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stNocut_R]부드럽고 친근하면서도 엄격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는 배우가 있습니다.
항상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열정과 패기, 무엇이든 고민하고 연습해서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내는 근성, 게다가 지적인 이미지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배우, 유인촌.
언제 어디서나 종횡무진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일까요? 그의 이름 앞에는 ‘배우’라는 직함 외에도 교수, 문화행정가, 마라톤 마니아 등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다닙니다. 최근에는 거기에 하나를 더 보태서, ‘걷기 전도사’라고 불리는데요.
누구나 빨리빨리 무조건 서두르는 시대에, 천천히 걸으며 명상에 잠기는 게 행복하다고 말하는 유인촌 씨를 초대해서 그의 연기인생과 인생철학 들어봅니다.
◇ 불편하게 사는 것이 젊어지는 비결
ㅠ
▶ 스쿠터 타고 다니시는 것이 소문이 났어요.
요즘 서울 시내가 너무 복잡하니까요. 꽤 오래 되었습니다. 물론 두 바퀴이니까 안전에는 신경을 많이 쓰고 조심하죠. 그런데 정말 연비도 적고, 차 막히는 일도 없고 아주 자유스러운 느낌을 많이 받을 수 있어서 정말 좋은 것 같아요.
▶ 1951년생이신데요, 몸매는 탄력적이고 얼굴은 동안이세요. 어떻게 관리하세요?
그렇진 않죠. 나이는 다 있는데요. 단지 좀 더 능동적으로 산다고 할까요? 좀 불편하게 삽니다. 그런 것들이 저를 자꾸 움직이게 하기 때문에요. 편해지면 힘은 덜 들지 몰라도 저는 그것이 늙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가능하면 불편하게 살자는 주의입니다.
▶ 불편하게 산다는 것은 어떤 건가요?
어지간한 거리는 걷자, 뛰자, 더 멀면 자전거 타자, 아니면 시간이 문제일 때는 스쿠터를 타자, 아니면 좀 덥더라도 냉방을 하지 말자, 좀 추워도 옷을 하나 더 입자는 식으로 일상에서 작게 할 수 있는 일들이거든요. 그런데 실제 실천가기가 쉽지 않죠. 이런 부분만 많은 사람들이 실천을 하면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많이 주지 않을까 싶어요.
◇ 도시에서 걷는 것이 더 불편하고 장애가 많아▶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연극배우, 교수, 문화행정가, 마라톤 마니아, 걷기 전도사, 환경전문가, 교통 전문가 등 많은 수식어가 따라 붙는데요. 어느 표현이 가장 맘에 드세요?
그런데 다 통틀어서 저는 배우지요. 아무래도 제가 평생 해온 일이니까요. 그리고 어렸을 때 꿈을 많이 갖잖아요. 아주 어렸을 때는 과학자, 대통령, 의사 등 수없이 많은 꿈을 가졌는데 배우생활 하면서 그 꿈을 다 이뤘어요. 역할에서 다 해봤습니다. 그래서 제가 볼 때는 이것 이상 좋은 직업은 없다 라고 생각합니다.
▶ 혹시 배역에서 대통령까지 해봤기 때문에 실제로 대한민국 대통령까지 한 번 해봐 하는 생각은 없으신가요?
글쎄요. 실제까지 생각하면 너무 힘들겠죠. 그런데 저는 조선시대 왕도 해봤고 다 해봤으니까요. 드라마와 실제는 또 다른 것이니까요. 드라마에서 했던 일을 실제까지 연결시키면 약간 정신이 이상해집니다.(웃음)
▶ 지난 7월에 ‘우리 땅 걷기’라는 국토종단을 전남 해남에서 서울 청계광장까지 하셨어요.
그 때 생각하면 정말 꿈만 같습니다. 제가 작년에 일본에 좀 있다 왔는데요. 일본의 문화, 생활을 자세히 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서 처음에 한 두 달은 차나 지하철의 이동수단을 이용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너무 많이 스쳐 지나가는 것이 많아서 걸으면서 자세히 봐야겠다 해서 도쿄에서 8개월 가량을 거의 타는 것에 대한 수단을 이용하지 않았습니다. 8개월을 매일 평균 4-5시간을 걸어 다녔어요. 어지간한 동네 골목도 제가 다 뒤지고 다닌 셈이죠.
그러면서 많은 것을 보게 되었고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죠. 그러다 보니까 ‘내가 우리나라도 이렇게 제대로 걸어보지 않았는데, 정작 남의 나라에 와서 뭘 보겠다고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 걸어다니나?’ 하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반성을 굉장히 많이 했습니다. 이번에 돌아가면 우리나라를 이렇게 열심히 아주 정성을 다해 내 발로 밟아보고, 사람도 만나보고, 소리도 들어보고 하는 여러 가지를 직접 해봐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하게 된 거죠.
▶ 거리가 650km 정도 되었다고 하던데요. 걸으면서 만난 우리 땅 풍경, 사람들 등 기억에 남는 일들이 많았겠어요.
저는 지금도 거의 전 과정이 기억에 남거든요. 그만큼 역시 몸으로 모든 것을 직접 부딪혀보니까 금방 잊어버리지 않더라고요. 또, 그런 길바닥에 나와 보니 저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폭염주의보가 내려져서 섭씨 38도인데 아스팔트는 44도였어요. 그렇게 더운 상황에서 그 햇볕을 그대로 몸으로 다 받고, 후반부에 한 열흘 정도는 폭우 속에서 열흘을 걸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쏟아지는 비를 온 몸으로 받으며 걸었으니까요. 그렇다고 비온다고 쉬고 안 걸을 수도 없었고요. 왜냐면 약속된 그 날 그날의 거리가 있고, 그 장소를 가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지역에 사는 분들과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 다음 지역까지 같이 걸어가고 또 헤어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나라가 대단히 큰 나라다,’ 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차타고, 비행기 타고, KTX 탈 때는 너무 금방이라 우리나라는 너무 작다 라고 생각했는데, 걸어보니까 한도 끝도 없어요. 너무 큰 나라다 라는 생각을 많이했고요. 또 우리 요새 많이 각박하다는 말을 하는데, 실제 길에서 만난 많은 분들은 정말 인정많고, 한 가지라도 나누고 싶어하고 해서 그런 것들을 정말 오랜만에 느꼈어요. 또 각 지역에 있는 공무원 분들이라든지, 또 요새는 군의 ‘해설사’ 라는 직업을 가지고 계신 자원봉사자 분들이 계세요. 그런 분들이 또 열심히 자기 고장에 대한 책임감을 저희한테 안내해주고 설명해주고 싶어서 노력하는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가 아직도 너무 너무 좋은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많이 느꼈고요.
우선 자연이나 우리 산, 강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실제 차타고 지날 때는 잘 못 느꼈어요. 그런데 걸어가니까 평상시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었고, 논에서 일하고 있는 생면부지의 할머니, 할아버지들, 피서 온 가족들을 만나도 진짜 처음 보는 사람 같지 않고, 오래 만난 사람처럼 걸어가는 여정에 대한 얘기를 나눌 수 있어서 아주 좋았고요. 하여튼 이번 발걸음이 저의 인생에 있어서 큰 스승, 새롭게 태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 같아요.
▶ 그러나 ‘이런 점은 좀 아쉽더라.’ 하는 부분도 있었을텐데요.
있죠. 역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대도시입니다. 저희가 산과 들판과 계곡을 따라서 걸어올 때는 자연과 충분히 같이 숨을 쉬고 느끼면서, 또 자연 속에 저 멀리 들판에 서계시는 할아버지 한 분도 굉장히 크게 보이더라고요. 사람은 정말 작은데 자연 속에서 사람의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 저에게 크게 느껴지는지... ‘인간은 위대하다’라는 얘기도 하면서 왔는데요.
정작 대도시에 들어오면서 저희들을 힘들게 했던 부분은 표정이 없다는 거예요. 도시도 표정이 없고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도 표정이 없더라는 거죠. 도시 안에 살고 있을 때는 잘 못 느꼈어요. 밖에서 들어와 보니까 전 너무나 깜짝 놀랐습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거침없이 걸어서 왔는데 사람이 많은 도시에 들어오면서부터 걸을 수가 없어요. 그 전에는 국도를 따라 걸어서 인도라고 할 것이 따로 없잖아요. 그래서 산업도로 같은 길은 굉장히 위험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도시로 들어오면 인도가 있으니까 더 편하게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인도에 놓여져 있는 상점의 물건들, 공사장의 적치물들, 자동차 불법 주차 등 모든 것들이 우리가 걸어가는 인도를 제대로 걸어갈 수 없게 만들어져 있더라는 거죠.
걷는 것이 이렇게 불편하다는 것을 도시에 와서 처음 느꼈어요. 이런 것들은 조금만 걸어보면 다 고칠 수 있는 것들이거든요. 저는 지자체 단체장님들께서 차타고 지나가지 마시고 꼭 걸어보시면 내가 책임지고 있는 이 동네, 지역이 뭐가 문제인지 열 가지면 열 가지 다 한 번에 다 보이실 겁니다.
▶ 서강대 영문학과 장영희 교수님이 다리가 불편하시잖아요. 그래서 목발을 짚고 다니시는데, 언제 글을 쓰신 것을 보니까 ‘목발을 짚고 다니면 천천히 걷기 때문에 모든 것을 보게 된다. 그런 보고 느끼는 많은 것들을 다른 사람들은 도시에 살면서 놓치는 것 아닌가’ 라고 하셨더라고요.
역시 생각을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그렇게 세상이 달라 보이는 거죠. 장영희 교수님하고는 제가 에피소드가 있어요. 언젠가 한 번 강남의 저의 공연장인 ‘유시어터’에 오셨어요. 아마 이 분이 몸이 불편하시니까 오시기 전에 몇 번 확인을 하셨나봐요. 우리 같이 불편한 사람이 구경하는데 지장이 없느냐, 지하냐, 계단이 많으냐,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느냐 여러 가지를 확인하시고 오셨는데 아마 그런 것들이 여의치 않았던 것 같아요. 우리 극장에 있는 식구들은 “괜찮습니다. 저희들이 다 도와드립니다.” 했는데요.
그 때 제가 공연에 출연을 할 때였습니다. 공연 끝나고 옷도 갈아입고 분장실로 해서 밖을 나왔는데, 이상해서 뒤를 보니까 장 교수께서 계단을 그 때까지 올라오고 계신 거예요. 지하 2층이기 때문에 그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오고 계시더라고요. 옆에 학생들도 있는데 도움을 받지 않고 본인의 힘으로 올라오고 계신 거예요. 제가 분장도 지우고 옷 갈아입고 시간이 꽤 흐른 다음인데도 올라오기가 힘드니까 그 때까지도 계단에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뛰어 내려가서 바로 업히시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안 업히시겠다는 거예요. 몇 번 고집을 피우시는 것을 제가 끝까지 안된다고, 내가 이 극장의 주인이니까 이렇게 힘들고 불편하게 가시면 안된다고 해서 제가 업었습니다. 그래서 업고 위에 까지 올라왔더니, 학생들, 서강대 선생님들까지 다 기다리고 있다가 막 박수를 치고, 장영희 교수님한테 일부러 업혀서 왔냐고 농담도 하시고 했었거든요. 그래서 아마 뒤에 책에 저하고의 그런 인연을 잠깐 쓰셨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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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하신 형님의 영향으로 연기에 관심을 갖게 돼▶ 대학교 재학 중에 2학년 때 탤런트 시험에 된 겁니까?
네. 1973년도 MBC 공채 6기입니다.
▶ 어렸을 때부터 연기, 배우와 관계가 있었던 건가요?
아무래도 제 큰 형님께서 연극을 하셔서 어릴 때부터 어깨너머로 많이 보고, 집에 있던 책이 거의 그런 책이었고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접하게 된거죠. 그러다가 퇴계로의 서울침례교회에서 추수감사절날 작은 연극을 한 번 해보자는 의견이 나와서 저는 친구 따라서 교회를 같이 다닐 때에요. “그래도 너는 형이 집에서 이런 것을 하니까 제일 많이 알지 않냐?” 해서 저보고 연극을 맡겼어요. 그래서 제가 연출도 하고 ‘돌아온 탕아’의 아버지 역할로 출연도 했습니다.
그 때가 고등학교 2학년 때였어요. 그 때 그 경험이 평생 남아서 지금까지 이 길을 가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죠. 그 때 우리끼리 잘 알지도 못하면서 꾸미고, 조명을 만들고 했던 기억이 굉장히 남아서 평생 이 길을 가게 되었고, 또 결정적인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렇게 되는 바람에 그때는 그것만 하면 전부인 것처럼 제 정신이 다 변해서 대학 들어갈 걱정을 안하고 있는거죠. 공부를 거의 안하다시피하고 명동예술극장을 쫓아다니기 시작했죠.
▶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를 나오셨죠.
집에서는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아니면 지원을 안해주겠다 그랬어요. 그래서 많이 반대를 했죠. 또 형이 앞에서 물을 많이 흐려났기 때문에 처음에 반대를 많이 하셨어요. 그런데 저의 둘째 형도 음악을 하셨고, 누님도 노래를 잘하셔서 성악을 하려고 했고 해서 집안이 늘 시끄러웠어요. 그래서 저의 어머니가 저는 기타도 못 배우게 했습니다. 너까지 이런 쪽으로 가면 안된다고요. 그런데 그렇게 되니까 어쩔 수 없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잘 된 것 같아요.
▶ 탤런트가 된 이후에 무명 시절은 없었나요?
무명시절은 있었는데 조금 짧았죠. 참 운도 좋았고, 그 때만 해도 참 순수했어요. 굉장히 열심히 했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아침 6시면 학교 가서 아무도 없는 소극장에서 발성 연습도 하고 대사연습도 하는 연습을 굉장히 많이 했고요. 끝나고 나면 방과 후에는 작품 연습을 하고 일요일도 없이 열심히 한 결과로 지금까지 먹고 산다고 생각을 합니다. MBC에 들어와서 교육을 6개월 받고 6개월은 엑스트라 생활을 했죠. 저도 수사반장에서 도망가는 범인, 옆에 쫓아가는 행인 등을 했습니다.
▶ 그러다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나요?
관심을 조금 끌었던 것은 수사반장이라는 드라마에서 웨이터 역할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말 단역이었는데, 나이트클럽에서 손님한테 술을 날라다 주고 하는 대사도 별로 없었어요. 제 나름대로 연구를 많이 해서 웨이터도 병을 여러 개 드는 것을 해야겠다 해서 쟁반을 양쪽 손에 두 개 들고 그 위에 술병을 가득 올렸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그렇게 양쪽에 들고 다녔어요. 제가 컷트가 있는 것도 아니고 큰 그림에서 배경인데 그렇게 돌아다니니까 신기해 보였나봐요. 그래서 제가 얼굴만 크게 클로즈업 되도록 감독님께서 배려도 해주셨어요. 그 때 아마 고석만 감독님이셨을 거예요.
어쨌든 콘티에도 없는 새로운 저의 컷트도 생기고 그 때 같이 했던 선배들도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싹이 보인다.’ 라는 얘기를 했었다고 나중에 들었어요. 그렇게 작은 역할도 열심히 했던 기억이 있고요. 그렇게 1년간 단역 생할을 하고, 1974년도 1월 1일날 김수현 선생님께서 쓰신 ‘강남가족’이라는 홈드라마에 제가 고정 배역을 처음 맡았습니다. 그 때도 역시 아버지 어머니가 최불암 선배님, 김혜자 선배님, 누나가 김영애 씨, 제가 막내아들인 고등학교 야구선수로 주연을 했어요. 그 때 사람들 기억에 남고 근래까지도 얘기하시는 분들이 꽤 있었어요. 그것이 저의 방송 연기자의 시작입니다.
▶ 그렇게 바쁘게 활동하시다보니 아버님, 어머님 임종을 지키지 못하셨다고 하던데요.
역시 배우 생활 하니까 그런 일이 생긴 것 같아요. 그 때 어머님이 먼저 돌아가셨는데, 제가 그 때 MBC에서 ‘옥녀’ 라는 드라마를 하고 있을 때입니다. 제가 군대 다녀와서 다시 복귀해서 할 때인데, 표재순 감독님이 오셔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씀해주셨는데, 저는 사극이니까 다 분장을 하고 의상을 입고 있기 때문에 못 가는데, 방송국에 PD선생님들이 저한테 오셨어요. 그 때 표재순 감독님이 이런 얘기를 하셨어요. “이제 진짜 배우가 된거다.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네가 여기를 떠날 수가 없고 다 마치고 가야 하는 것이 배우의 인생이다. 이런 것을 한 번 겪어야 진짜 배우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먼저 갈테니 너는 걱정말고 와라.” 라며 저를 위로해주시고 가셨어요.
그래도 어머니 때는 제가 서울에 있었으니까 빈소를 지킬 수가 있었죠. 그런데 아버지 때는 제가 예술의 전당 개관 기념으로 ‘햄릿’이라는 작품을 했었는데 프랑스에 초청을 받아서 파리에 갔을 때였어요. 파리에서 공연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쫑파티를 하고 있는데, 밖에 누가 찾아왔다 해서 나가봤더니 어떻게 수소문해서 파리에 계신 한 신부님이 찾아 오셨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전해주러 오신 거예요. 저희가 그 다음 일정은 독일이었기 때문에 갈 수가 없죠. 서울에서는 일부러 저한테 못 올꺼니까 연락을 아예 안 해서, 저만 못 갔죠.
그 다음 날 독일 본에서 공연을 했는데 햄릿의 첫 장면이 아버지의 유령을 찾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실제가 됐잖아요. 그리고 무대상에서 극이지만 돌아가신 아버지를 쫓아다니는 건데 그 연기가 안 되는 거예요. 같이 출연했던 동료들은 제 그런 것을 보고 펑펑 울고 난리가 났습니다. 그분들이 보기에는 실제와 연결시켜 본 것 같은데, 저는 오히려 평상시에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까 그 연기를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꼭 실제로 경험한다고 해서 연기가 잘 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 극장 운영은 힘들지만, 연극에 대한 사랑 때문에 포기 못해▶ 탤런트, 영화 출연, 연극 등 무수히 넘나드셨단 말이죠?
뮤지컬도 하고, 현대 무용도 하고 했죠. 다 연기에 도움을 받고 싶어서 했던 것들입니다. 그 때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에요. 또 정말 많이 도움 받았어요.
▶ 그러다가 극단을 차렸는데, 극단 운영이라는 것이 굉장히 쉽지 않다고 하던데요.
1995년도에 극단을 만들었고요. 1999년도에 극장을 개관했습니다. 연극하는 일이 어렵죠. 왜냐하면 영화와 달리 하루에 다섯 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공연장 규모 자체가 작은 객석이니까 손님이 아무리 많이 들어도 한계가 있는 거죠. 구조적으로 자립하기 굉장히 어려운 분야죠. 하지만 없어서는 안 될 기초예술 중에 한 분야이고요. 그 당시로서는 제가 건방지게도 좀 힘 있을 때, 잘 나갈 때 내가 공부했던 연극을 좀 더 집중적으로 해야 되겠다 해서 극단을 만들고 했죠. 그 이후로 방송이나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좀 뜸하게 되었죠. 이젠 완전히 늙은 다음에 영상매체는 하고 싶어요.
▶ 그런데 극단을 운영한다는 것은 적자인 경우가 많다고 하잖아요. 어느 자료를 보니까 한 달에 천만원 정도의 적자라는 표현도 있더라고요.
그 정도면 좀 버티기가 쉽죠. 아무래도 조금 더 나죠. 특히나 저 같은 경우는 작품을 제작도 하고 극장에서 공연도 해야 하니까 제작비용도 있고, 극장 관리 운영하는 비용이 있어서 만약 연극 한 편이 관객이 많이 오지 않고 하면 이중고에 시달리는 거죠. 예전에는 사실 괜찮았어요. 제가 광고도 많이 찍고 과외로 수입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적자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또 일해서 벌어 메꾸고 해왔는데, 요즘은 수입을 올릴 만한 일을 거의 안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좀 문제죠.
▶ ‘그런데 왜 하느냐’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는데요.
지금 문 닫으면 조금 여파가 크죠. 제가 ‘전원일기’를 빗대서 말씀 드리고 싶은데요. 전원일기에서 제가 둘째 아들이었잖아요. 대학도 안 가고 아버지가 농촌을 지켜라 해서 주저앉힌 청년이잖아요. 저 개인적으로는 전원일기가 도움도 되었지만 어떤 때는 빠져 나가고 싶을 때가 많았어요.
나도 다른 드라마 멋있는 것 해야지 맨날 삽들고 왔다갔다 하느냐 했는데, 그렇게 못하도록 잡아둔 것이 그래도 삽들고 저 들판에서 왔다갔다 하고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전원일기가 끝날 때까지 지키겠다, 그래야 농촌 청년들이 그나마도 흔들리지 않고 저 사람도 안 떠나고 저렇게 땅 파고 있는데 하는 영향이 분명히 있을거라 생각을 했기 때문에 좀 고집스럽게 지켰죠. 그래서 전원일기 가족이 전체적으로 큰 갈등과 어려움 없이 22년을 친가족도 아닌데 그렇게 잘 간 겁니다. 그런 책임감을 다 갖고 있었기 때문에요. 극장 운영하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 ‘전원일기’ 외에도 화려한 작품들의 배역이 너무나 많았어요.
제가 기억에 남는 것이 흑백 시절에 했던 ‘장희빈’의 숙종 역할이죠. 저희 형님이 연출하신 건데 방송국 들어와서 처음 10년 만에 형제가 같이 한 작품입니다. 그 때 이혜숙 씨가 데뷔한 작품이고 이미숙 씨도 거의 초창기 시절이었죠. 그리고 ‘첫사랑’ 이라는 드라마가 생각나고요. 황신혜, 허윤정 씨 두 분이 데뷔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미니시리즈라는 제목이 붙은 드라마의 제일 처음을 제가 했는데요. ‘불새’라는 드라마였어요. 또 ‘최후의 증인’ 등 굵직굵직한 작품을 많이 했죠. 또, KBS에서 ‘야망의 세월’이 있죠. 그 당시 대기업의 총수를 모델로 한 작품인데 정말 폭발적인 시청률을 올린 작품입니다. 그런 작품들이 기억에 남고, ‘전원일기’는 지속적으로 했던 작품입니다.
▶ 베드신도 하셨나요?
영화에서 좀 했던 것 같아요.(웃음) TV에서는 그런 것이 별로 없었던 것 같고요.
▶ ‘야망의 세월’에서의 배역 때문에 이명박 후보와 가까워지게 되신 건가요?
아무래도 그 드라마 때문에 가까워졌고요. 그 전부터도 뵌 적은 있습니다. 그 당시 왕회장님이라고 하는 돌아가신 정주영 회장님과 뵌 적이 있어서 그 전부터 많이 친해졌고요. 제가 그 분과의 관계에서 굉장히 감동을 받았던 것은 말레이시아의 고속도로 현장 촬영을 갔다가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같이 앉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에 꿈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이룰만큼 다 이루신 분이 무슨 또 꿈이 있으시냐?’고 반문을 했더니, 당시 소련의 시베리아에 가서 거기에 있는 석유, 가스 자원을 파이프를 연결해서 서울에 끌고 와야 한다, 우리가 에너지가 없기 때문에 그걸 어떻게든지 끌고 와서 사용해야 된다는 얘기를 하셨어요. 그 당시 소련은 공산권이었기 때문에 얘기만 들어도 경기를 할 때였고, 가 본다는 생각은 꿈도 못 꿀 때였어요.
그 때 저는 너무나 깜짝 놀랐어요. 과연 가능한 일인가 생각했죠. 근데 그걸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모습을 보고 제가 굉장히 감동을 받았고요. 서울 문화재단은 아무래도 그러다 보니 제가 맡게 되어서 사실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이었습니다. 문화예술을 좀 더 전문적으로 가꿔보자고 만든 재단이었기 때문에, 또 서울이라는 대도시의 문화예술을 어떻게 할 것인가 숙제가 너무 너무 많잖아요.
▶ 그 당시 서울의 문화예술은 사실 대도시 치고는 별로 미흡하고 없었던 때였는데, 서울 문화재단 대표 하시면서 이뤄놓은 일은 굉장히 많으신 것 같아요.
많은 일을 벌이기도 하고 하기도 했어요. 저희들이 주장하고 싶었고, 만들고 싶었던 것 중에 제일 얘기 드리고 싶은 것은 돈이 있거나 없거나, 물질적으로 풍부한 사람이거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거나 뭔가 문화예술에 관련된 균등한 기회를 만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는 거예요. 돈 있는 사람은 비싸고 좋은 것 다 할 수 있지만 없는 사람은 없다고 해서 그런 것을 못 만난다면 정부나 기업이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정책적으로 만들 수 있게 해주자는 거였죠.
또 요즘 한창 문제가 되고 있는 학위 위조도 제가 4-5년 전부터 이야기 한 겁니다. 학벌이 없어도 떳떳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문화 사회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지 못하니까 위조를 하는 것 아니에요. 결국 그런 결과를 우리가 지금 톡톡히 당하고 있고 치르고 있는거죠. 그 당시에 그런 주장을 했었습니다. 또 우리나라를 ‘성형수술의 천국’이라 부르잖아요. 성형수술을 하지 않아도 취직 잘 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그런 주장을 많이 하면서 3-4년을 보냈던 것 같아요.
◇ 앞으로도 기부활동은 더 많이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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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행정가에서 정치적인 쪽으로 끌어 들이려고 하고 본인도 가고 싶어하는 것 아닌가 하는 얘기들도 있는데, ‘문화관광부 장관감’이라고 하는 동료들의 얘기도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사실 그런 얘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뜨거워서 그런지 막 그런 얘기를 하고 싶어 하잖아요. 어떤 일이 목적이 돼서 그 목적을 향해서 모든 일이 맞춰지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또 제 팔자를 제가 어떻게 하겠어요. 오늘날까지 이렇게 온 것도 꼭 저 길로 가야겠다고 생각을 해서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저는 앞으로 어떤 일이 어떻게 될지에 대해 구상을 하거나 계획 하지는 않습니다.
근데 단지 저에게 맡겨진 일들을 열심히 하다 보니까 그것이 또 다른 쪽으로 이동하게 되고 변하게 되는 일들이 생기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 것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생각은 하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 정치를 한다 안한다는 얘기를 할 필요도 없고요.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물어봐요. 굳이 따지자면 하게 되면 하는거죠. 하지만 그것을 목적으로 두고 일하지는 않겠다는 거죠. 조금 다르죠. 하여튼 저한테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그런 것들이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겠죠.
▶ 광고 출연료를 기부하는 일도 참 많이 하셨어요?
그러고 보니까 꽤 많이 했어요. 바로 얼마 전에 일산의 국립 암센터에 기부를 한 적이 있는데요. 그건 제가 해남부터 국토 종단을 하면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정리를 했습니다. 왜냐 하면 정말 길바닥에 나와보니까 모든 것이 감사하더라고요. 진짜 감사라는 말을 입에 달고 20일간을 서울까지 걸어왔어요.
그 땡볕에서 길가에 서 있는 나무 한 그루의 그늘이 얼마나 감사했던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저한테 물 한 대접 주는 아주머니에게도 감사하고 세상에 감사하며 살았어요. 그래서 내가 올라오면서 앞으로는 정말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후반기가 잘 마무리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막상 서울에 오니까 막 바쁘고 다니다 보니까 금방 잊어버리게 되고 도시속에 물들면 그런 것들은 또 다 변하거든요. 그래서 변하기 전에 빨리 내가 실천하는 것이 잊어버리지 않는 계기가 될 것 같았고 다행히 또 그런 광고를 찍게 되었고요. 아마 제가 재단 대표를 할 때부터 그 때는 공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상업적으로 광고를 찍어서 돈 받는 일은 안 했죠. 대신 꼭 필요해서 광고를 찍게 되면 거의 전부 다 기부를 했습니다. 꽤 많은 액수를 했어요.
▶ 그렇게 많이 기부하는 것에 대해서 아내의 바가지가 있지는 않나요?
많죠. 그런데 대체적으로 잘 동의를 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사실 어찌 보면 과외로 생긴 돈이니까요. 아무래도 제가 생활하는 것을 다 버리고 기부하기는 어렵죠. 그런데 그렇게 과외로 생긴 돈은 제 손에 오기도 전에 기부를 하기 때문에 집사람이 체감 온도가 낮습니다. 제가 몸으로 때워서 일해드리고 하는 거니까요. 앞으로도 더 열심히 할 겁니다. 이제는 과외로 생기는 물질적인 것은 더 많이 기부할 생각입니다. 또 제 재주, 몸으로 때워서 할 수 있는 그런 기부는 더 많이 했죠. 환경운동이라든지 어디 가서 사회 보는 일부터 사진 찍는 것, 음식물 줄이자는 포스터 만드는 것 이런 것들은 다 돈 안 받고 합니다.
▶ 혹시 이명박 후보를 역대 조선시대 인물로 비교하면 혹시 어떤 인물로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다른 분들은 물론 생각에 따라서 다르긴 하겠지만 굉장히 개혁적인 인물군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어요. 약간의 오해의 소지도 있을 수 있으니까 오히려 중간에 젊은 나이에 일찍 돌아가신 조광조 같은 분이라든가, 일하지 않으면 밥 먹지 말라고 하신 분들도 꽤 있거든요. 오히려 그런 쪽의 인물에 들어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 나의 것을 남과 나눌 때 더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아 ▶ 부인께서는 소프라노 강혜경 씨구요, 9살 나이 차이가 맞습니까? 근데 연애 초보였던 유인촌 씨가 만난 지 여섯 번 만에 속전속결로 결혼하셨다는 자료가 있더라고요?
1984년도에 결혼했는데요. 그 때는 제가 정말 바쁘고 인기가 많을 때였어요. 처음에는 일에 치여서 그랬는지 여자가 잘 안보였어요. 그러다가 누가 중매를 서서 선을 봤는데 그 때 집사람이 성악을 했으니까 독창회 한 테이프를 저에게 들어보라고 주었어요. 헤어지면서 받았는데 차안에서 몇 번 듣고 일하느라 잊고 있었죠. 그러다가 집사람이 먼저 전화를 했어요.
기다리다가 자기 독창회 테이프니까 돌려달라는 거죠. 그래서 여의도에서 만났는데 그 테이프가 아니었으면 못 만났을지도 모르죠. 그거 돌려주려고 만났는데 그 때 좀 자세히 보였어요. 그래서 사실 돌려주고 헤어지려고 했던 것이 식사하고 다음에 만나기로 연결이 된 거죠. 그 때 바빠서 사실 데이트도 많이 못했어요. 하루 날 잡으면 하루 종일 같이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영화를 하루에 두 편, 세 편 본 적도 있고, 주로 미술관 많이 갔고요. 그렇게 만나면서 생각이나 모습이 제 눈에 잘 띄더라고요.
▶ 신혼집은 몇 평부터 시작했습니까?
형님이 살 던 집에서 시작을 했어요. 바로 위에 형이 사우디아라비아에 나가 있었어요. 그래서 형이 살던 아파트가 비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살 수 있었죠. 한 38평 정도였으니까 신혼치고는 그 당시로서는 아주 호화롭게 시작을 한 거죠.
▶ 지금 아이들이 아들만 둘이시죠?
이제는 다 컸죠. 큰 아이는 군대 갔고, 작은 아이는 대학교 1학년입니다.
▶ 졸업하고 뭐 한다고 그래요?
큰 애는 좀 비슷한 공부를 했어요. 미디어 아트라는 영상 쪽으로 공부를 했고요. 군대 갔다오면 공부를 더 하고 싶어 하니까 두고 봐야 할 것 같고, 둘째는 어릴 때부터 축구선수가 희망이었는데 우리가 안 시켰거든요. 근데 취미로 계속 축구를 한 것이 아직도 미련을 못 버리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본인도 선수는 못하겠다고 하고 스포츠 마케팅 쪽의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해요. 지금도 대학에서 축구선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 사회적인 역할도 다 성공을 한 것 같아요. 혹시 ‘나도 이런 것에서는 실패를 했었다’는 것이 있나요?
많죠. 우선 제가 4년간 제 인생의 위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마음고생을 한 소송사건이 있었어요. 돈 문제가 걸려 있는 거였어요. 4년 동안 대법원까지 가면서 제가 이겼습니다. 그 때 마음고생을 많이 했고 세상이 그렇게 녹록치가 않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 때 졌으면 아마 이 나라에 없었을지도 몰라요. 길바닥에 나앉는 거니까요.
▶ 앞으로의 특별한 계획은 어떠신가요?
지금은 제가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정치적인 일에 거의 참여가 되어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그런 일이 잘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12월까지 운동을 해야겠죠. 그런 것들이 저한테는 가장 특별난 일이고요. 그 다음은 제가 꿈꾸고 가꿔온 강원도 봉평에 있는 달빛 극장이 있습니다. 폐교에 만들어 놓은 극장인데, 지역 주민들의 예술 교육, 체험, 지역으로부터의 문화발전소를 만들자는 저의 예전부터의 생각을 구체화시켜 보려고 열심히 머리를 짜내고 있습니다.
▶ 연기 인생 30년 동안 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있으시다면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가 햄릿만 다섯 번을 했어요. 그러니까 굉장히 많이 했죠. 주로 예술의 전당 개관 때, 호암아트홀 개관 때, 저희 극장 개관 때, 또 이대 앞의 현대극단의 작은 극장을 개관할 때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여러분이 너무나 잘 아는 대사를 조금 해드릴께요.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이 더러운 운명의 화살을 그냥 참고 견딜 것인가,그렇지 않으면 이 환란의 바다를 힘으로 막아 싸워 이기고 함께 넘어지는 것이 사나이의 할 바인가.그것이 문제다.죽는다는 것은 잠이 드는 것잠이 들면 꿈을 꾸겠지아, 그 꿈속에서 어떤 꿈을 꿀 것인지 그것이 두렵다.”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사실은 햄릿은 마지막으로 한 번 하려고 메일주소까지 “hamlet2005"로 바꾼 것이 2005년도에요. 그 때 마지막으로 한 번 해보겠다고 했는데 그 해에 캐스팅 문제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로 못 했어요. 그래서 메일 주소는 그냥 쓰고 있는데 아직 한 번 미련은 남아 있습니다.
▶ 어떤 삶의 철학을 갖고 계신가요?
일단 나누는 것은 남을 위해서 좋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지금은 확고하고요. 결국 내가 나의 것을 남과 나눌 때 가장 저의 즐거움이 훨씬 크다는 것을 느꼈고요. 그리고 햄릿 말고 제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이 하나 또 있습니다. 톨스토이의 작품인데 “홀쓰또메르”라는 어려운 제목을 가진 작품이에요. 제목은 말의 이름인데, 제가 그 역할도 네 번을 했습니다.
결국 사람이 어떻게 늙어가야 할 것인가, 사람 사는 것의 아주 진짜 소금같은 작품이에요. 거기에 나오는 얘기가 있습니다. 한마디로 표현을 하자면, 사람이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잊어버린다는 거죠. 하지만 상처는 평생 남아서 그것을 볼 때마다 그 옛날의 기억을 다시 되살리게 한다는 거죠. 제가 하려고 하는 연극은 그런 상처와 같은 존재다 라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어요.
그래서 즐거운 분이든 돈이 많은 분이든 힘든 분이든 연극이라는 행위를 하는 저의 이런 것 자체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상처와 같은 존재로 남아서 계속 자신의 삶을 잊어버리지 않고 돌아볼 수 있는 그런 예술을 하고 싶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표준 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 정리=김은옥)