노는 것도 좋아한다는 것은 너무 다른 변화인데요?
어디서 누가 노래를 시키면 제가 나가서 노래 부르고 놀았어요. 군대 생활 할 때도 훈련소에서 제가 나가서 마이크를 잡으면 상은 다 받아 왔어요. 그 때부터 아마 제가 끼를 알기 시작한 것 같아요.
▶ 그 때 불렀던 노래가 어떤 노래였나요?
김흥국 씨의 ‘호랑나비’였어요. 그리고 김정렬 씨의 ‘숭구리 당당 숭당당’ 그런 것도 하고요. 그 때 사람들이 막 웃더라고요. 그래서 ‘아, 나도 사람들을 웃길 수 있구나. 끼가 있구나.’ 하고 생각한 거죠.
▶ 군 제대하고 나서 취업문제나 결혼문제에 대한 고민은 어땠나요?
그런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대학로 가서 기타 메고 놀았습니다. 거기서 아는 사람들이 밥 사주면 밥 먹고, 술 사주면 술 마시고, 그리고 집에 가서 자고 또 다음 날 아침에 나가서 놀고 그랬죠. 완전히 떠돌이였죠. 그렇게 2-3년 스물대여섯 살까지 그렇게 노니까 아는 형님이 거기서 호프집을 하는데, 자기네 가게에 와서 한 번 일해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일을 했었는데, 돈을 받고 일하는 것은 제가 재미가 없더라고요.
▶ 그럼 결혼은 어떻게 하신 건가요?
저는 돈을 받으면서 일하는 것은 잘 못하지만, 술 먹으면서 노는 것은 정말 잘하거든요. 그렇게 술 먹으러 가는 술집이 있었어요. 광화문에 가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네 군데가 있었는데요. 그 중에 ‘가을’이라는 카페가 있었어요. 피아노도 있고, 기타도 있어서 제 친구는 피아노를 치고, 한 친구는 색소폰을 불고, 저는 기타 치면서 노래 부르고 연주를 했어요. 그러면 사람들이 막 박수를 치고 술과 안주도 가져다줬어요. 그렇게 재미있게 놀다가 제 집사람을 만났죠.
▶ 그 때 아내분은 어떤 일을 하는 분이었나요?
집사람은 그 때 간호사였어요. 저희는 연애를 한 9개월 정도 했었어요. 그 때 제가 직업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처갓집에 인사를 하러 가게 된 거예요. 그 때 지금은 돌아가신 장인 어른이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신 분이었거든요. 처음 인사를 가는데 양복도 안 입고 가죽점퍼를 입고 가죽장갑을 끼고 귤 두 봉지 사들고 갔어요.
가서 “죄송하지만, 이 사람 저한테 주시면 제가 평생 고생 안 시키고 열심히 살겠습니다. 주십시오.”하고 절을 넙죽 드렸더니, 저의 장모님이 홱 돌아앉으시더라고요. 그런데 장인어른이 저를 보고 “그래. 잘 살아봐라. 열심히 살아봐라.”라고 하셔서, 처음에 전세 600만 원짜리 방에서부터 시작했어요. 그 때가 1993년도였거든요.
▶ 600만원은 어떻게 마련한 건가요?
제 집사람이 1천만 원 모은 것에서 600만원 전세금을 낸 거죠. 날도둑놈이죠.
▶ 지금은 집장만 하셨나요?
네. 지금은 집장만 했습니다. 그것도 제가 산 것이 아니고, 제가 벌어다가 주면 집사람이 알뜰살뜰 모아서 집을 샀더라고요. 저는 전혀 몰랐는데, 집을 사놨길래 저는 지금 살고 있습니다.(웃음)
▶ 너무 돈 욕심이 없는 거 아닌가요?
저는 경제 관념에 대해서 잘 몰라요. 청약저축이 뭔지도 모르고, 펀드 같은 것은 이해도 못해요.
▶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을 많이 주기도 하지만, 정작 본인은 눈물도 많이 흘렸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어떠세요?
눈물도 많이 흘렸죠. 그런데 그 눈물이 아마 거름이 돼서 남들에게 웃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 거리공연의 의미는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하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대신에 대중성이 있어야 하고,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된다는 것, 즐거워야 한다는 것, 같이 어울릴 수 있는 매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필요한 것 같아요.
▶ 이젠 나이도 있는데, 좀 더 안정적으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저 지금 안정적으로 살고 있잖아요. 행복하게 살면 됐죠.(웃음)
▶ 어떻게 보면 윤효상 씨는 영원한 직업을 갖고 있네요. 기타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니예요?
직장인들은 앉아서 일하지만, 저는 서서 일하죠.
▶ 대학로가 윤효상 씨에게는 메카와도 같은 곳이겠어요.
제가 대학로를 나가면서도 레크리에이션 일을 열심히 하기 때문에 아마 저는 그래서 굉장히 행복한 것 같아요.
▶ 19년이면 박수쳐주는 관객분들도 연륜이 있으신 분들이 많겠어요.
한 15년 만에 이민갔다가 오신 분도 계세요. 저를 보고 너무 반가워하시더라고요. 또 연세 드신 할머니 한 분도 계셨는데, 그 할머니는 오실 때마다 항상 저한테 만 원짜리 한 장을 주세요. 그러면 제가 할머니를 모시고 바래다 드리면서 택시기사분한테 요금으로 만 원을 드리거든요. 지금은 안 오시는 것 보니까 아마 작고하셨는지 모르겠어요. 참 예쁘신 분이었는데, 할아버지는 병원에 계시다고 하셨고요.
▶ 어떻게 보면 ‘휴먼현장’ 같이 느껴지는데요.
그 조그만 공원이 정말 살아 있는 인간세상 이예요.
▶ 12월이기 때문에 더 많이 바쁠 것 같아요.
네. 12월 달은 많이 바쁜 달입니다.
▶ 계획은 어떤 것이 있나요?
건강하게 계속 지내고 싶고요. 가족들도 즐겁게 하나가 됐으면 좋겠고요. 그리고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더욱 더 즐겁게 보낼 수 있는 문화 공간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또 제 집사람에게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한다는 얘기 꼭 전해주고 싶어요.
“여보, 사랑해요. 미안해요. 고마워요.”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